- 왕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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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이 그 놈이다. 믿을 만한 놈 하나 없다’라는 안경을 쓰고 살면서도 굳이 나가게 되는 소개팅 자리는 ‘백마탄 왕자’에 대한 환상일까? 아니면 그 환상을 깨기 위한 것일까? 동화책과 현실은 다르며 드라마와 현실 또한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혼자되어 자유를 만끽하던 어느 날, 데이트 정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개팅을 시작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평생을 같이 할 남자라면 옷깃만 스쳐도 알 것 이라는 예지력을 조물주는 선물해 줄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소개팅을 일체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인생의 모든 존재의 이유와 목표가 사랑이었기에 나에게도 백마탄 왕자는 아닐지라도 운명의 남자가 짠하고 나타날거라 생각했다. 소개팅은 웬지 인공조미료를 잔뜩 친 듯한 느낌을 주었기에 거부감이 들었다. 운명이라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내 앞에 나타나리라는 어이없는 생각은 만화책으로 사랑을 배운 휴유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 먹고 이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누군가를 만나려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영 모르겠다. 일단 친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이제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졌다고. 남자를 보는 나의 feel과 판단력을 믿을 수 없었기에 남의 판단에 의지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feel만 믿었다가 혹독한 수업료를 치르지 않았던가? 대학시절에도 절대 하지 않던 소개팅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어느 정도 내려 놓고 세상을 좀 살다가 하는 소개팅은 ‘남자가 다 그렇고 그렇지 뭐’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가게 되는 자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언니로부터 소개팅 제안을 받았다. ‘그래,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모르니 무조건 만나보자’라는 심정으로 흔쾌히 오케이를 불렀다. 전화번호만 주면 둘이 만날 텐데, 굳이 양쪽의 소개자까지 포함해서 4명이 만나잔다. 그것도 일식당에서. 여기서 누군가 피식하고 웃을 텐데, 한번 나이 들어 해보시라, 갈 곳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적당히 술이 곁들여야 분위기도 흥겹고 좋을 듯해 소개자 양쪽이 머리를 맞대고 고른 자리였다.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갔는데 남자 쪽은 아직 도착전이었다. 퇴근시간에 걸려 막히는 길 때문에 15분 정도 늦게 도착을 한 일행이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 명은 맞선 남, 한 명은 소개팅 주선자가 분명한데, 둘 중에 누가 맞선 남일까? 순간적으로 모든 feel을 가동시켜 안테나를 세웠다. 같이 온 언니한테 직업과 나이 그리고 먹고 살만하다는 것 이외에는 전혀 들은 것이 없었던 터라 안테나를 가동시켜봤자 헛수고였다. 그렇다면 촉에 맡기는 수 밖에. 한 남자는 인상이 서글서글하고 덩치가 다부지다. 다른 남자는 완전 조폭의 두목처럼 험상궂은 인상에 덩치도 남산만하다. 언뜻 봐도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다. ‘설마 저 남자는 아니겠지?’하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고 있는데 맞선 남이 나를 알아보고는 내 앞에 와서 앉는다. 숨이 턱 막힌다. 무서운 인상의 그 남자였다. 이런 자리가 아니면 절대 말 한 번 붙여볼 엄두가 나지 않을 사람이었다.. 마음에서 보이지 않는 기대의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 그렇지’.
