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어니언
  • 조회 수 1556
  • 댓글 수 6
  • 추천 수 0
2015년 3월 9일 12시 07분 등록
나는 지금 제주도에 와있다. 바람이 항상 나무의 잎사귀와 머리카락 끝을 어루만지는 곳, 파도소리에도 흙에도 가늘고 키가 작은 나무에도 여유로움이 빚어낸 느슨함이 알알이 섞여있는 곳에 와있다. 따뜻한 물이 채워진 야외 수영장에서 하늘거리는 야자수 잎사귀의 움직임을 넋놓고 바라보았다. 저절로 마음이 치유되는 것이 느껴진다.
어렸을 때 네 식구가 함께 몇 번 제주도를 놀러왔었다. 한번은 아주 추운 겨울날 왔었는데, 해가일찍 떨어져 완전히 깜깜해진 천백도로를 타고 영실을 지나고 있었다. 산길이라 가로등도 없었다. 낮에는 아름다웠던 숲속 나무들은 검은 그림자로 바뀌고, 가느다란 2차선 도로만 빽빽한 숲의 틈바구니에 끊어질듯 끊어질듯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빌린 차의 헤드라이트를 보고 위험한 야생동물이 나타날까봐 두려웠다. 혹은 토요일에 일찍 학교가 끝나고 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보았던, 한국어로 더빙된 911구조대 프로그램에 나오는 가족들처럼 괴한에 습격을 받거나 끔찍한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운전하던 아빠가 갑자기 차를 길가에 세웠다. 겁에 질려서 나는 어서 가자고 소리를 질렀는데, 부모님은 차에서 내려서 하늘을 보라고 하셨다. 나는 겨우 창문만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둥근게 보이는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올라와 있는 것 같았다. 달빛을 받은 모래를 뿌려놓은 것 같기도 하고, 다이아몬드 가루를 하늘에 던져놓은 것 같았다. 나는 외투를 꿰어입고 차에서 내려 차에 기댔다. 추운 겨울밤을 가득 메운 별들 사이에서 나도 별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 후로 이십 년쯤 지났지만 그 밤하늘은 내가 본 것중 가장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아빠는 대략적으로 꼭 들려야 할 곳만 몇 군데 정한 다음에는 목적지에 구애받지 않고 여행계획을 짰다. 그리고 꼭 처음 가보는, 지도에 없는 길로 들어가 보았다. 아직 언니와 내가 어렸을 때는 엉뚱한 곳으로도 자주 들어가서, 들어는 갔으나 차를 돌려 나올 곳이 없어서 후진으로 나와야 한다든지, 멋진 석양이 있어야 했는데 큰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볼 수가 없다든지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길을 선택하는 비결은 한번도 이야기해준적 없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지도에도 없는 길의 끝에서 기가 막힌 풍광들을 만나곤 했다.
마지막으로 아빠와 둘이 여행을 떠난 것은 2012년 석가탄신일 연휴였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여행을 가기로 했고, 엄마와 언니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못가고 아빠랑 둘이 가게 되었다. 우리는 번갈아가면서 운전을 해 남도로 내려갔고, 아직 푸릇한 보리밭사이로 고불고불 난 길과 조용한 모래사장이 있는 작은 마을과 메타세콰이아 나무가 지겹도록 늘어선 2차선 도로를 찾았다. 그러고 다음해 아빠가 돌아가시고 가족들과 유골을 뿌리기 위해 그 바닷가를 갔을 때는 나무가 늘어선 길도 절반밖에 찾지 못했다. 지도에도 없으니 다시 찾아갈수도 없고, 어디 물어보아도 이제 나 이외에 누가 또 알리 없다. 아빠와의 여행이라는 것은, 그렇게 두 번은 없는 일생 단 한번 뿐인 우연이 가져다준 여행이었다. 그러니 우리의 여행은 늘 암묵적인 룰이 생겼다. 지난 난 여행에서 어떤 곳이 좋았는지 잘 기억할 것. 또 새로이 여행을 떠날 때는 이번 여행에 집중해서 모든 곳에 멋진 우연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지도에 없는 길을 찾아나설 것.
-
둘째날 아침에는 서귀포 휴양림에 가서 1시간 반정도를 걸었다. 숲선생님과 함께 걷는 코스였는데 우리가 걷는 길 옆으로 나타나는 나무와 풀, 꽃의 이름을 많이 알려주셨다. 제주도에만 있는 굴거리 나무, 참식나무, 서이나무도 있었고 편백나무 열매도 알게 되었다. 북한산에서 본적 있던 때죽나무 작살나무도 있었다. 어떻게 생긴 나무인지 구별할 수는 없지만 이름은 알고 있는 것들. 그것도 다 아빠가 알려준 것들이다. 일고여덟살 때 아이젠을 끼고 꽁꽁언 백운대를 올라가고 비봉을 매주 가고 했더 것이 생각난다. 요즘은 어느 집 아빠가 딸을 데리고 그렇게까지 다닐까 잘 모르겠다.

