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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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민 은행의 기업 이념과 운영 방식
그라민 은행을 이끄는 원동력은 무하마드 유누스 행장과 그라민 은행의 확고한 경영 철학과 독특한 운영 방식에 있다.
그라민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이다. 이 은행은 겉으로 보기에는 기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영리 단체에 가깝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라민 은행은 남다른 사명감과 책임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은행’이라는 역할로 보면 이 은행은 이윤을 추구하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노력한다. 금융기관으로는 독특하게 그라민 은행은 사회적 책임과 이윤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그라민 은행의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그라민 은행이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고, 직원들의 동기 부여가 약하고 또 헌신적으로 일하지 않는다면, 마침내는 망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라민 은행이 민간 기업을 모델로 삼건 비영리 단체를 모델로 삼건 간에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 그라민 은행의 원동력이 영리 추구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우리 그라민 은행도 수익을 창출하고, 비용을 충당하고 미래를 개척하고, 계속 발전하는 노력을 한시도 늦춘 적이 없다. 하지만 그라민 은행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는 융자를 받는 회원들이 즉각적인 수익을 내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회원 주주들의 장기적인 복지 향상에 있다. (......)
나는 그라민 은행 활동을 통해서 이윤 추구만이 자유주의의 유일한 원동력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거기에는 사회적 목표라는 참 가치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점을 잊지 않고 기업 활동을 통해 사회적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이윤 추구만을 꾀하는 그 어떤 기업과도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다 나은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라민 은행의 업적은 주주들에게 주어지는 배당금이란 잣대만으로 측정되어서는 곤란하며, 배당금의 액수가 어떠하든 간에 우리의 활동이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몫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란 측면에서 볼 때 그라민 은행의 철학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좌파? 우파? 중도파? 그라민 은행은 정부의 개입을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는 입장이다. 또한 그라민 은행은 시장경제를 옹호하고, 창업을 권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그라민 은행은 우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라민 은행은 또한 사회적 목표를 성취하고자 노력한다. 예를 들면 가난을 퇴치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여성들로 하여금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남녀평등을 지향하고, 노년층의 복지를 보장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꿈은 이 세상에서 가난과 사회보조금을 몰아내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기존의 제도권이나 이윤추구에 목표를 두고 있는 일반 기업들과 다르다.
그라민 은행은 경제적 자유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기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기업이나 사회 분야에 개입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 국가의 역할은 기업들로 하여금 사회 분야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장하는 것에 그쳐야 한다. 이런 점들로 볼 때 그라민 은행은 좌파에 속한다.
여러 모로 살펴볼 때, 그라민 은행은 정치적으로나 전통적 관점에서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기가 곤란하다.”
● 그라민 은행의 가치와 규율: ‘우리들의 결심 16가지’
그라민 은행은 1978년부터 은행이 믿고 지향하는 가치와 직원들이 지켜야할 규율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당시는 그라민 은행의 실험기로, 정식으로 은행이 설립되기도 전이었다. 초창기에는 지역 책임자들이 매년 회합 갖고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시간을 가졌다. 두 번째 해부터 회합의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각 센터를 맡고 있는 책임자들도 참여했다. 198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전국 규모의 회합을 개최하였고 회합 중에 결정된 사항들을 문서화했다. 1982년 두 번째로 전국 규모로 열린 회합에서 참석자들은 ‘우리들의 결심 10가지’를 정리하여 공표하였다. ‘우리들의 결심 10가지’는 1984년 조이데브푸르에서 갖은 회합에서 ‘우리들의 결심 16가지’로 수정되었다. 오늘날 그라민 은행의 모든 지점에서는 직원들이 ‘우리들의 결심 16가지’를 소리 높여 외치고, 찾아오는 사람마다 직원 스스로가 이 문안에 적힌 대로 임하고 있는지 일일이 확인을 한다. 1984년 이후 이 문안은 더 이상 수정되지 않았다. 수정하지 않는 대신에 그라민 은행의 사람들은 16가지 조항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들의 16가지 결심’에 대해 유누스는 ‘이 문안에 포함된 조항들은 그라민 은행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존재이유와 삶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들의 결심 16가지>
1. 우리는 그라민 은행이 정한 네 가지 원칙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준수하고 실천한다. 이는 규율, 단합, 용기, 성실이다.
2. 우리는 우리의 가족에게 번영을 가져다준다.
3. 우리는 허름한 집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집을 수리하고,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새 집을 짓는다.
4. 우리는 야채를 재배해서 먹고, 남는 것은 판매한다.
5. 파종기에는 가능한 한 많은 씨앗을 뿌린다.
6. 우리는 가능한 한 아이들을 적게 갖는다. 우리는 이 지출을 줄인다. 우리는 건강을 돌본다.
7. 우리는 자녀를 교육시키고, 교육비용을 충당한다.
8. 우리는 자녀들의 위생과 환경을 생각한다.
9. 우리는 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한다.
10. 우리는 깨끗한 우물에서 길은 물을 마신다. 만일 물이 깨끗하지 않으면 끓여 마시거나 명반으로 소독한 후 마신다.
11. 우리는 아들을 결혼시키며 지참금을 받지도 않으며, 딸을 결혼시키며 지참금을 주지도 않는다.
12.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할 때는 저항한다.
13. 우리는 더욱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집단 투자 비율을 늘려 나간다.
14.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돕는다. 우리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돕는다.
15. 우리는 센터에서 규율이 깨진 것을 보면 이를 바로잡는다.
16. 우리는 센터에서 신체를 단련한다. 우리는 모든 모임에 단체로 참가한다.
‘우리들의 결심 16가지’는 몇 개의 조항을 제외하고는 가난을 벗어나고 생활의 질을 높이는 것과 관련이 깊다. 겉만 보면 선진기업의 비전 선언서나 기업이념에 비하면 매우 기본적이고 소박해 보인다. 하지만 방글라데시의 상황과 문화를 고려하면 그라민 은행이 선택한 16가지 결심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한 실용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방글라데시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노동인구의 3분의 2가 농민이고 국내총생산(GDP)의 약 30%를 농업이 차지하고 있지만, 높은 인구 증가율과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매년 식량 부족 현상을 겪는다. 국토의 대부분이 낮은 평지이기 때문에 우기에는 하천의 자연범람으로 국토의 5분의 2가 물에 잠긴다. 출생률은 1000명당 30명인데 비해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66명에 달한다. 1억 명이 넘는 인구 중 75%가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고, 시골 여성의 문맹율은 85%에 달한다. 여성 차별이 심하여 교육을 받는 여성은 극히 소수이다. 또한 부녀자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관습인 ‘푸르다’(Purdah: 여성의 격리, 은닉, 또는 사교적 관계를 갖지 않음)의 영향으로 여성들에게는 여러 종류의 제약이 따른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시집을 갈 경우 남자에게 지참금을 받쳐야 한다. 종교는 이슬람교가 80%를 넘게 차지하고 있으며, 다른 종교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다. 역사적으로 독재와 내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정치 상황이 불안정하고 정당 간 대립이 극심하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실업률은 40%에 달한다.