‘그래, 회나 먹고 가자’라는 심정으로 회를 연신 입으로 집어 넣었다. 마치 생선살이 나의 기대감인 것처럼 질근질근 꼭꼭 씹어 먹었다. 질문이 날아온다. 초면에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고 소개팅 주선자의 안면도 있어 또박또박 대답을 해주고 맞장구도 쳐 주었다. 이 남자가 왜 4명이 만나자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둘만 있었던 자리라면 아무리 변죽이 좋은 나라도 얼어붙어 말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같이 따라온 주선자들이 옆에서 바람을 잡아주는 바람에 그나마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맞선 남은 나의 마음을 읽은 듯 하다. 누구보다도 자기의 덩치와 인상을 알 것이 아닌가? 내가 가장 흥미진진하게 생각하는 상황은 ‘반전’이다. 반전의 매력이 넘치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약해진다. 호기심이 갑자기 왕성해지기 때문이다. 내 앞에 앉은 험상궂은 이 남자, 가만히 보니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애교와 유머감각이 있다. 처음 보았을 때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마음이 좀 녹아 몇 시간을 마시고 웃다가 헤어졌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점심을 먹기 위해 만났다. 맞선 남은 나를 경치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갔다. 내 덕분에 드라이브 한다며 헤헤거리는 그의 모습에서 바쁜 일상이 그려졌다. 그가 심혈을 다해 고른 메뉴는 다름아닌 ‘닭죽’이었다. 데이트에 닭죽이라…..나이를 먹으니 데이트 하는 것도 다르구나! 그래, 나이 먹고 힘도 부치는데 보양식이나 먹자. 하기야 결혼 후에 살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이혼은 삶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그러니 서로가 서투를 수 밖에. 닭죽을 같이 마주하고 앉아 있자니 웃음이 났다. 쌀과 닭살로 범벅이 된 죽을 보며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을 때 거구의 남자가 말을 꺼냈다. 내가 마음에 든단다. 둘 다 두 번 실패할 수 없으니 6개월은 만나보자고 한다. ‘그래 나 정도면 당연히 괜찮지. 사람 보는 눈은 있어가지구!’
그가 갖고 있는 반전의 매력에 끌려 3번인가 4번을 만났다. 척 보면 다 안다는 착각과 오만에 빠져있던 나로서는 기네스북에 올라갈 횟수이다. 나를 끌리게 하는 것에는 반전의 모습도 있었지만 무시할 수 없는 그의 배경도 한 몫 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재력가였다. 첫 번째 결혼에서 쩐의 전쟁을 살벌하고 치열하게 치른 나는 그의 배경이 당연히 매력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반전 매력보다도 그의 배경이 더 크게 어필이 되었던 것 같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속물근성이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떡하리오’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주지도 않는 김칫국을 사발 채 들이마시며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다. ‘내가 만약 그 집의 안방 마님이 된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까?’ 돈 네 이놈! 네가 무엇이길래, 사람의 마음을 이리 어지럽히느뇨? 돈 앞에 내가 이렇게 맥빠지게 흔들릴 줄이야! 그 동안 혼자 깨끗한 척, 고고한 척 하더니 드디어 껍질을 벗는구나!
그 한테는 뜨문뜨문 연락이 왔다. 사귄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금 그의 회사는 너무도 중요한 순간이기에 이해를 해달라고 말했지만, 그는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 항상 일순위가 일이었다. 도대체 소개팅 자리에 왜 나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둘 다 필요에 의해 그 자리에 나간 것은 맞지만 나는 사랑이 절실했고, 그 사람은 간간이 남는 시간을 채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만나고 있으나 마음에 들어서지 않는 그의 존재감, 나에게 관심은 있다고 하나 느껴지지 않는 그의 마음. 스스로에게 몇 개의 질문을 던졌다.
Q.. 배경을 제외해도 매력적인가?
Q.. 평생을 연인처럼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 만큼 코드가 맞는가?
Q.. 돈이 필요한 것인가? 사랑이 필요한 것인가?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 마지막 질문에서는 더 그랬다.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돈이라는 요물은 내 손으로 번 것도 지키기 힘든 법인데 남의 주머니에 있는 것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돈이 많은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명품은 실컷 걸치겠지만,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재혼일수록 둘 사이의 소통이 최우선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자식을 낳고 키우는 재미로 살 수 있을 나이가 아니지 않은가? 그 놈의 사랑은, 열렬하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금방 얼굴을 바꾸어 버리는 위인이 아닌가? 그러기에 지금이라도 뜨거워야 힘들 때마다 그 추억을 들여다 보며 살 일이 아닌가? 여자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는? 자신을 위해 순정을 바치는 남자란다. 나 또한 그랬다. 그렇다고 명품에 별 관심도 없는 내가 아닌가? 그래, 600억이 아깝긴 하지만, 인연이 아닌 것을 어떡하리오. 이 사람과는 닭죽과 도미회만을 같이 먹을 인연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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