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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6일 23시 44분 등록
본인은 고등학교 때 시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항상 애를 먹었다. 특히 처음 접하는 시들은 여지 없었다. 도대체 이 시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저자가 나타내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시는 그야말로 흰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씨였다. 시가 무슨 논설문이라도 되는 양 분석하고 파헤치려 들었으니 그도 그럴 만하다. 하지만 안 그래도 상징성과 함축성이 높은 시에 그런 칼날을 들이대는 접근은 정말 아니 될 말이었다. 게다가 암기 위주의 학습 방식을 못 벗어나던 나에게 처음 접하는 시는 낯설고 어렵기만 했다.

나는 해결책을 찾고 싶었고 그런 가운데 어떤 제안이 눈에 들어왔다. 시를 보면 뜯어보기 전에, 우선 떠오르는 장면이나 이미지를 눈 감고 머리 속에 그려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러한 계속적인 시도 이후 조금은 시가 더 보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음 시는 이것을 첫 번째로 시도한 것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무슨 그림이 그려지는 각자에게 맡깁니다.)

그 때의 장면을 글로 적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노을이 주황빛으로 물드는 어느 가을 날, 크지 않는 강물은 잔잔히 흐르고, 돌이 아닌 모래 강변은 햇빛을 받아 밝습니다. 그 너머 작은 집 한 채가 있습니다. 초가 지붕에 흙벽입니다. 굴뚝에서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릅니다. 집 앞에는 소년 하나 앉아 있네요. 조용한 가운데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소리가 들립니다.’

여기까지는 묘사이다. 말하자면 장면을 쪼개어 언어로 서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A’라는 글자를 ‘꼭대기 부분은 삐죽하고 검은 색이다.’와 같은 서술을 모아 놓은 것뿐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부분적인 사실의 나열이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감정과 분위기를 살려 좀 더 윤곽을 잡아볼 필요가 있다. 그 장면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자.

‘해 지는 저녁 노을이 곱습니다. 강물에 비치는 해 그림자가 참 예뻐요. 그 햇살을 받아 모래가 은은히 빛이 나고 그 모래에 맑은 강물이 찰랑찰랑 하는 것이 나도 하염없이 저 곳에 앉아 바라보고 싶습니다. 저기 저 쪽에 갈대밭 하늘하늘 움직이는 갈대들 살랑살랑 소리를 냅니다. 주변이 붉어서 그런가요. 갈대의 손짓이 유난히 하얗게 느껴집니다. 그 가운데 초가집이 참 아담합니다. 구수한 향이 피어오르는 걸 보니 저녁을 짓고 있나 봅니다. 저기 아이 하나가 살짝 미소 지은 얼굴로 앉아 있습니다. 엄마나 누나가 보이면 금방이라도 부르며 뛰어나갈 것 같습니다. 여기 있으니 구수한 흙향기가 나는 듯 합니다.’

지금까지는 눈앞의 장면을 확대하여 나타낸 것이고, 이제 여기 없는 뒷이야기나 배경을 떠올릴 수 있다. 좀 다른 길로 빠져들어 본다.

‘저 소년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글퍼 보입니다. 이 고요하고 목가적인 풍경 속에 저런 표정이라니요. 더 슬퍼 보입니다. 왜 그럴까. 아, 그렇군요. 이 아이를 그렇게 아껴주시던 어머니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집에 안 들어오시기 일쑤이고 아이는 누나와 함께 살고 있네요. 아이는 지금 같은 풍경을 좋아했습니다. 밖에서 한참 놀다가 이 때 쯤 집에 들어가면 아이와 누나에게 엄마는 맛나는 저녁을 지어주셨습니다. 아이는 지금 금방이라도 엄마가 부를 것 같습니다. 엄마가 그립습니다. 엄마와 누나와 다시 이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상상을 해 보자. 여태까지 관찰자적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었다면 이제 이런 풍경을 시로 쓴 지은이가 되어 보자.

‘지은이는 지금은 생활이 부자유스럽고 불편하다. 내 것이 내 것이 아닌지라, 이 땅과 이 말이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이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 지은이는 이런 평화롭고 고요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떠올렸다. 소싯적의 순수함과 평화로움이 서려있는 풍경이었다. 갈망이고 위안이었다.‘

아니면 그저 순수한 마음에서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희구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는 사실 여러 언어적 장치에서 감정을 느끼고 이미지를 떠올리는 데 영향을 받고 있다. 이를 테면 ‘엄마야, 누나야’라는 호칭에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고, ‘반짝이는 금모래빛’나 ‘갈잎의 노래’ 등의 시청각 효과를 이용해서 금새 목가적인 분위기를 접할 수 있다. ‘강변에 살자’ 대신 ‘강변 살자’로 장소를 나타내는 조사 ‘에’를 생략함으로써 일체감을 더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 시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모음이나 비음을 많이 넣어 노래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거나, 된소리나 거센 소리가 나오는 빈도를 높게 하여 강한 이미지를 줄 수도 있다. 같은 행을 반복시켜 강조할 수 있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이미지를 병렬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거나 역설의 의미를 강하게 둘 수도 있다.


아까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확대를 시켰다면, 전체적인 이미지나 심상을 잡고 그것에서 구체화 작업을 하는 방향으로 역으로 바꾸어 볼 수도 있다.

강가, 서정적, 목가적, 평화로움. 이런 분위기로 윤곽을 잡고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스토리를 끌어내 보는 것이다.


이상, 시를 보고 떠올린 장면을 시발점으로 여러 각도로 글을 꺼내어 보았었다. 장면의 힌트가 되는 시는 겨우 4행이나 사실 그것에서 나오는 글은 내용으로나 분위기로나 관점으로나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지금 적어 놓은 이야기 말고도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시를 읽고 난 후에 나타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다 적지 못하였다.)



지금은 시로 연상된 장면을 통하여 이야기들을 끌어내었지만, 어떤 장면을 자신이 창작하여 연상하고 그것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다. 등장인물과 잘 어울리는 배경과 분위기를 떠올려 본다. 또 등장인물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그 주변 인물들과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할까. 무슨 풍경 속에 놓이고 싶어할까.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할까. 무엇이 아쉬울까. 무엇을 바랄까. 질문 거리는 많고 끌어낼 것도 다양하다.

그리고 언어적 구조적 장치 등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이 방면은 이 글의 주제와 거리와 멀어 자세히 적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이러한 시도들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간접적으로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풀어 내는 데 쓰일 수 있겠다. 변경연의 꿈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쓰게 되는 미래의 10대 풍광도
이런 맥락으로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장면을 떠올려 본다. 그냥 훑고 지나가는 것도 필요할 수 있겠지만, 그리로 뛰어들고 빠져본다. 때로는 등장인물 자신이 되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는 수호천사도 되어본다.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해본다. 칭찬하고 책망하기도 해본다. ‘반짝이는 금모래’ 도 되어 보고 ‘갈잎의 노래’도 되어 본다. 장면 속으로 흠뻑 젖어 들어가 보자.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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