‘우리들의 16가지 결심’은 그라민 은행의 직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라민 은행의 주주와 회원(고객)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라민 은행의 지배구조를 보면, 정부가 약 8%의 주식을 갖고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은행의 회원들이 갖고 있다. 회원이 주주인 셈이다. 대부분의 주식을 회원들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라민 은행의 가치와 규율은 직원을 넘어 주주와 회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 소액 융자(microcredit) 방식과 까다로운 자격 조건
그라민 은행은 ‘담보 없는 소액 융자’를 제공하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설립 초창기에 많은 금융 전문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담보 없이 대출을 해주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라민 은행이 행하는 소액 융자가 한 가정의 경제적 여건을 호전시키기에는 너무 적은 액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담보 없이 이루어지는 소액 융자 시스템이 담보를 안고 하는 융자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한 소액 융자의 원금 상환율은 98%를 넘었고 소액 융자를 받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났다.
그라민 은행의 목표는 ‘부자 만들기’가 아니라 ‘가난 극복’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라민 은행과 유누스는 자활 능력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에게 한 번에 많은 돈을 빌려주면 오히려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 했고,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열심히 하면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소액 융자는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미 1970년 대 후반 진행된 실험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소액 융자의 효과는 확인됐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조 공장이나 큰 음식점을 운영하는데 드는 돈이 아니라, 대나무 의자나 빵, 혹은 옷 등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값이었다. 일반 은행의 경우를 보면 거액의 융자가 여러 문제점들을 동반하는데 반해, 소액 융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창의성과 활력을 준다. 방글라데시의 기업가나 부자들은 정치인들과 검은손을 잡거나 법을 교묘히 빠져나감으로써 빌린 돈을 갚지 않는다.( 그래서 산업개발은행의 원금 회수율이 10%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에게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라민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박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담보가 필요 없다는 점만 보면 그라민 은행에서 돈 빌리는 것이 쉬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은행의 융자 조건은 다른 어떤 은행보다 독특하고 까다롭다. 독특한 까닭은 이 은행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고, 까다로운 이유는 그라민 은행이 하는 일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활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라민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면 융자를 해주지 않는다. 경제적 수입 기준으로 하위 25%는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가난할수록 돈 빌리기가 쉬운 곳이 그라민 은행이다. 이 원칙은 방글라데시뿐만 아니라 그라민 융자 프로그램이 적용되는 모든 국가와 지역에 적용된다. 그라민 은행 한국지부인 ‘신나는 조합’도 마찬가지이다. ‘신나는 조합’의 융자를 받으려면, 도시에 사는 사람은 재산이 3천 만 원을 넘으면 안 되고, 한 달 수입이 1백 만 원을 넘어도 신나는 조합에 참여할 수 없다. 농사짓는 사람은 가진 땅이 농부 1인당 평균 경작 면적인 3,000평보다 적어야 한다. ‘신나는 조합’의 강명순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은행들은 대기업에는 수천 억 원씩 떼이면서도 서민들에게는 좀처럼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하지요. 하지만 신나는 조합에서는 돈 없고 배경 없는 빈털터리라는 사실을 잘 증명할수록 더 기쁘게 돈을 빌려주는 곳입니다.”
그라민 은행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방글라데시의 일반 은행들은 가난한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차별해왔다. 당시 융자를 받은 여성의 비율은 1%도 안 됐다. 그라민 은행은 일반 은행들과는 반대로 융자 대상을 여성으로 제한하고 있다. ‘가난한 여성에게 융자를 주는 것’이 원칙이다. 현재 300백만 명이 넘는 그라민 은행의 회원 중 95%는 여성이다. 방글라데시의 문화와 종교적 특성을 감안할 때 여성에게 융자를 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민 은행이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융자를 주는 이유는 가난의 문제가 남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여성의 문제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가정의 일상을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기근이나 가난에 더욱 직접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한 가정에서 식구들이 배를 곯아야 한다면, 대개는 그 가정의 주부인 여성이 먼저 밥을 굶는다. 대체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기근이나 양식이 부족할 때 자식들을 굶기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가 강한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자식을 돌보는 여성의 경우 그 고통은 더욱 심하다. 그래서 만일 여성에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이라도 주어진다면, 여성은 남성보다도 더욱 투쟁적이 된다는 사실을 그라민 은행은 잘 알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직원들은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가난한 여성들이 실제로 남성들보다도 가족의 기반을 닦는 데 훨씬 더 빠르게 적응하고 악착스럽다는 것을 체험했다. 또한 여성들은 자녀의 미래에 관심이 많으며, 일에서도 더 강한 인내심을 발휘한다. 융자 대상을 여성으로 제한하는 것에 대해 유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난한 여성에게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그 돈은 가장 먼저 자녀들을 위해서 쓰인다. 그 다음으론, 집안 살림에 쓰이는데, 이를테면 부엌용품을 산다거나, 지붕을 새로 얹는다거나, 가족의 편의를 위해 쓰는 식이다. (......) 경제발전의 궁극적인 목표가 삶의 질을 높이고, 가난을 줄이고, 안정된 일자리를 확보하고, 불평등을 줄이는 데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여성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성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고 고용 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상당 비율을 차지한다. 게다가 여성은 자녀들과 보다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여성이 우리 방글라데시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라민 은행은 ‘연대 보증 융자’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혼자 오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대출해주지 않는다. 다섯 사람이 하나의 그룹을 만들어 와야 한다. 융자는 개인 명의로 주되, 책임은 그룹 공동으로 지는 방식이다. 돈을 빌리려는 사람은 혼자이면 안 되고, 자기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그룹을 지어야 하며 그룹 내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유사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갖은 종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5명이 그룹을 지어 뭉치면 보다 안정된 느낌을 갖는다. 