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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9일 08시 15분 등록
“여행을 떠나시려면 한 달 전에 예약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가슴은 한 달 동안 뛸 것입니다.”
저 뚜비를 비롯한 보라돌이와 두 아이의 가슴은 한 달 동안 두근거렸습니다. 눈 앞 에는 지중해 푸른 바다가 출렁거렸고 에머슨은 우리의 새벽을 열어주었습니다. 아침밥을 위한 반찬을 따로 준비할 필요성도 덜하게 되었습니다. 여행 이야기가 맛난 반찬이었고 구수한 숭늉이었지요. 우리 모두는 Siena의 작은 골목길에서 마음껏 웃을 준비도 했고 다뉴브 강물을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볼 여유로움도 여행목록에 적어 넣었습니다.

그럼, 여기 ‘가을의 길목에서’ 라는 부제를 지닌 우리의 여행이야기를 잠깐 적어보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고등학교3학년인 둘째 아이를 위한 특별한 여행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고단한 여정’의 상징으로 되어있는 고3이라는 길목에 서 있지만 항상 웃음과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재롱이’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었지요. ‘재롱이’는 우리 가족이 즐겨 부르는 둘째의 이름입니다. 그 아이 스스로가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한 이름이기에 더욱 정감 있게 불러줍니다.

기획 담당은 뚜비.
고3, 그리고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는 아이를 위해서 과연 어떤 멋진 플랜을 세울까? 낚싯대를 이리저리 던져봅니다. 퍼덕거리는 아이디어를 많이도 잡아 올렸습니다. 그러나 아침 출근길 지하철 속에서 낚아올린 생각은 황홀했습니다. 아니 황홀의 저 건너편에 선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이었지요.

‘지중해와 에머슨, 그리고 Siena의 작은 골목길과 다뉴브 강을 서울에서 만나다. 이 아름다운 가을의 길목에서’

일정은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한 버스에 탄 우리들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운전만 남았습니다. 먼저 서울 한복판에 있는 전 세계적 체인의 호텔에 예약을 했습니다. 넓은 창을 통하여 기차가 떠나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곳, 아름다운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곳, 그리고 가을이 망설임 없이 찾아드는 곳이었습니다. 가까이는 큰 아이의 고등학교 학창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여학교가 있었지요. 교정엔 소나무와 은행나무 숲길도 있습니다. 유관순의 숨결도 만져볼 수 있는 소녀들만의 뜰이 있는 곳이기도 하구요. 아, 또 있었군요. 호텔 옆에는 보라돌이의 젊은 꿈이 춤추었던 그의 옛 직장 건물이 서 있습니다. 우리가 그 부근을 지나칠 때면 층층마다 환한 불을 밝히며 우리를 환대해 주곤 하는 곳입니다.

시월 둘째 날.
저녁 일곱 시를 훌쩍 넘긴 시각에 지하철을 탑니다. 막내와 저, 그리고 첫째아이와 보라돌이가 짝이 됩니다. 토끼 조와 코알라조지요. 토끼 조인 둘째는 내일 하고 모레가 중간고사인지라 ‘ 문학의 이해’라는 여행에 어울리는 교과서를 손에 들고 있습니다. 반면 코알라 조에서는 연신 웃음꽃이 터지네요. 몇 발자국 떨어져서 보니 두 마리 코알라가 많이도 닮았습니다. 웃음소리까지도 말입니다. 지하철 서대문 역에 내려서 나란히 걷습니다. 첫째아이의 목소리가 제일 큽니다. 하기야 3년 동안 꿈을 싣고 걷던 길목인데 그 기분 오죽 하겠습니까? 환하게 불 밝힌 첫째의 교정을 넷이 걷습니다. 저 멀리, 교복을 단정히 입은 소녀 가 걸어 오군요. 첫째의 모습을 그녀 속에서 잠시 찾아봅니다. 교정에는 한강의 노래가 흐르고 세느강의 속삭임이 있습니다. 환하게 피어오른 첫째의 얼굴에는 행복이 흐릅니다.

