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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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막 10장 ② - ‘최초’라는 브랜드(장산곶 급식센타)
나는 천안·아산권에서 ‘최초’라고 부를만한 사업 두 가지를 하였다. 그 하나는 학교급식을 지역 내에서 처음 시작했었고, 지역 업체 중에서 단체급식을 최초로 시작했다. 처음 시작하는 비즈니스는 시장을 개척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일단 형성된 시장에서는 웬만해서는 리더의 자리를 내놓지 않게 된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간다(요즘은 조금 틀리겠지만)는 말처럼 시장의 리더 역할을 하게 되면 결정적인 패착을 두지 않는 한 일정한 시장 점유율을 확보한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급식 비즈니스에서 손을 뗐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나의 이미지를 ‘급식기업 CEO’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초 형성된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서일까? 아니면 회사 이름이 ‘장산곶’인데 언발란스한 조화가 주는 하드한 이미지 탓인지 ‘박노진 = 장산곶 = 단체급식’ 이미지는 일종의 브랜드화 된 느낌을 주었다.
96년 가을을 지나 겨울로 들어설 무렵 난(蘭) 비즈니스를 위해 이유식 가게를 접고 선배(당시 난 농원 대표)와 함께 하려고 대규모 난 농원 설립 계획이 여러 가지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다. 한순간에 벌판에 뚝 떨어져 버린 허수아비가 되 버렸다. 생계에 쏠쏠한 도움이 되던 이유식 가게는 친구에게 넘겨서 수입이 하나도 없었고, 야심차게 준비했던 새 비즈니스는 공중에 떠 버렸으니 오갈 데 하나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때 배운 경험 하나,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는 별도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하나야 뭘 해서 살더라도 가족들 먹고 살 것은 나와 별도로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하나 믿고 사는 가족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난 농원에 있던 후배가 퇴직하고 합류하는 시점에 새로운 비즈니스를 하기로 하였다. 나는 먹는장사를 하자고 하였고, 후배는 화훼유통을 하자고 하였다. 한 동안을 고민하다가 지난 번 난 비즈니스는 네가 원하는 대로 했으니 이번에는 내 생각을 따라달라고 하였다. 결국 먹는 비즈니스를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앞으로 10년을 관통하는 먹는 비즈니스가 나의 30대를 좌우하게 되었다. 한 번의 결정이 10년을 간다는 옛말도 허툰 말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먹는장사 아이템 또한 지금 생각하면 아주 웃기는 것이었다. 96년 봄, 고향 친구가 찾아와서는 자기 형이 주먹밥 성형기계를 개발해서 납품했다가 거래처가 부도나는 바람에 그 기계가 놀고 있으니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아달라며 나에게 주먹밥 성형기계를 한 대 가져다 주었다. 조금씩 연습해 보다가 먹는장사로 마음을 굳히고는 ‘주먹밥 비즈니스’를 하기로 하고 시장조사를 하다 보니 고속도로 휴게소에 납품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싶었다. 문제는 생산 공장을 만드는 일인데 식품위생법상 가장 쉽게 제조허가(요즘은 신고제로 바뀌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다 허가제였음)를 낼 수 있는 것이 도시락 제조업이어서 일단 그것으로 제조허가를 내기로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제조업 허가를 내고 그 안에 살림집까지 만들어 시작하였다. 그 때가 1997년 1월 11일이었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주먹밥 아이템은 영업력과 자금력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두 가지가 다 없었다. 애초부터 시작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몰랐던 나는 금방 한계에 부딪쳤고 사업아이템을 바꿔야만 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학교급식’이었다. 당시 천안에는 학교급식이란 사업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우유나 빵을 주문해서 나눠주는 정도였다. 이일을 담당하는 부서가 체육부서임을 알아낸 나는 담당 선생님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처음 시작한 학교의 담당자가 대학 선배여서 조심스럽게 시작하였다. 그해인가, 아니면 언제인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학교급식법’이 국회를 통과해 합법적으로 학교급식이 가능해졌다. 내가 시작한 다음 해부터는 학교급식만을 겨냥한 전문 급식업체들이 대규모 시설로 무장하고 시장에 뛰어들었으니 한 해만 늦었어도 시장진입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한 번 물꼬를 턴 학교급식은 대단한 봇물을 이루었다. 그 이듬해까지 천안·아산 지역 총 9개 중·고등학교의 급식을 수주했을 정도니 타 업체들은 날아간 닭 쳐다보는 강아지 꼴이었다. 선점의 효과, 최초라는 브랜드의 파워는 이렇게 대단했다.