가난한 사람은 혼자서는 계획도 잘 세우질 못하고, 실천력이 부족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룹을 지어 행동할 때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받고 경쟁심도 생기게 때문에, 융자를 받게 되면 계획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력도 강해진다. ‘신나는 조합’의 강명순 대표는 ‘1명은 외롭고, 둘이면 마음모아 도망가기 쉽고, 3명이면 한 사람이 소외되고, 4명이면 편이 갈려서 5명이 가장 알맞다’고 말한다. 그라민 은행은 융자를 원하는 사람들끼리 알아서 그룹을 만들 것을 적극 권한다. 왜냐면 적극적인 참여로 만들어진 그룹일수록 결속력과 책임감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룹 짓기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실제로 그룹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융자를 원하는 사람은 여러 사람을 직접 찾아가야 하고, 그 사람들에게 그라민 은행이 어떻게 운영되며 함께 융자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가난한 여성 5명으로 그룹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융자를 받기 위한 자격 조건이 모두 갖춰진 것은 아니다. 다섯 명의 그룹 구성원들은 예외 없이 그라민 은행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한 교육을 받고 시험을 봐야 한다. 반드시 시험을 통과해야 융자를 받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시험은 구두로 진행된다. 은행 직원들은 그룹 구성원들은 각각 따로 불러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한 명이라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재시험을 봐야 한다. 다섯 명 모두가 시험을 통과해야만 융자를 받을 수 있다. 직원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가난 극복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고 자립 가능성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 그룹을 만들고 함께 공부하고 시험을 보고 떨어져서 다시 시험을 보는,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인내심과 결심이 약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게 된다. 또한 쉽게 절망하는 사람들도 인내심이 강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자극을 받고 높은 책임감과 실행력을 갖게 된다. 이런 점을 보면 그라민 은행의 연대 보증 방식은 일반 은행들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라민 은행은 어떤 그룹에 융자를 제공하기로 확정을 해도,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한다. 우선 그룹의 한 사람에게 먼저 융자를 주고 난 다음에 다른 두 사람에게 융자를 준다. 그런 후 세 사람이 6주 동안 제대로 원금을 갚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나머지 두 사람에게도 융자를 준다.
그라민 은행이 이 처럼 독특하면서도 철저한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굳은 결심을 가진 사람들만이 돈을 빌릴 수 있게 하여, 그들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헤쳐 나가고 투쟁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라민 은행은 ‘담보’ 보다 ‘의지’가 상환 능력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융자를 원하는 사람은 은행에 자신의 의지와 결심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 한 명이 그라민 은행에서 제공하는 소액 융자를 통해 가난을 딛고 일어서는 모범 사례를 보여주면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성공만큼 설득력이 강한 것은 없다.
● 일 년 간 매주 원금을 소액 상환하는 방식과 엄격한 상환원칙
방글라데시의 기존 은행들이나 제 2금융권은 개인에게 융자를 주고 원금을 일시에 돌려받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런 방식에서는 돈을 빌린 사람은 만기가 되면 한 번에 돈을 갚아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융자를 받은 사람은 대개 융자액을 늘려가면서 만기일을 가능한 미루게 되고, 결국에는 돈 갚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 이런 단점을 간파한 그라민 은행은 기존의 은행들과는 반대의 방식을 택했다. 그라민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 사람은 ‘매주 조금씩 원금을 나누어’ 갚는다. 1주일 단위로 소액을 상환함으로써 원금 상황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는 것이다. 1주일 마다 소액 상환하는 방식의 또 다른 장점은 고객 관리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누가 돈을 갚고 누구는 돈을 갚지 않았는지 1주일 마다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에, 돈을 떼먹고 달아날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고 경제적 여건이 나빠져 상환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도 짧다. 이 방식은 융자를 한 번도 받아 본적이 없는 대부분의 가난한 여성들에게 큰 부담 없이 스스로 원금을 갚아나가는 경험과 ‘나도 돈을 갚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장점도 갖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융자의 상환 기간은 1년’이다. 1년으로 못 박은 이유는 회계를 단순화시키고, 다양한 상환 기간에 수반되는 여러 절차와 서류 작업 등을 없애기 위해서다.
‘일 년 간 매주 원금 중 일부를 소액 상환하는 방식’은 융자를 받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라민 은행의 융자가 편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라민 은행은 다른 어떤 은행보다도 엄격한 상환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그라민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린 사람은 자연재해나 개인적인 사고를 당한 경우라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원금을 반드시 상환해야 한다. 그라민 은행은 피치 못할 상황에 빠진 사람에게는 주당 상환금을 아주 낮춰서라도(예를 들면 0.1%) 상환은 반드시 하도록 한다. 이것은 아무도 어길 수 없는 원칙이다. 이런 원칙을 고수하는 이유는 돈을 빌린 사람의 독립심과 책임감을 높이고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어떤 마을에 홍수나 기근이 들어 곡식이나 가축이 피해를 입은 경우, 그라민 은행은 이미 융자를 받았던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다시 융자를 준다. 이 경우에도 예전에 주었던 융자를 일부 탕감해주거나 없던 것으로 하는 경우가 없다. 장기 융자로 전환하여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모두 갚도록 한다.
자연재해나 사고처럼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융자를 받은 사람은 적어도 50주 동안 매주 원금의 2% 이상을 상환해야 한다. 그라민 은행은 소액 상환의 특성상 몇 번 상환을 거르게 되면 서로 간에 신뢰가 깨지게 되고 나아가 습관적으로 상환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경계한다. 이에 대해 유누스는 이렇게 강조한다.
“심리적 관점으로 볼 때, 회원과의 관계에서 신뢰만큼 중요한 요인은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석 달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일주일 단위로 꾸준히 상환을 했다고 한다면, 그는 앞으로도 별 탈 없이 상환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왜냐면 그 사람은 이미 원금의 4분 1을 갚았고, 앞으로 4분의 3만 갚으면 되기 때문이다. 원금의 절반을 갚았을 경우, 이젠 절반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은행에서는) 일 년 동안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도록 되어 있다. 이들은 매번 갚아야 하는 금액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때론 의식도 못하고 돈을 갚는다. 오히려 흔쾌한 마음으로 돈을 갚는 것이다.”
● 고객을 위해 고객에게 다가가기
무하마드 유누스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독창적인 은행 방식을 생각하셨죠? 원래 은행가도 아니잖습니까, 어떻게 하신 거죠?”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고 한다.
