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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1일 14시 46분 등록
그녀는 여전히 밝고 아름다웠다. 연한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하며 소리 내어 유쾌하게 웃는 모습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외형상으로는 그랬다. 그녀는 슬픔을 이겨내고 있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은 그녀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이다. 갑작스런 친정아버지의 죽음이 그랬고 남편의 대수술이 또한 그렇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현실적 궁핍함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우리는 걱정했었다. 우리가 아는 그녀는 가슴 깊은 슬픔 같은 것은 간직하고 있질 않았다. 모든 일은 그녀 앞에서는 단순해졌으며 유쾌하게 변하였다. 우리는 그녀의 밝고 유쾌함을 그녀의 성장과정과 현실적 풍부함에 연유한다고 결론짓고 있었다.

에스프레소 커피향이 네 평 남짓한 홀 안을 가득 메운다. 참 좋다. 마음이 열린다. 그 때
히야신스 꽃무늬가 있는 하얀 찻잔을 들다말고 그녀가 갑자기 웃는다. 목젖이 다 보이도록 웃어대는 그녀를 따라 우리도 유쾌하게 함께 웃었다.
꽃무늬의 찻잔에서 그녀의 남편을 읽었었나보다.

그녀의 남편은 우리가 말하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다. 멋과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그런 남편이 불만스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단다. 그녀가 풀어내는 구수한 경상도 사나이의
이야기는 쉰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를 웃고 뒹굴게 만들었으며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한 옛사랑에 대한 추억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꽃 선물을 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이었다.
“꽃은 무슨 꽃이고, 꽃이 밥 먹여 주나.”
그녀는 그의 말에 꽃은 포기를 했고 한동안은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길 그녀의 남편은 한 다발의 꽃을 안고 대문밖에 서 있더란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라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싸서 사봤다. 아나”
꽃을 그녀에게 던지다 시피 하고 얼른 들어가더란다.
‘아나’는 ‘자 여기 있다. 받아라.’ 라는 뜻의 경상도 축약형 말이다.

그녀의 유쾌한 경상도 남자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결혼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을 어느 일요일이었단다. 남편은 한주간의 피로를 풀어내는 양 코를 드르릉 거리며 낮잠을 자더란다. 가을 햇살이 하도 좋아서 남편을 흔들어 깨우니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와 무슨 일이고” 하더란다.
“ 바다가 너무 보고 싶어요.”
“그래, 그럼 가자.”
전혀 뜻밖의 반응이었다. 벌떡 일어나 앉은 그녀의 남편이 옷을 입고 구두를 신은 시간은 채 5분을 넘기지 않았다. 그녀는 외출의 준비는 물론 바다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기에 마음의 준비조차 없었다.
“뭐하노 빨리 가자.”
그녀는 늦가을의 햇살을 느끼고 싶었고 여름의 흔적이 남아있는 바닷가의 낭만을 안고 싶었다. 그녀는 바닷가를 찾는 과정을 느끼고 싶었고 그녀의 남편은 가을 바닷가를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삶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고 남편은 그녀가 바다를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택시, 광안리요”
택시는 총알처럼 달렸고 그런 택시 속에서 그녀는 낭만 대신에 공포를 느껴야 했다.
바닷가는 한산했고 모래알이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녀는 흥분했다. 가슴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녀다운 감정이 온 바다를 껴안았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었다. 사각거리는 감촉이 너무도 좋았다.
“ 니 뭐하노 빨리 이리 올라 오이라. 신발에 모래 다 들어간다.”

일렁거리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있던 보트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나마 그 배를 타고 바다를 향해 떠나고 싶었다.
“니 배 타고 싶나. 그럼 타자”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성큼 거리며 배를 향해 걸어갔다.
“30분만 타자.”
이번에도 그녀의 의견을 묻는 과정은 생략이다.
바닷가 가장자리에 머물고 있던 작은 배는 요동을 쳤다. 원래 바닷가의 가장자리에는
철썩거리는 파도로 보트를 타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다. 바다를 향해 적어도 10m 정도는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완강했다.
“더 들어가면 배 뒤집힌다. 빠져 죽어면 니 우짤래”
보트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거리는 바람에 부부는 채 5분도 되지 않아 배에서 내렸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향기로운 커피가 생각났다. 대학시절,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몇 시간에 걸쳐 끝내고 난 후 가졌던 그 향기로운 커피 한잔이 생각난 것이다.
커피 솝에서도 그녀의 남편은 망설임이 없었다.
“니는 유자차데이. 나는 커피.”
“아가씨, 여기 커피하나 하고 유자차 하나”
유자차와 커피는 이 삼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들 부부 앞에 놓여졌다.
여유로움은 사치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남편은 단숨에 커피를 들이켜 마셨고 그것은 흡사 소주잔을 기울이는 것과 같았다.
“뭐하노, 훌훌 마셔라”
“너무 뜨거워 마실 수가 있어야죠?”
“숫가락을 가지고 휘휘 져어야제.”