나는 영업에 강했다. 이런 말을 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 경쟁 입찰에서 져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나 학교급식은 겉으로 남고 속으로 밑지는 장사였다. 연간 급식일수가 18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행사 때마다 손을 벌리는 곳이 많아 2년차 이후에는 학교급식 시장에서 철수하였다. 급식사업에서 학교급식을 한다는 이미지가 지역에서는 대단히 신뢰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체 급식시장으로 선회할 수 있는 경력과 능력을 얻을 수 있었으니 학교급식 비즈니스는 지금 생각해봐도 탁월한 결정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철수한 이후 학교급식분야는 위생사고가 잇따라 자칫 업체의 생존문제가 달렸을 정도로 시장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주관적인 시장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곳도 있다면 나에게는 행운이 따라준 셈이다.
장산곶이란 회사명칭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96년 말에서 97년 초에 이르기까지 우리 농산물에 대한 반향이 대단히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게다가 우리는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는 청년들이 아닌가. 장산곶은 황해도 해주지방에 있는 바닷가 명칭으로 그곳에 사는 매는 대륙으로 사냥을 떠나기 전 두 달 동안 부리를 갈고 전투의지를 드높인다고 한다. 먹이를 잡아오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불퇴전의 각오를 내비치는 것이라 한다. 우리 농산물로 먹거리 시장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이 장산곶이라는 급식이미지와는 다소 생뚱맞지만 후배의 제안으로 채택되었고 그 후 한번 들으면 잘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혹자는 나를 ‘장사장’이라고 할 정도로 강렬한 이미지파워를 가지기도 하였다.
초기 3년이 무척 힘들었다. 2년을 학교급식에만 집중하다 보니 자금의 흐름이 가장 큰 문제였다. 방학 때는 돈이 돌지 않아 월급날만 되면 돈 빌리러 다니는 일이 습관처럼 되었다. 학교 급식에서 철수하고 나니 매출이 한달에 3,000만원이 되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1년 동안 소위 뭐빠지게 고생하였고 월 매출이 1억을 넘어서게 되니 조금 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그때를 되돌아 보면 초기 3년에는 밥값이 입금되면 통장에서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지출되어야만 했다. 그 다음에는 한 나절 정도, 그 다음에는 며칠 정도, 그 다음에는 보름 정도 통장에 잔고가 남아 있기까지 다시 3년 정도 고생을 했다.
급식센타에는 많은 이들이 거쳐 갔다. 먼저 고향친구가 자본을 투자했다가 재미를 못보고 3년만에 철수하였다. 그 돈을 3년 동안 갚아주면서 고향 분들에게 싸늘한 눈초리도 받아야 했다. 다 갚았다고 돌아가신 어머님께 말씀드리니 참 잘했다고 하시는 말씀에 나도 큰 짐을 덜었구나 할 정도였었다. 그리고 3년 정도 관리소장을 두고 운영한 적도 있다. 부채를 0수준에서 시작하게 했었지만 3년 후 누적 적자가 꽤 많아져서 다시 직영체제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내가 센타 경리를 보기 시작했는데 정확하게 1년만에 부채를 다 갚을 정도로 돈 관리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살림하랴, 애들 키우랴, 경리역할까지 나 같으면 하나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건만 아내는 1인 3역을 아주 능숙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내가 장가는 잘 간 모양이다.