“우리는 다른 은행들이 어떻게 하나 보면서, 정반대로 했습니다.”
일반 은행들은 보증과 담보를 요구하고, 돈을 빌리는 사람에게 상환 능력이 있는지를 분석하는데 온 신경을 쏟는다. 행여 돈을 갚지 못하게 되면 채무자는 도망 다니거나 죄인이 되어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된다. 이에 반해 그라민 은행은 원금을 상환 받기 위해 사법체계에 호소하거나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없다. 이 은행은 ‘우리는 모든 일을 우리 스스로 해결 한다’는 원칙을 정했고 이것을 지킨다.
유누스와 직원들은 그라민 은행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회원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법에 기댈 경우,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뢰는 날아간다. 이런 이유로 돈을 빌려주는 사람과 돈을 빌리는 사람 사이에 사법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류도 필요하지 않다. 유누스는 ‘우리는 다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뿐이며, 우리 은행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오로지 사람들과의 관계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은 악화되기 쉽기 때문에 법이나 서류로 묶는다고 상환비율을 높일 수는 없다는 것이 그라민 은행의 생각이다. 그라민 은행은 ‘사람은 정직하다’는 전제조건에서 출발한다. 서로 신뢰함으로써 돕고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게 되면, 원금 상환은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고 믿는다. 기존의 은행 시스템이 불신에 기초한다면 그라민 은행의 원칙은 신뢰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이러한 신념과 원칙은 98%가 넘는 원금 상환율로 보답 받고 있다.
기존의 은행들은 사람들이 자기네 은행으로 오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라민 은행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가난한 여성은 대개 문맹인 경우가 많고, 이들은 은행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담을 느낀다. 가난한 일상과 은행은 거리가 먼 것이다. 그라민 은행은 설립 시부터 은행이 사람들 쪽으로 간다는 원칙에서 출발했다. 조브라 마을의 주민들에게 유누스가 돈을 빌려준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라민 은행의 어떤 지점을 방문해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 광경은 볼 수가 없다. 또한 은행의 직원들도 몇 명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직원들이 사람들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은행 초창기에는 ‘직원이 사무실에 있는 것은 그라민 은행의 내규에 어긋나는 일이다’라는 문구를 의무적으로 붙여 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유누스는 직원들에게 ‘여러분은 사무실에 앉아 있는 시간 때문이 아니라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때문에 봉급을 받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일반 은행들은 융자를 주기 전에는 돈을 빌리는 사람에게 반드시 보증을 요구한다. 하지만 일단 융자를 주고 난 다음에는 융자를 받은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다가 만기가 되고 원금 상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제야 융자를 준 사람에게 다시 관심을 쏟는다. 그라민 은행은 이와는 반대로 한다. 일반 은행은 ‘돈’을 보고 ‘결과’를 관리하는데 집중하지만 그라민 은행은 ‘사람’을 보고 ‘과정’을 관리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라민 은행의 직원들은 융자를 준 사람을 매주와 매월 한 차례씩 방문해서 재정 상태가 어떠한지, 융자한 돈이 본래의 목적대로 쓰여 지고 있는지 확인한다. 이런 식으로 2만 명이 넘는 직원들이 매주 300만 가량의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고 있다.(아래 첨부한 ‘그라민 은행 직원의 하루 일과’ 참조)
그라민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하마드 유누스와 그라민 은행의 사람들은 그라민 은행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에서 언젠가는 ‘예전에 가난했던 사람들의 은행’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있다. ‘가난 없는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 그라민 은행의 꿈이기 때문이다.
<그라민 은행 직원의 하루 일과>
- 6시: 기상하여 세수 및 아침
- 7시: 서류와 가방을 챙겨 자전거를 타고 지점으로 향한다.
- 7시 30분: 융자를 받은 40명의 사람들이 직원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자기네가 직접 만든 대나무 간이 시설에 앉아서 직원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서로 그룹을 지어 여덟 줄로 앉아 있는데, 각 그룹의 대표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룹 구성원들의 통장을 모아서 가지고 있다. 미팅이 있기 전에 간단한 체조 시간을 갖는다. 직원은 각 그룹으로부터 상환금과 통장을 넘겨받는다.
- 9시 30분: 직원은 자전거를 타고 두 번째 미팅을 위해 다른 ‘센터’(그라민 은행에서는 그룹 몇 개를 묶어 센터라고 부른다)로 향한다. 주중에 그 직원은 열 개의 센터를 관리해야 한다. 그는 자기 책임 하에 있는 400명의 회원을 만나야 하며, 여러 명목으로 제공된 융자(일반 융자, 계절 융자, 주택 융자)에 대한 상황금과 회원들이 맡기는 예금을 받아야 한다. 직원은 두 번째로 들른 센터를 떠나기 전에 장부를 대조하다가 몇 타가가 남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세히 검토해 본 결과, 한 회원이 다음 주에 상환해야 할 금액을 미리 상환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 11시: 직원은 회원들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한다. 이 방문을 통해 회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인데, 직원이 교육자로서의 재능을 구체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기획이기도 하다.
- 12시: 지점으로 돌아온 직원은 여러 서류들을 정리하고 회계 장부에 기록을 한다. 지점장이 일단 일을 마치면 이 직원도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회계 검토를 철저하게 해서 단 1타카의 오차도 없도록 해야 한다.
- 13시 30분 ~ 14시: 점심 및 동료들과의 티타임
- 14시: 오전에 수금된 돈은 오후에 새로운 융자금으로 지급된다. 융자를 줄 때 직원들은 지점장을 보좌한다.
- 15시: 이 직원과 다른 동료들은 새로 지급된 융자에 관한 내용을 장부에 기록한다.
- 16시 30분: 차를 마시면서 동료들과 환담을 나눈다.
- 17시 ~ 18시 30분: 융자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점을 방문하거나, 아동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구상한다.
- 19시: 남아 있는 서류 정리를 마치고 하루 일과를 마감한다.
● 참고 자료: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Vers un monde sans pauvrete, 1997),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세상사람들의 책
* 경향신문 : 김윤숙 기자, 2004년 3월 22일자 기사
- 기사 제목: ‘신나는 조합’ 강명순씨 ‘자활대출’
IP *.86.7.198
그라민 은행을 이끄는 원동력은 무하마드 유누스 행장과 그라민 은행의 확고한 경영 철학과 독특한 운영 방식에 있다.