여행이 끝나고 집에 가면 원래의 나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원래의 출근, 원래의 업무, 집이 있는 골목. 돌아갈 곳이 있어 기쁘지만, 또 다음 여행을 고대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게 될 것이다. 여행갈 때의 마음가짐과 출근할 때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여행의 마음가짐을 늘 가지고 있게 된다면 고통스럽다고만 생각한 직장에서의 시간에 좀더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아빠의 여행이 알려준 교훈은 여행이 내가 그곳으로 떠났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라면,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바로 나의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즐거운 우연을 여행으로 불러들이는 힘은 분명 어디서든 적용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매일 같이 일하는 사람과 일의 세부적인 것들을 잘 기억해주는 것이다. 숫자를 다루는 일이라면 그 숫자를, 사람과 하는 일이라면 그 세부적인 차이를 받아들이고, 잘 기억해두는 것이다.
우연부르기와 기억하기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 될 것 같다. 마치 여행지에서의 삶에서 우리가 한없이 부드럽고 유연해지듯이, 자신의 유연함을 바래지 않게 간직하자. 그리고 다시 그 마음을 잊어버릴 것 같으면, 마음이 부르는 자유의 고향을 찾아 어딘가로 훌쩍 떠나자
IP *.111.19.167

프로필 이미지
2015.03.09 12:46:20 *.143.156.74

해언아, 글 좋다. 이렇게 쓰면 책 한 권 나오겠어.

사부님과 함께 했던 동해 여행이 생각난다. 그때도 없는 길로 들어가 우연을 만났지.

네 글 읽으며 아빠가 좋아하실거야. 매주 한 편씩 빼먹지 말고 써라.

그것이 너를 구하고 아빠는 빛내는 일일 게야.

프로필 이미지
2015.03.10 10:33:03 *.122.242.73

네! 교감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의 기도가 큰 도움이 되었어요. 꾸준히 쓰겠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5.03.09 13:41:16 *.255.24.171

길 없는 길로 여행을 하셨다니.

변경연이라는 길도 만드셨는데, 여행도 선생님만의 스타일로 하셨다니  역시 멋진 분!

프로필 이미지
2015.03.10 10:33:45 *.122.242.73

ㅎㅎ 우리의 졸업여행도 우리 스타일로 빛내보기로 해요 참치언니 

프로필 이미지
2015.03.09 16:16:12 *.196.54.42

와우, 해언! 오늘 여행의 고수를 만난 느낌^^

"우연부르기와 기억하기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일상을 여행가의 시선으로 살다가 약발이 떨어질만 하면 다시 떠나고....

이것 참, 기똥찬 여행의 방법이네^^ㅎㅎ

프로필 이미지
2015.03.10 10:36:21 *.122.242.73

ㅎㅎ 역시 구달님이 알아봐주시네요. 

구름과 달이 함께하는 구달님의 여행은 더욱 멋진 장면이 많을거예요.:D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