이동급식이라는 것은 식당이 없는 공장에 밥, 반찬, 국 등을 배달하는 아이템이다. 급식센타는 일종의 밥 공장인 셈이다. 약 30여명의 직원들이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고 있다. 10명인 공장에서부터 200명이 근무하는 공장까지 고객층이 다양하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입맛도 가지각색이다. 대량생산시스템이 기본이라 고객에 따라 맛을 다 다르게 할 수 없는 점이 가장 큰 약점이다. 그래서 우리의 경쟁자는 일반 식당이다. 당연히 그들보다 우리가 경쟁력에서는 떨어진다. 한달을 먹다가 그만 먹는 고객에서부터 오픈당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먹는 고객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하게 일한다. 절대 재료비를 낮추려고 하지 않는다. 1끼에 3,000원짜리여서 장난치다가는 금방 들통 나게 되고 거래는 당장 끊어져 버린다. 박한 마진이지만 박리다매식으로 성실하게 일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업종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초기부터 약 6년을 계속 먹던 거래처 한 곳에서 어느 날 그만 먹겠다고 연락이 왔다. 왜 그런지 알아봤더니 너무 오래 먹어서 다른 곳에서 먹어야겠다는 것이다. 하긴 6년을 먹었으면 할 수 없지 하면서 마지막 날 미니뷔페를 해 주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1주일만에 다시 연락이 와 식사를 공급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찾아가 왜 그런지 물었더니, 실상은 어느 식당에서 영업이 들어와 바꾸게 되었는데 도저히 우리랑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식당은 메뉴가 다양해지지 못하는 단점이 있어서 매일 매끼 바뀌는 메뉴를 따라올 수가 없다. 또 어느 회사(이 회사도 한 7년 계속 거래한 회사다)는 노조협의회에서 지긋지긋하다고 이제 업체 바꾸자고 했을 때 담당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장산곶보다 안정적으로 잘 해주는 곳이 있다면 바꿔주겠다고. 또 어떤 회사는 내일 모레 중단 통보를 해왔다가 아직까지 식사를 공급하고 있는데 그게 벌써 1년이 넘었다. 모두의 입맛을 맞출 수는 없다. 약 70% 이상의 만족도만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만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는 성실하게, 할 수 있는 큼만 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급식시장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센타가 있게 해준 데에는 세 명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한 명은 학교후배이면서 지금까지 내 곁에서 묵묵히 일해 준 친구다. 지금은 전문경영인으로 일하고 있다. 내년에 그에게 센터를 넘겨주려 한다. 또 한 명은 영양사다. 첫 해부터 지금까지 나의 지겨운 잔소리를 이겨낸 급식사업의 산 증인이다. 이제는 미운 정 고운 정 다들어 서로 눈빛만 봐도 알 정도이다. 마지막 이는 나의 아내이다. 초기 학교급식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어려울 때 항상 구원투수 역할을 잘 해주었다. 급식사업에 관한 한 천안, 아산지역에서 아내만한 전문가는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아내는 더 이상 이일을 하기 싫어한다. 지겹다고 한다. 그냥 집에서 애들 키우면서 살림만 하고 싶어 한다. 남편보다 훨씬 많은 능력을 지녔지만 남편 때문에 고생만 실컷 했다.
이동급식사업은 지난 10년 동안 애물단지이기도 하였지만 나의 생존의 밑바탕 역할을 충실히 잘해 주었다. 어려워도 힘들어도 묵묵히 나를 지키고 있다. 이제 내년에는 지난 10년을 내 곁에서 도와준 후배에게 넘기고 역사의 저편으로 보내려 한다. 너무 오래 내가 데리고 있었나 보다. 초기보다 3배 정도 성장한 센타는 올 여름에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봉명동 10년 역사를 마무리하게 된다.