그라민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이다. 이 은행은 겉으로 보기에는 기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영리 단체에 가깝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라민 은행은 남다른 사명감과 책임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은행’이라는 역할로 보면 이 은행은 이윤을 추구하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노력한다. 금융기관으로는 독특하게 그라민 은행은 사회적 책임과 이윤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그라민 은행의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그라민 은행이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고, 직원들의 동기 부여가 약하고 또 헌신적으로 일하지 않는다면, 마침내는 망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라민 은행이 민간 기업을 모델로 삼건 비영리 단체를 모델로 삼건 간에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 그라민 은행의 원동력이 영리 추구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우리 그라민 은행도 수익을 창출하고, 비용을 충당하고 미래를 개척하고, 계속 발전하는 노력을 한시도 늦춘 적이 없다. 하지만 그라민 은행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는 융자를 받는 회원들이 즉각적인 수익을 내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회원 주주들의 장기적인 복지 향상에 있다. (......)
나는 그라민 은행 활동을 통해서 이윤 추구만이 자유주의의 유일한 원동력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거기에는 사회적 목표라는 참 가치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점을 잊지 않고 기업 활동을 통해 사회적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이윤 추구만을 꾀하는 그 어떤 기업과도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다 나은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라민 은행의 업적은 주주들에게 주어지는 배당금이란 잣대만으로 측정되어서는 곤란하며, 배당금의 액수가 어떠하든 간에 우리의 활동이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몫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란 측면에서 볼 때 그라민 은행의 철학은 어디에 위치하는가? 좌파? 우파? 중도파? 그라민 은행은 정부의 개입을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는 입장이다. 또한 그라민 은행은 시장경제를 옹호하고, 창업을 권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그라민 은행은 우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라민 은행은 또한 사회적 목표를 성취하고자 노력한다. 예를 들면 가난을 퇴치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여성들로 하여금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남녀평등을 지향하고, 노년층의 복지를 보장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꿈은 이 세상에서 가난과 사회보조금을 몰아내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기존의 제도권이나 이윤추구에 목표를 두고 있는 일반 기업들과 다르다.
그라민 은행은 경제적 자유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기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기업이나 사회 분야에 개입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는다. 국가의 역할은 기업들로 하여금 사회 분야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장하는 것에 그쳐야 한다. 이런 점들로 볼 때 그라민 은행은 좌파에 속한다.
여러 모로 살펴볼 때, 그라민 은행은 정치적으로나 전통적 관점에서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기가 곤란하다.”
● 그라민 은행의 가치와 규율: ‘우리들의 결심 16가지’
그라민 은행은 1978년부터 은행이 믿고 지향하는 가치와 직원들이 지켜야할 규율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당시는 그라민 은행의 실험기로, 정식으로 은행이 설립되기도 전이었다. 초창기에는 지역 책임자들이 매년 회합 갖고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시간을 가졌다. 두 번째 해부터 회합의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각 센터를 맡고 있는 책임자들도 참여했다. 198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전국 규모의 회합을 개최하였고 회합 중에 결정된 사항들을 문서화했다. 1982년 두 번째로 전국 규모로 열린 회합에서 참석자들은 ‘우리들의 결심 10가지’를 정리하여 공표하였다. ‘우리들의 결심 10가지’는 1984년 조이데브푸르에서 갖은 회합에서 ‘우리들의 결심 16가지’로 수정되었다. 오늘날 그라민 은행의 모든 지점에서는 직원들이 ‘우리들의 결심 16가지’를 소리 높여 외치고, 찾아오는 사람마다 직원 스스로가 이 문안에 적힌 대로 임하고 있는지 일일이 확인을 한다. 1984년 이후 이 문안은 더 이상 수정되지 않았다. 수정하지 않는 대신에 그라민 은행의 사람들은 16가지 조항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들의 16가지 결심’에 대해 유누스는 ‘이 문안에 포함된 조항들은 그라민 은행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존재이유와 삶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들의 결심 16가지>
1. 우리는 그라민 은행이 정한 네 가지 원칙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준수하고 실천한다. 이는 규율, 단합, 용기, 성실이다.
2. 우리는 우리의 가족에게 번영을 가져다준다.
3. 우리는 허름한 집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집을 수리하고,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새 집을 짓는다.
4. 우리는 야채를 재배해서 먹고, 남는 것은 판매한다.
5. 파종기에는 가능한 한 많은 씨앗을 뿌린다.
6. 우리는 가능한 한 아이들을 적게 갖는다. 우리는 이 지출을 줄인다. 우리는 건강을 돌본다.
7. 우리는 자녀를 교육시키고, 교육비용을 충당한다.
8. 우리는 자녀들의 위생과 환경을 생각한다.
9. 우리는 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한다.
10. 우리는 깨끗한 우물에서 길은 물을 마신다. 만일 물이 깨끗하지 않으면 끓여 마시거나 명반으로 소독한 후 마신다.
11. 우리는 아들을 결혼시키며 지참금을 받지도 않으며, 딸을 결혼시키며 지참금을 주지도 않는다.
12.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할 때는 저항한다.
13. 우리는 더욱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 집단 투자 비율을 늘려 나간다.
14.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돕는다. 우리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돕는다.
15. 우리는 센터에서 규율이 깨진 것을 보면 이를 바로잡는다.
16. 우리는 센터에서 신체를 단련한다. 우리는 모든 모임에 단체로 참가한다.
‘우리들의 결심 16가지’는 몇 개의 조항을 제외하고는 가난을 벗어나고 생활의 질을 높이는 것과 관련이 깊다. 겉만 보면 선진기업의 비전 선언서나 기업이념에 비하면 매우 기본적이고 소박해 보인다. 하지만 방글라데시의 상황과 문화를 고려하면 그라민 은행이 선택한 16가지 결심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한 실용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방글라데시에 대해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노동인구의 3분의 2가 농민이고 국내총생산(GDP)의 약 30%를 농업이 차지하고 있지만, 높은 인구 증가율과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매년 식량 부족 현상을 겪는다. 국토의 대부분이 낮은 평지이기 때문에 우기에는 하천의 자연범람으로 국토의 5분의 2가 물에 잠긴다. 출생률은 1000명당 30명인데 비해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66명에 달한다. 1억 명이 넘는 인구 중 75%가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고, 시골 여성의 문맹율은 85%에 달한다. 여성 차별이 심하여 교육을 받는 여성은 극히 소수이다. 또한 부녀자를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관습인 ‘푸르다’(Purdah: 여성의 격리, 은닉, 또는 사교적 관계를 갖지 않음)의 영향으로 여성들에게는 여러 종류의 제약이 따른다. 전통적으로 여성이 시집을 갈 경우 남자에게 지참금을 받쳐야 한다. 종교는 이슬람교가 80%를 넘게 차지하고 있으며, 다른 종교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다. 역사적으로 독재와 내란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정치 상황이 불안정하고 정당 간 대립이 극심하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만 실업률은 40%에 달한다.