그녀가 남편과 함께 늦가을 나들이에 걸린 시간은 30분 남짓 되었다.
그녀는 그것이 가슴에 사무쳤단다. 임신 우울증 증상 같은 쓸쓸함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기에 남편의 일방적이고 무감각적인 행동이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었다고 생각했고 스스로 만족해했다. 그 후 20년 넘는 결혼생활 동안 그녀의 남편은 ‘경상도 사나이’다운 행동을 거침없이 해댔고 그녀는 하나씩 체념해 갔다. 그리고 아주 가끔 서울 남자로 변신하는 남편의 행동에 감격하며 그녀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그녀의 남편이 언제 찾아들지 모르는 죽음과 마주하고 있다. 물론 완전 치유의 가능성은 안고 있지만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유쾌한 경상도 남자 이야기 끝은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다.]
지금 돌아 보건데 남편만한 남자를 찾기는 어렵겠단다. 가슴에 사무칠 만한 상처를 남긴 그녀의 남편이지만 그녀의 개인 역사 속에서 남편은 커다란 산맥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지난 남편과의 역사 속에서 현재를 이야기 하고 미래를 예견한다. 비록 그녀의 남편이 먼저 그녀의 곁을 떠날지라도 ‘이것이 인생이러니’라고 생각하겠단다. 사랑은 실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련한 생각 속에 남아있음을 그녀는 덧붙여 말한다. 11월의 늦은 밤거리를 나와 단 둘이 걸으면서 그녀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은 그녀와 함께 걸으면서 절절한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이다. 헤어지기 직전에 그녀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요즈음은 정말 착한 경상도 남자가 되었어요.”
내가 무슨 말을 말을 해도 “그래그래” 로 응답하거든요.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정의(情意)가 언(言)으로 남편에게 표현되기를 바란다. 나아가서 言이 부족하여 그녀가 잘하는 歌(그녀의 전공은 피아노) 로 나타나고 가(歌)는 두 사람사이에 무(舞)로 승화되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그 누구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날 지라도 그 말이, 노래가, 함께한 춤이 남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 남아 아련한 사랑의 흔적으로 새로이 싹트기를 바래본다.






IP *.86.17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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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11.11 17:00:13 *.70.72.121
이별을 떠올리며 나누는 사랑은 진실인가 미련인가 아니면 덧없음인가

삶은 소중한 한사람을 오롯이 느끼기에 그다지도 벅찬 것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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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1.11 17:13:21 *.48.32.95
경상도 문디 아자씨. 하하. 박력있고 멋진데요. 귀여우신 부분도 있구요. 따악 제 타입이군요. 이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글 소재는 떨어지지 않겠네요. 얼마나 저를 웃겨 주실까요. 경상도 남자, 그래요 함 기대해 봐야겠습니다. 이거 근데 저에 관한 미래소설 맞지요? 아닌가요? 남자분 모델은 가까우신 분일 듯 하고..
재미있게 자알 읽었습니다. 하루 종일 미소가 멈추지 않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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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1.11 19:43:02 *.86.177.103
향인씨를 평생 웃겨줄 좋은 남자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기대해 보시라. 집도 지어줄께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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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근
2007.11.13 22:54:24 *.115.232.53
경상도 문디 아자씨!
저네요.
골수 경상도 문디.ㅋㅋㅋ
퉁명스럽고, 제 판단대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나는 니를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맞제?
바로 요거지요.
그래도 요즘은 쬐끔 바꼈지요.ㅋㅋㅋ
낼 올라가는데, 못 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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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1.14 04:21:09 *.86.177.103
큰 걸음하시는군요. 저는 아이가 모레 수능이라 참여는 여럽습니다.
전화 주세요. 저도 전화드릴께요. 그리고 사부님을 비롯한 좋은 강의 다음에 꼭 전해 주시길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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