IP *.145.231.47
나는 천안·아산권에서 ‘최초’라고 부를만한 사업 두 가지를 하였다. 그 하나는 학교급식을 지역 내에서 처음 시작했었고, 지역 업체 중에서 단체급식을 최초로 시작했다. 처음 시작하는 비즈니스는 시장을 개척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일단 형성된 시장에서는 웬만해서는 리더의 자리를 내놓지 않게 된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간다(요즘은 조금 틀리겠지만)는 말처럼 시장의 리더 역할을 하게 되면 결정적인 패착을 두지 않는 한 일정한 시장 점유율을 확보한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급식 비즈니스에서 손을 뗐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나의 이미지를 ‘급식기업 CEO’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초 형성된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서일까? 아니면 회사 이름이 ‘장산곶’인데 언발란스한 조화가 주는 하드한 이미지 탓인지 ‘박노진 = 장산곶 = 단체급식’ 이미지는 일종의 브랜드화 된 느낌을 주었다.
96년 가을을 지나 겨울로 들어설 무렵 난(蘭) 비즈니스를 위해 이유식 가게를 접고 선배(당시 난 농원 대표)와 함께 하려고 대규모 난 농원 설립 계획이 여러 가지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다. 한순간에 벌판에 뚝 떨어져 버린 허수아비가 되 버렸다. 생계에 쏠쏠한 도움이 되던 이유식 가게는 친구에게 넘겨서 수입이 하나도 없었고, 야심차게 준비했던 새 비즈니스는 공중에 떠 버렸으니 오갈 데 하나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때 배운 경험 하나,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가족이 먹고살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는 별도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하나야 뭘 해서 살더라도 가족들 먹고 살 것은 나와 별도로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하나 믿고 사는 가족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난 농원에 있던 후배가 퇴직하고 합류하는 시점에 새로운 비즈니스를 하기로 하였다. 나는 먹는장사를 하자고 하였고, 후배는 화훼유통을 하자고 하였다. 한 동안을 고민하다가 지난 번 난 비즈니스는 네가 원하는 대로 했으니 이번에는 내 생각을 따라달라고 하였다. 결국 먹는 비즈니스를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앞으로 10년을 관통하는 먹는 비즈니스가 나의 30대를 좌우하게 되었다. 한 번의 결정이 10년을 간다는 옛말도 허툰 말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먹는장사 아이템 또한 지금 생각하면 아주 웃기는 것이었다. 96년 봄, 고향 친구가 찾아와서는 자기 형이 주먹밥 성형기계를 개발해서 납품했다가 거래처가 부도나는 바람에 그 기계가 놀고 있으니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아달라며 나에게 주먹밥 성형기계를 한 대 가져다 주었다. 조금씩 연습해 보다가 먹는장사로 마음을 굳히고는 ‘주먹밥 비즈니스’를 하기로 하고 시장조사를 하다 보니 고속도로 휴게소에 납품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싶었다. 문제는 생산 공장을 만드는 일인데 식품위생법상 가장 쉽게 제조허가(요즘은 신고제로 바뀌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다 허가제였음)를 낼 수 있는 것이 도시락 제조업이어서 일단 그것으로 제조허가를 내기로 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제조업 허가를 내고 그 안에 살림집까지 만들어 시작하였다. 그 때가 1997년 1월 11일이었다.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주먹밥 아이템은 영업력과 자금력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두 가지가 다 없었다. 애초부터 시작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몰랐던 나는 금방 한계에 부딪쳤고 사업아이템을 바꿔야만 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학교급식’이었다. 당시 천안에는 학교급식이란 사업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우유나 빵을 주문해서 나눠주는 정도였다. 이일을 담당하는 부서가 체육부서임을 알아낸 나는 담당 선생님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처음 시작한 학교의 담당자가 대학 선배여서 조심스럽게 시작하였다. 그해인가, 아니면 언제인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학교급식법’이 국회를 통과해 합법적으로 학교급식이 가능해졌다. 내가 시작한 다음 해부터는 학교급식만을 겨냥한 전문 급식업체들이 대규모 시설로 무장하고 시장에 뛰어들었으니 한 해만 늦었어도 시장진입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한 번 물꼬를 턴 학교급식은 대단한 봇물을 이루었다. 그 이듬해까지 천안·아산 지역 총 9개 중·고등학교의 급식을 수주했을 정도니 타 업체들은 날아간 닭 쳐다보는 강아지 꼴이었다. 선점의 효과, 최초라는 브랜드의 파워는 이렇게 대단했다.
