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기_예비독수리_경종
- 조회 수 1971
- 댓글 수 4
- 추천 수 0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12기 예비연구원 이경종
돈오점수(頓悟漸修). 깨달음이 먼저인지 스스로를 닦는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둘의 관계는 함께 가기도 하고, 뒤바뀌기도 하고, 둘 중의 하나가 없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라는 무형적 소산과 점진적인 자기 수행은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박에 만물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범우주적 깨달음과 감사하며 사는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 서로 다른 깨달음일까. 그 둘은 깨달음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과 깨달음의 순간, 그리고 깨닫고 난 후 삶이 그 깨달음에 기반하여 변화했는지 여부라 할 수 있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고 깨달은 바 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아를 깨닫는 것이다. 한 올의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본연의 나를 직시하고 갖은 얼룩과 잡동사니 가운데 빛나고 있는 자신만의 보물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최우선으로 추구해야 하는 소명을 깨닫고 이를 위한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바꾸게 만든다. 본인의 진정한 삶을 찾고자 하는 절실한 동기와 깨달음이라는 기연이 새로운 삶을 탄생시킨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은 중요하다. 조주선사가 아무리 "진리는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고 일갈해도, 범인은 결코 깨닫지 못한다. 무림초고수도 극한의 수련과정과 기연을 얻어야지만 환골탈태의 성취를 얻게 된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깨달음의 기연은 오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사전 수행의 과정과, 깨달음을 얻고 난 후의 사후 수행과정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일견 불연속적으로 보이는 삶의 전환과정은 사실 큰 하나의 흐름이다. 마치 수많은 강들이 만나 끝내 바다를 이루듯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만큼 절실해야만 한다. 간절하지 않으면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 절실함의 크기가 깨달음 그 자체와 정도를 결정한다. 다시 말해, 절실함의 크기가 돈오의 여부와 점수의 꾸준함을 판가름한다. 간디가 마리츠버그 역에서 당한 수모는 일견 단순한 사건에 불과했으나, 그것은 그가 그동안 겪었던 인종차별의 경험과 오랜 세월 목격해온 민족의 아픔이라는 이미 차고 넘치는 절실한 동기가 되어 마리츠버그역의 깨달음을 이끌어냈다. 오스트리아의 전도유망한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의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고, 가족들을 모두 잃는 아픔에도 삶의 물음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용소 생활 이전부터 그의 삶에 골수로 자리잡은 로고테라피와 그에 대한 저서집필의 절실함 때문이었다. 이 절실함은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에게 닥친 현실을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하는 원동력이 된다.
사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본인의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아무리 당시에는 절실하다고 느꼈어도, 그것이 본연적인 자아로부터 우러난 것이 아니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며, 설령 어설픈 깨달음 하나 얻더라도 이를 지속할 수 없다. 아무리 뚱뚱한 몸을 날씬한 몸으로 바꾸고 싶은 다이어트의 절실함이 있어도, 어느 정도 살이 빠지면 동기는 희박해지기 마련이고, 외적 유혹은 더욱 거부하기 어려워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춘추전국시대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을 응징한다는 목표와 죽은 부왕 합려에 대한 복수라는 확실한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 누리는 편한 생활 속에 의지는 점점 약해졌고, 부차는 약해지는 의지를 다시 세우기 위해 매일 아침마다 내관들에게 부왕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본인을 깨우게 했다고 한다. 목표는 때론 삶을 이끌어가지만, 그것은 삶을 재탄생 시키지는 못 한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 깨달음은 목표가 아닌 삶 자체인 것이다. 오왕 부차는 복수에 성공해서 월왕 구천을 노예로 삼는 승리를 맛보지만, 이것이 그 동기와 절실함의 마지막이었다. 오왕 부차는 20년 뒤 와신상담한 월왕 구천에게 대패하여 최후를 맞게 된다.
중용의 첫 구절은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하늘이 만물에게 부여해준 것은 본성이며 성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도이며 도를 닦는 것은 가르침이다'이라고 시작한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자신의 지극한 본성을 찾아내어 이를 위해 사는 것이며, 그 삶은 항상 배우고 가르침으로 채워가야 한다. 새로 태어나는 것은 타자의 삶으로의 전환이 아닌, 순수한 자아의 결정체를 찾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은 어린 아이의 마음이다. 어릴 적 나의 모습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오직 지금 여기 이순간만이 존재한다. 건강에 대한 염려도, 가족에 대한 걱정도, 심각한 업무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바탕 놀이를 마치면, 그들은 탈진한다. 방전된 체력이 다시 충전되면 다시 그들은 놀이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본인의 지극한 본성을 '지금 여기'에 위치시키고 그것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지극한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는 절실함이 다시 태어남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본인의 절실함에 작은 기연만 얻는다면 우리는 모두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다시 태어난다면, 정말 나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