호텔은 호화스럽지만 아늑합니다. 불빛이 그랬고 창 너머 밤의 풍광이 그랬습니다. 한두 가지를 더한다면 탁주를 비롯한 붉은 빛이 감도는 와인병과 우리들의 재잘거림이겠지요.
창문을 열고 밤이란 밤은 모두 불러들입니다. 평생을 초대 한 번 받아보지 못한 모든 미물초차도 우리는 환대했습니다. 초대된 모든 것들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지요. 보라돌이가 늘어놓는 구수한 농담도 들어주고 둘째아이의 아름다운 꿈 이야기도 열심히 들어줍니다. 나의 침묵도 존중받습니다. 웃음메이커인 첫째아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요? 보라돌이의 전화벨이 울립니다. 큰 아이가 방금 뉴욕에 도착했다는 전화군요. 둘 사이에는 웃음이 끝이질 않습니다. 뉴욕의 화려한 불빛이 어떠하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내일 이루어질 협상에 대한 내용까지 흥미가 진진합니다.
투명 유리잔에 술을 따릅니다. 탁주 두잔, 그리고 연두색 빛이 감도는 달콤한 음료수 두잔,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가 맑고 경쾌합니다. 우리 가족 모두의 얼굴엔 사랑이 강물 되어 흐릅니다. 반짝이는 물결은 첫째와 둘째 그리고 보라돌이의 가슴 깊숙한 곳을 지나 뚜비에게 흘러듭니다. 아늑한 꿈결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발그스름한 뺨으로 우리는 에머슨의 시 한편을 읊고 헨델의 곡조도 흥얼거렸습니다.

보라돌이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걷습니다. 밤공기가 무척 따스하네요. 거리의 불빛 때문인지 마음속에 끝없이 흐르는 그 강물 때문인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프로스트의 시 가 귓전을 스칩니다. 결혼초기, 남편이 나에게 준 생일선물이 프로스트의 시 한 편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나는 웃습니다. 지금, 남편과 저는 피렌체 옆 작은 소도시 Siena의 골목을 걷고 있습니다. 가스등이 있고 르네상스 향기가 흐르는 곳.

호텔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아이스크림을 샀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보라돌이를 미워할 일은 아닙니다. 아이 닮음을 더 사랑할 일이지요. 호텔의 긴 복도를 걸으면서 우리는 내일의 일정을 이야기합니다. 청계천은 다뉴브 강도 되고 세느강도 됩니다.
덕수궁을 거니는 일은 고흐나 뭉크를 만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호텔로 돌아오니 둘째는 중간고사 공부를 하고 있네요. 아름다운 우리의 여행이 그의 공부에 방해가 아님이지요. 우리가 마련한 이 특별한 여행은 그에게 새로운 힘이고 기운입니다. 꿈이고 희망입니다.

셋이 잠깐 호텔 문밖에 모였습니다. 둘째 재롱이를 위한 깜짝 이벤트의 준비모임입니다. 그러나 나도, 보라돌이도 그리고 첫째와 둘째도 우리의 이벤트가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우리 네식구 모두를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위한 축복의 촛불을 켰음을 압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됨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특별한 여행이 일회성이 아님도 물론 알고 있지요. 나아가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언제든지 특별한 축제를 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숫자나 문자로 약속 된 것이 아닌 소통에서 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먼 이국 어느 곳에서 존재의 음을 켜고 있습니다. 그 울림은 바다를 건너 하늘과 땅을 가로질러 끝없이 질주합니다.


- Malcolm Baldrige 모델에 우리 가족이 경영하는 기업을 평가 받으면 몇 점이나 될까요?
평가에 다른 개선 방향은 어떻게 흐를까요?
어제, 야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아파트 긴 의자에 벌렁 누었습니다. 옹박이 대학교 앞까지 가져다준 ‘월드클레스를 향하여’ 책을 들었지요. 하늘엔 별이 흐르고 가슴엔 기쁨이 흘렸습니다. 한 시간 가량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11시를 훌쩍 넘긴 시각에 아파트 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한 기운은 아파트 숲을 지나서 서울의 밤공기를 뚫고 날고 또 날아 흐르고 흐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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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0.06 06:32:57 *.48.38.252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뵈면 행복해집니다. 좋은 밤이 되셨군요. 코알라 조의 기발함이 엄마 유전자을 받았나봅니다. 읽으면서 연신 미소가 번집니다. 저는 간만에 아침 시장을 보러 나갑니다만 환한 햇살 속에서도 계속 웃고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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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2007.10.07 22:37:43 *.72.153.12
정동극장이 있는 그 길 은행나무가 참 아름다운데... 아이스크림 먹으며 걷는 것 좋을 것 같습니다.
가을의 특별한 여행 하나를 보여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잊고사는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살리는 계기를 주심을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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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0.08 13:55:35 *.114.56.245
어제는 큰아이와 함께 영화 '원스'를 보았더랬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풋풋함 삶의 모습속에서 우리 자신의 숨결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서려있는 인간 행위에 대한 분노와 고뇌도 읽었다면 지나친 비약이었을까요? 그들의 삶이 우리와 같음에 함께 감동할 수 있고 그 여운 가슴 한켠에서 긴울림으로 간직됨을 우리는 압니다. 이 가을 함께함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향인씨는 가을시장에서 무엇을 건져왔을까요? 그리고 토요일 정동극장 연극관람 제안이 있었는데 못갔습니다. 서운함 다음기회로 달래야겠지요? 은행나무가 노랗게 변하면 그 길 함께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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