나는 영업에 강했다. 이런 말을 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지만 적어도 그 당시에 경쟁 입찰에서 져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나 학교급식은 겉으로 남고 속으로 밑지는 장사였다. 연간 급식일수가 18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다가 행사 때마다 손을 벌리는 곳이 많아 2년차 이후에는 학교급식 시장에서 철수하였다. 급식사업에서 학교급식을 한다는 이미지가 지역에서는 대단히 신뢰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체 급식시장으로 선회할 수 있는 경력과 능력을 얻을 수 있었으니 학교급식 비즈니스는 지금 생각해봐도 탁월한 결정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철수한 이후 학교급식분야는 위생사고가 잇따라 자칫 업체의 생존문제가 달렸을 정도로 시장의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주관적인 시장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곳도 있다면 나에게는 행운이 따라준 셈이다.
장산곶이란 회사명칭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96년 말에서 97년 초에 이르기까지 우리 농산물에 대한 반향이 대단히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게다가 우리는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는 청년들이 아닌가. 장산곶은 황해도 해주지방에 있는 바닷가 명칭으로 그곳에 사는 매는 대륙으로 사냥을 떠나기 전 두 달 동안 부리를 갈고 전투의지를 드높인다고 한다. 먹이를 잡아오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불퇴전의 각오를 내비치는 것이라 한다. 우리 농산물로 먹거리 시장에 도전하겠다는 생각이 장산곶이라는 급식이미지와는 다소 생뚱맞지만 후배의 제안으로 채택되었고 그 후 한번 들으면 잘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혹자는 나를 ‘장사장’이라고 할 정도로 강렬한 이미지파워를 가지기도 하였다.
초기 3년이 무척 힘들었다. 2년을 학교급식에만 집중하다 보니 자금의 흐름이 가장 큰 문제였다. 방학 때는 돈이 돌지 않아 월급날만 되면 돈 빌리러 다니는 일이 습관처럼 되었다. 학교 급식에서 철수하고 나니 매출이 한달에 3,000만원이 되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1년 동안 소위 뭐빠지게 고생하였고 월 매출이 1억을 넘어서게 되니 조금 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그때를 되돌아 보면 초기 3년에는 밥값이 입금되면 통장에서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지출되어야만 했다. 그 다음에는 한 나절 정도, 그 다음에는 며칠 정도, 그 다음에는 보름 정도 통장에 잔고가 남아 있기까지 다시 3년 정도 고생을 했다.
급식센타에는 많은 이들이 거쳐 갔다. 먼저 고향친구가 자본을 투자했다가 재미를 못보고 3년만에 철수하였다. 그 돈을 3년 동안 갚아주면서 고향 분들에게 싸늘한 눈초리도 받아야 했다. 다 갚았다고 돌아가신 어머님께 말씀드리니 참 잘했다고 하시는 말씀에 나도 큰 짐을 덜었구나 할 정도였었다. 그리고 3년 정도 관리소장을 두고 운영한 적도 있다. 부채를 0수준에서 시작하게 했었지만 3년 후 누적 적자가 꽤 많아져서 다시 직영체제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내가 센타 경리를 보기 시작했는데 정확하게 1년만에 부채를 다 갚을 정도로 돈 관리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살림하랴, 애들 키우랴, 경리역할까지 나 같으면 하나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건만 아내는 1인 3역을 아주 능숙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내가 장가는 잘 간 모양이다.