‘우리들의 16가지 결심’은 그라민 은행의 직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라민 은행의 주주와 회원(고객) 모두에게 적용된다. 그라민 은행의 지배구조를 보면, 정부가 약 8%의 주식을 갖고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은행의 회원들이 갖고 있다. 회원이 주주인 셈이다. 대부분의 주식을 회원들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라민 은행의 가치와 규율은 직원을 넘어 주주와 회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 소액 융자(microcredit) 방식과 까다로운 자격 조건
그라민 은행은 ‘담보 없는 소액 융자’를 제공하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설립 초창기에 많은 금융 전문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담보 없이 대출을 해주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라민 은행이 행하는 소액 융자가 한 가정의 경제적 여건을 호전시키기에는 너무 적은 액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담보 없이 이루어지는 소액 융자 시스템이 담보를 안고 하는 융자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한 소액 융자의 원금 상환율은 98%를 넘었고 소액 융자를 받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났다.
그라민 은행의 목표는 ‘부자 만들기’가 아니라 ‘가난 극복’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라민 은행과 유누스는 자활 능력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에게 한 번에 많은 돈을 빌려주면 오히려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 했고,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열심히 하면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소액 융자는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미 1970년 대 후반 진행된 실험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소액 융자의 효과는 확인됐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조 공장이나 큰 음식점을 운영하는데 드는 돈이 아니라, 대나무 의자나 빵, 혹은 옷 등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값이었다. 일반 은행의 경우를 보면 거액의 융자가 여러 문제점들을 동반하는데 반해, 소액 융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창의성과 활력을 준다. 방글라데시의 기업가나 부자들은 정치인들과 검은손을 잡거나 법을 교묘히 빠져나감으로써 빌린 돈을 갚지 않는다.( 그래서 산업개발은행의 원금 회수율이 10%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반해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에게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라민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박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담보가 필요 없다는 점만 보면 그라민 은행에서 돈 빌리는 것이 쉬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은행의 융자 조건은 다른 어떤 은행보다 독특하고 까다롭다. 독특한 까닭은 이 은행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고, 까다로운 이유는 그라민 은행이 하는 일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활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라민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면 융자를 해주지 않는다. 경제적 수입 기준으로 하위 25%는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가난할수록 돈 빌리기가 쉬운 곳이 그라민 은행이다. 이 원칙은 방글라데시뿐만 아니라 그라민 융자 프로그램이 적용되는 모든 국가와 지역에 적용된다. 그라민 은행 한국지부인 ‘신나는 조합’도 마찬가지이다. ‘신나는 조합’의 융자를 받으려면, 도시에 사는 사람은 재산이 3천 만 원을 넘으면 안 되고, 한 달 수입이 1백 만 원을 넘어도 신나는 조합에 참여할 수 없다. 농사짓는 사람은 가진 땅이 농부 1인당 평균 경작 면적인 3,000평보다 적어야 한다. ‘신나는 조합’의 강명순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은행들은 대기업에는 수천 억 원씩 떼이면서도 서민들에게는 좀처럼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하지요. 하지만 신나는 조합에서는 돈 없고 배경 없는 빈털터리라는 사실을 잘 증명할수록 더 기쁘게 돈을 빌려주는 곳입니다.”
그라민 은행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방글라데시의 일반 은행들은 가난한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차별해왔다. 당시 융자를 받은 여성의 비율은 1%도 안 됐다. 그라민 은행은 일반 은행들과는 반대로 융자 대상을 여성으로 제한하고 있다. ‘가난한 여성에게 융자를 주는 것’이 원칙이다. 현재 300백만 명이 넘는 그라민 은행의 회원 중 95%는 여성이다. 방글라데시의 문화와 종교적 특성을 감안할 때 여성에게 융자를 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민 은행이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 융자를 주는 이유는 가난의 문제가 남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여성의 문제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가정의 일상을 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기근이나 가난에 더욱 직접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한 가정에서 식구들이 배를 곯아야 한다면, 대개는 그 가정의 주부인 여성이 먼저 밥을 굶는다. 대체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기근이나 양식이 부족할 때 자식들을 굶기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가 강한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자식을 돌보는 여성의 경우 그 고통은 더욱 심하다. 그래서 만일 여성에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조금이라도 주어진다면, 여성은 남성보다도 더욱 투쟁적이 된다는 사실을 그라민 은행은 잘 알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직원들은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가난한 여성들이 실제로 남성들보다도 가족의 기반을 닦는 데 훨씬 더 빠르게 적응하고 악착스럽다는 것을 체험했다. 또한 여성들은 자녀의 미래에 관심이 많으며, 일에서도 더 강한 인내심을 발휘한다. 융자 대상을 여성으로 제한하는 것에 대해 유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난한 여성에게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그 돈은 가장 먼저 자녀들을 위해서 쓰인다. 그 다음으론, 집안 살림에 쓰이는데, 이를테면 부엌용품을 산다거나, 지붕을 새로 얹는다거나, 가족의 편의를 위해 쓰는 식이다. (......) 경제발전의 궁극적인 목표가 삶의 질을 높이고, 가난을 줄이고, 안정된 일자리를 확보하고, 불평등을 줄이는 데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여성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성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고 고용 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상당 비율을 차지한다. 게다가 여성은 자녀들과 보다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여성이 우리 방글라데시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라민 은행은 ‘연대 보증 융자’ 방식을 취하고 있다. 혼자 오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대출해주지 않는다. 다섯 사람이 하나의 그룹을 만들어 와야 한다. 융자는 개인 명의로 주되, 책임은 그룹 공동으로 지는 방식이다. 돈을 빌리려는 사람은 혼자이면 안 되고, 자기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그룹을 지어야 하며 그룹 내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유사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갖은 종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5명이 그룹을 지어 뭉치면 보다 안정된 느낌을 갖는다. 