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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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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3일 20시 14분 등록

 

열 살 무렵 외가에서 신기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비가 오는데 아무도 없어서 심심해진 저는 마루에 엎드려 비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지요. ‘미음자 집이 감싸고 있는 둥근 안마당에 둥글게 빗자국이 패이는 것을 보고 있는데 돌연 사위가 조용해지더니, 이상한 적막감이 들었습니다. 섬칫 놀랄 정도로 완벽한 고요함은 마치 다른 차원의 시간으로 들어선 듯 괴이한 느낌마저 들었고, 저는 그 순간 절대고독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천지사방에 나 혼자 있는 듯한 기분, 그리고 산다는 것이 이런 고독한 일이라는 예감이 든 거지요.

이승욱은 이처럼 강렬한 감각적 경험을 원체험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충분히 느끼고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감각을 소중히 여겨야 하므로, 자신의 감각의 고향인 원체험이 소중하다고 합니다.

 

원체험이라는 용어에 접하는 순간, 당연히 나의 원체험으로 그 비오던 날의 장면을 꼽았습니다. 평범하지만 다복한 가정에서 성장하던 어린 아이가 느닷없이 맛보았던 절대고독은 이제 와 생각하니 상당히 암시적이네요. 집착이 없어 재물이나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나 언제 어떤 장면에서도 결코 놓지 못하는 관찰자적인 시선...처럼 나의 중요한 기질에 대한 단서가 거기 들어 있었던 거지요.

 

정신분석가인 이승욱은 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성장기 <소년>을 썼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는 잔잔한 시선만으로도 인상적인데, 거기에 자신의 체험을 연결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전문지식을 더하니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책이네요. 누나 따라서 다섯 살에 입학한 어린 나이에 담임에게서 받은 정서적 폭력 때문에 12년이나 공부 못 하는 아이로 살았다는 대목에서는 내 일처럼 분개하게 됩니다.

 

, 내가 학교에 와서 열심히 하면 선생님이 화를 내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요. 이처럼 외부 여건에 따라 철석같은 믿음을 갖게 된 것을 비합리적 신념이라고 하는데, 이런 비합리적 신념이 이후의 삶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게 된다구요. 저자는 나중에 정신분석가가 거쳐야 하는 자기분석을 하면서 이 때의 경험을 떠올리고, 가능하면 그 선생을 만나 똑같이 갚아주고 싶은 분노에 휩싸였다고 하네요. 자기가 형성되지 않고, 자기를 지킬 수 없었던 시기에 일방적으로 당한 경험에 오랫동안 휘둘린 것이 너무 슬프고 원망스러웠을 것이 이해가 갑니다. 나역시 아무 것도 모르고 성격만 급했던 초보엄마, 초보교사 시절에 상대방에게 비합리적 신념을 심어주었을까봐 아찔한 마음이 됩니다.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아이들에게 이 책을 권합니다. 생물학적 부모가 주지 못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사회적 부모에게서 찾아 먹으라고, 미안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저자는 자애로운 아버지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자신은 임종하지 못했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 목소리라도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큰누이가 아버지, 빨리 집에 가요. 빨리 나아서 집에 가요라고 말했을 때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아버지가 우리집은 함경북도 단천군 단천읍 동호리...”라고 웅얼거렸다는 말을 전해 듣습니다. 남한에서 50년을 사셨지만 한 번도 마음에서 지우지 못했던 이북의 가족에게로 마지막 순간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위해 저자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 드리려고 합니다. 아버지의 고향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아버지의 고향 이야기를 담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울면서 읽었습니다. 평생을 그리움과 죄책감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아버지 역할을 다 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한을 대신 풀어주는 아들의 모습에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대답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아서요.

 

저자는 또 내 부모가 아니어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라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부모와의 사이에 거리가 생겨 숨통을 틔울 수 있다구요. 이 질문 앞에서 와락 두려워집니다. 선선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부모의 인성이나 처세를 인정하면서도 요즘 친정엄마에 대해 복잡한 이율배반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동안 책임을 다 하고 선하게 산 엄마마저 그런 대우를 받는데, 나처럼 자기본위인 사람에게 자녀가 어떤 생각을 품을지, 생각만 해도 두렵습니다. 산다는 것이 정말 간단하지가 않구나 싶으면서, 좀 더 조심하고, 좀 더 용서하되 다른 사람 마음에 못 박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저자의 진솔하고 촘촘한 시선에 촉발되어 나도 내 인생의 장면을 좀 더 발굴해 놓고 싶어집니다. 앨범을 훑으며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가 보기도 하고,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든 결정적 장면이 무엇일지 궁금해 기억을 뒤지고 또 뒤져 봅니다. 생각보다 기억이 많지 않아 좌절하기도 합니다. 지난날을 다 잊어버렸듯이 지금 이 순간도 잊혀지고 말 것이 너무 가슴아프네요. 그런 뜻에서 지금 소년기를 지나는 아들을 위해 회고록을 쓸 수 있는 아버지가 대단해 보입니다. 이런 선물을 받은 아들이, 할아버지의 망향가를 대신 불러 줄 아버지만 못하지는 않겠지요?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조용한 자부심이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피어나는 위대한 선물 앞에 나도 모르게 벙긋 미소가 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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