이동급식이라는 것은 식당이 없는 공장에 밥, 반찬, 국 등을 배달하는 아이템이다. 급식센타는 일종의 밥 공장인 셈이다. 약 30여명의 직원들이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고 있다. 10명인 공장에서부터 200명이 근무하는 공장까지 고객층이 다양하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입맛도 가지각색이다. 대량생산시스템이 기본이라 고객에 따라 맛을 다 다르게 할 수 없는 점이 가장 큰 약점이다. 그래서 우리의 경쟁자는 일반 식당이다. 당연히 그들보다 우리가 경쟁력에서는 떨어진다. 한달을 먹다가 그만 먹는 고객에서부터 오픈당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먹는 고객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하게 일한다. 절대 재료비를 낮추려고 하지 않는다. 1끼에 3,000원짜리여서 장난치다가는 금방 들통 나게 되고 거래는 당장 끊어져 버린다. 박한 마진이지만 박리다매식으로 성실하게 일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업종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초기부터 약 6년을 계속 먹던 거래처 한 곳에서 어느 날 그만 먹겠다고 연락이 왔다. 왜 그런지 알아봤더니 너무 오래 먹어서 다른 곳에서 먹어야겠다는 것이다. 하긴 6년을 먹었으면 할 수 없지 하면서 마지막 날 미니뷔페를 해 주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1주일만에 다시 연락이 와 식사를 공급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찾아가 왜 그런지 물었더니, 실상은 어느 식당에서 영업이 들어와 바꾸게 되었는데 도저히 우리랑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식당은 메뉴가 다양해지지 못하는 단점이 있어서 매일 매끼 바뀌는 메뉴를 따라올 수가 없다. 또 어느 회사(이 회사도 한 7년 계속 거래한 회사다)는 노조협의회에서 지긋지긋하다고 이제 업체 바꾸자고 했을 때 담당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장산곶보다 안정적으로 잘 해주는 곳이 있다면 바꿔주겠다고. 또 어떤 회사는 내일 모레 중단 통보를 해왔다가 아직까지 식사를 공급하고 있는데 그게 벌써 1년이 넘었다. 모두의 입맛을 맞출 수는 없다. 약 70% 이상의 만족도만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만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는 성실하게, 할 수 있는 큼만 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급식시장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센타가 있게 해준 데에는 세 명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한 명은 학교후배이면서 지금까지 내 곁에서 묵묵히 일해 준 친구다. 지금은 전문경영인으로 일하고 있다. 내년에 그에게 센터를 넘겨주려 한다. 또 한 명은 영양사다. 첫 해부터 지금까지 나의 지겨운 잔소리를 이겨낸 급식사업의 산 증인이다. 이제는 미운 정 고운 정 다들어 서로 눈빛만 봐도 알 정도이다. 마지막 이는 나의 아내이다. 초기 학교급식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어려울 때 항상 구원투수 역할을 잘 해주었다. 급식사업에 관한 한 천안, 아산지역에서 아내만한 전문가는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아내는 더 이상 이일을 하기 싫어한다. 지겹다고 한다. 그냥 집에서 애들 키우면서 살림만 하고 싶어 한다. 남편보다 훨씬 많은 능력을 지녔지만 남편 때문에 고생만 실컷 했다.
이동급식사업은 지난 10년 동안 애물단지이기도 하였지만 나의 생존의 밑바탕 역할을 충실히 잘해 주었다. 어려워도 힘들어도 묵묵히 나를 지키고 있다. 이제 내년에는 지난 10년을 내 곁에서 도와준 후배에게 넘기고 역사의 저편으로 보내려 한다. 너무 오래 내가 데리고 있었나 보다. 초기보다 3배 정도 성장한 센타는 올 여름에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봉명동 10년 역사를 마무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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