가난한 사람은 혼자서는 계획도 잘 세우질 못하고, 실천력이 부족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룹을 지어 행동할 때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받고 경쟁심도 생기게 때문에, 융자를 받게 되면 계획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력도 강해진다. ‘신나는 조합’의 강명순 대표는 ‘1명은 외롭고, 둘이면 마음모아 도망가기 쉽고, 3명이면 한 사람이 소외되고, 4명이면 편이 갈려서 5명이 가장 알맞다’고 말한다. 그라민 은행은 융자를 원하는 사람들끼리 알아서 그룹을 만들 것을 적극 권한다. 왜냐면 적극적인 참여로 만들어진 그룹일수록 결속력과 책임감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룹 짓기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실제로 그룹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융자를 원하는 사람은 여러 사람을 직접 찾아가야 하고, 그 사람들에게 그라민 은행이 어떻게 운영되며 함께 융자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일이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가난한 여성 5명으로 그룹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융자를 받기 위한 자격 조건이 모두 갖춰진 것은 아니다. 다섯 명의 그룹 구성원들은 예외 없이 그라민 은행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한 교육을 받고 시험을 봐야 한다. 반드시 시험을 통과해야 융자를 받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시험은 구두로 진행된다. 은행 직원들은 그룹 구성원들은 각각 따로 불러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한 명이라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재시험을 봐야 한다. 다섯 명 모두가 시험을 통과해야만 융자를 받을 수 있다. 직원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가난 극복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고 자립 가능성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 그룹을 만들고 함께 공부하고 시험을 보고 떨어져서 다시 시험을 보는,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인내심과 결심이 약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게 된다. 또한 쉽게 절망하는 사람들도 인내심이 강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자극을 받고 높은 책임감과 실행력을 갖게 된다. 이런 점을 보면 그라민 은행의 연대 보증 방식은 일반 은행들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라민 은행은 어떤 그룹에 융자를 제공하기로 확정을 해도,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한다. 우선 그룹의 한 사람에게 먼저 융자를 주고 난 다음에 다른 두 사람에게 융자를 준다. 그런 후 세 사람이 6주 동안 제대로 원금을 갚는지를 확인하고 나서 나머지 두 사람에게도 융자를 준다.
그라민 은행이 이 처럼 독특하면서도 철저한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굳은 결심을 가진 사람들만이 돈을 빌릴 수 있게 하여, 그들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헤쳐 나가고 투쟁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라민 은행은 ‘담보’ 보다 ‘의지’가 상환 능력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융자를 원하는 사람은 은행에 자신의 의지와 결심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 한 명이 그라민 은행에서 제공하는 소액 융자를 통해 가난을 딛고 일어서는 모범 사례를 보여주면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성공만큼 설득력이 강한 것은 없다.
● 일 년 간 매주 원금을 소액 상환하는 방식과 엄격한 상환원칙
방글라데시의 기존 은행들이나 제 2금융권은 개인에게 융자를 주고 원금을 일시에 돌려받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런 방식에서는 돈을 빌린 사람은 만기가 되면 한 번에 돈을 갚아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융자를 받은 사람은 대개 융자액을 늘려가면서 만기일을 가능한 미루게 되고, 결국에는 돈 갚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 이런 단점을 간파한 그라민 은행은 기존의 은행들과는 반대의 방식을 택했다. 그라민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 사람은 ‘매주 조금씩 원금을 나누어’ 갚는다. 1주일 단위로 소액을 상환함으로써 원금 상황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는 것이다. 1주일 마다 소액 상환하는 방식의 또 다른 장점은 고객 관리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누가 돈을 갚고 누구는 돈을 갚지 않았는지 1주일 마다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에, 돈을 떼먹고 달아날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고 경제적 여건이 나빠져 상환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도 짧다. 이 방식은 융자를 한 번도 받아 본적이 없는 대부분의 가난한 여성들에게 큰 부담 없이 스스로 원금을 갚아나가는 경험과 ‘나도 돈을 갚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장점도 갖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융자의 상환 기간은 1년’이다. 1년으로 못 박은 이유는 회계를 단순화시키고, 다양한 상환 기간에 수반되는 여러 절차와 서류 작업 등을 없애기 위해서다.
‘일 년 간 매주 원금 중 일부를 소액 상환하는 방식’은 융자를 받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라민 은행의 융자가 편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라민 은행은 다른 어떤 은행보다도 엄격한 상환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그라민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린 사람은 자연재해나 개인적인 사고를 당한 경우라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원금을 반드시 상환해야 한다. 그라민 은행은 피치 못할 상황에 빠진 사람에게는 주당 상환금을 아주 낮춰서라도(예를 들면 0.1%) 상환은 반드시 하도록 한다. 이것은 아무도 어길 수 없는 원칙이다. 이런 원칙을 고수하는 이유는 돈을 빌린 사람의 독립심과 책임감을 높이고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어떤 마을에 홍수나 기근이 들어 곡식이나 가축이 피해를 입은 경우, 그라민 은행은 이미 융자를 받았던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다시 융자를 준다. 이 경우에도 예전에 주었던 융자를 일부 탕감해주거나 없던 것으로 하는 경우가 없다. 장기 융자로 전환하여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모두 갚도록 한다.
자연재해나 사고처럼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융자를 받은 사람은 적어도 50주 동안 매주 원금의 2% 이상을 상환해야 한다. 그라민 은행은 소액 상환의 특성상 몇 번 상환을 거르게 되면 서로 간에 신뢰가 깨지게 되고 나아가 습관적으로 상환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경계한다. 이에 대해 유누스는 이렇게 강조한다.
“심리적 관점으로 볼 때, 회원과의 관계에서 신뢰만큼 중요한 요인은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석 달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일주일 단위로 꾸준히 상환을 했다고 한다면, 그는 앞으로도 별 탈 없이 상환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왜냐면 그 사람은 이미 원금의 4분 1을 갚았고, 앞으로 4분의 3만 갚으면 되기 때문이다. 원금의 절반을 갚았을 경우, 이젠 절반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은행에서는) 일 년 동안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도록 되어 있다. 이들은 매번 갚아야 하는 금액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때론 의식도 못하고 돈을 갚는다. 오히려 흔쾌한 마음으로 돈을 갚는 것이다.”
● 고객을 위해 고객에게 다가가기
무하마드 유누스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독창적인 은행 방식을 생각하셨죠? 원래 은행가도 아니잖습니까, 어떻게 하신 거죠?”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고 한다.
“우리는 다른 은행들이 어떻게 하나 보면서, 정반대로 했습니다.”
일반 은행들은 보증과 담보를 요구하고, 돈을 빌리는 사람에게 상환 능력이 있는지를 분석하는데 온 신경을 쏟는다. 행여 돈을 갚지 못하게 되면 채무자는 도망 다니거나 죄인이 되어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된다. 이에 반해 그라민 은행은 원금을 상환 받기 위해 사법체계에 호소하거나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없다. 이 은행은 ‘우리는 모든 일을 우리 스스로 해결 한다’는 원칙을 정했고 이것을 지킨다.
유누스와 직원들은 그라민 은행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회원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법에 기댈 경우,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뢰는 날아간다. 이런 이유로 돈을 빌려주는 사람과 돈을 빌리는 사람 사이에 사법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류도 필요하지 않다. 유누스는 ‘우리는 다만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뿐이며, 우리 은행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오로지 사람들과의 관계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은 악화되기 쉽기 때문에 법이나 서류로 묶는다고 상환비율을 높일 수는 없다는 것이 그라민 은행의 생각이다. 그라민 은행은 ‘사람은 정직하다’는 전제조건에서 출발한다. 서로 신뢰함으로써 돕고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게 되면, 원금 상환은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고 믿는다. 기존의 은행 시스템이 불신에 기초한다면 그라민 은행의 원칙은 신뢰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라민 은행의 이러한 신념과 원칙은 98%가 넘는 원금 상환율로 보답 받고 있다.
기존의 은행들은 사람들이 자기네 은행으로 오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라민 은행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가난한 여성은 대개 문맹인 경우가 많고, 이들은 은행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담을 느낀다. 가난한 일상과 은행은 거리가 먼 것이다. 그라민 은행은 설립 시부터 은행이 사람들 쪽으로 간다는 원칙에서 출발했다. 조브라 마을의 주민들에게 유누스가 돈을 빌려준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라민 은행의 어떤 지점을 방문해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 광경은 볼 수가 없다. 또한 은행의 직원들도 몇 명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직원들이 사람들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은행 초창기에는 ‘직원이 사무실에 있는 것은 그라민 은행의 내규에 어긋나는 일이다’라는 문구를 의무적으로 붙여 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유누스는 직원들에게 ‘여러분은 사무실에 앉아 있는 시간 때문이 아니라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때문에 봉급을 받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일반 은행들은 융자를 주기 전에는 돈을 빌리는 사람에게 반드시 보증을 요구한다. 하지만 일단 융자를 주고 난 다음에는 융자를 받은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다가 만기가 되고 원금 상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제야 융자를 준 사람에게 다시 관심을 쏟는다. 그라민 은행은 이와는 반대로 한다. 일반 은행은 ‘돈’을 보고 ‘결과’를 관리하는데 집중하지만 그라민 은행은 ‘사람’을 보고 ‘과정’을 관리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라민 은행의 직원들은 융자를 준 사람을 매주와 매월 한 차례씩 방문해서 재정 상태가 어떠한지, 융자한 돈이 본래의 목적대로 쓰여 지고 있는지 확인한다. 이런 식으로 2만 명이 넘는 직원들이 매주 300만 가량의 사람들의 집을 방문하고 있다.(아래 첨부한 ‘그라민 은행 직원의 하루 일과’ 참조)
그라민 은행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하마드 유누스와 그라민 은행의 사람들은 그라민 은행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에서 언젠가는 ‘예전에 가난했던 사람들의 은행’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있다. ‘가난 없는 세상을 이룩하는 것’이 그라민 은행의 꿈이기 때문이다.
<그라민 은행 직원의 하루 일과>
- 6시: 기상하여 세수 및 아침
- 7시: 서류와 가방을 챙겨 자전거를 타고 지점으로 향한다.
- 7시 30분: 융자를 받은 40명의 사람들이 직원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자기네가 직접 만든 대나무 간이 시설에 앉아서 직원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서로 그룹을 지어 여덟 줄로 앉아 있는데, 각 그룹의 대표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룹 구성원들의 통장을 모아서 가지고 있다. 미팅이 있기 전에 간단한 체조 시간을 갖는다. 직원은 각 그룹으로부터 상환금과 통장을 넘겨받는다.
- 9시 30분: 직원은 자전거를 타고 두 번째 미팅을 위해 다른 ‘센터’(그라민 은행에서는 그룹 몇 개를 묶어 센터라고 부른다)로 향한다. 주중에 그 직원은 열 개의 센터를 관리해야 한다. 그는 자기 책임 하에 있는 400명의 회원을 만나야 하며, 여러 명목으로 제공된 융자(일반 융자, 계절 융자, 주택 융자)에 대한 상황금과 회원들이 맡기는 예금을 받아야 한다. 직원은 두 번째로 들른 센터를 떠나기 전에 장부를 대조하다가 몇 타가가 남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세히 검토해 본 결과, 한 회원이 다음 주에 상환해야 할 금액을 미리 상환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 11시: 직원은 회원들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한다. 이 방문을 통해 회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파악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인데, 직원이 교육자로서의 재능을 구체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기획이기도 하다.
- 12시: 지점으로 돌아온 직원은 여러 서류들을 정리하고 회계 장부에 기록을 한다. 지점장이 일단 일을 마치면 이 직원도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회계 검토를 철저하게 해서 단 1타카의 오차도 없도록 해야 한다.
- 13시 30분 ~ 14시: 점심 및 동료들과의 티타임
- 14시: 오전에 수금된 돈은 오후에 새로운 융자금으로 지급된다. 융자를 줄 때 직원들은 지점장을 보좌한다.
- 15시: 이 직원과 다른 동료들은 새로 지급된 융자에 관한 내용을 장부에 기록한다.
- 16시 30분: 차를 마시면서 동료들과 환담을 나눈다.
- 17시 ~ 18시 30분: 융자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점을 방문하거나, 아동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구상한다.
- 19시: 남아 있는 서류 정리를 마치고 하루 일과를 마감한다.
● 참고 자료: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Vers un monde sans pauvrete, 1997),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세상사람들의 책
* 경향신문 : 김윤숙 기자, 2004년 3월 22일자 기사
- 기사 제목: ‘신나는 조합’ 강명순씨 ‘자활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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