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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31일 11시 48분 등록
몇 주 전,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미술_여백의 발견"이란 전시를 다녀왔습니다. 가야 토기와 붓글씨 같은 전통 미술에서 영상과 설치 미술 같은 현대 미술까지를 한데 어우러져 있는 기획전이었습니다. '자연, 자유, 상상'이란 3가지 키워드로 풀어낸 일관성 있는 구성과 수준 높은 작품으로 구성된 전시는 좋았지만, 공간이 조금 협소하여 '여백의 발견'이라는 주제의 감동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듯 해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이 전시에는 '이우환'이라는 세계적인 거장의 초기 작품 2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에서'란 제목의 70년대 연작 유화 작품이고, 또 다른 하나는 '관계항'이란 70년대 연작 설치 작품 중 한 점입니다. 그의 평면 회화와 설치 작품은 점, 선, 면, 공간의 만남, 그리고 여백을 넘어 무한으로 나아가는 나와 타자, 자연과 인공 사이의 관계에 대한 탐구입니다.


*선에서, 이우환


*관계항, 이우환

그는 말합니다. "나는 창조자가 아닙니다. 나는 단지 다리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생각하는 대로 만드는 것은 관심 없습니다. 자아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타자(他者)에게 열리려는 노력이 우리 문명의 온갖 병폐를 치유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림이든 조각이든 만든 것과 만들지 않은 것의 틈바구니를 끊임없이 만드는 것이죠. 자아와 타자, 아는 것(인간의 지식과 가치)과 모르는 것(자연, 우주, 무한)을 잇고자 하는 것이 저의 미술적 노력이지요"

존재한다는 것은 점이고, 산다는 것은 선입니다. 그리고 면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세계와 조응합니다. 그의 미술적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눈 앞에 실재하는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관계와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는 그 무엇입니다.


*바람과 함께, 이우환


*조응(照應), 이우환

70년대에 비교적 규칙적인 점과 선에서 시작한 그의 회화 작품은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바람처럼 거칠게 흩날리는 선들로 표현됩니다. 그러다 90년대에는, 아무 것도 없이 고요한 소색(素色)의 공간 속에 무채색 점으로 오롯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 조용한 점과 공간 사이의 관계로 인해 그의 그림은 좁은 캔버스를 벗어나 무한한 공간의 세계로 뻗어나가게 됩니다. 그는 드디어 보이지 않는 관계의 울림으로 가득 찬, 텅 빈 여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쓴 아르놀트 하우저라면 이우환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했을지 궁금합니다. 그는 아마 이우환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그의 삶과 그가 참여했던 일본 모노파 운동을 면밀히 분석하겠죠. 그리고 도도한 예술사의 흐름 속에서 그의 위치를 명확하게 설명해 줄 것입니다. 또 자신과 마찬가지로 국경의 경계를 넘어 떠도는 방랑자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낄는지도 모릅니다.

하버드대 마음/뇌/행동 연구소 소장, 앤 해링턴은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 해면동물과 같다. 해면동물은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 즉 바닷물을 흠뻑 흡수한다. 해면동물의 생리적인 면은 그런 환경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해면동물의 생리와 그가 살고 있는 환경을 별도로 분리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바닷물은 해면동물의 내부적인 작용의 일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앤 해링턴의 말처럼 인간은 '해면동물'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사회와 공간과 관계를 맺고 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화가 이우환의 작품 속에는 경남 함안에서 점을 찍고, 선을 긋고, 사군자를 치던 그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는 '지금 하는 일이 어린 시절 하던 그 일이다'고 말하며 슬며시 웃기도 합니다.

우리는 결국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잘하는 것은 자신의 좁은 경계를 부수고 무너뜨릴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이우환의 인생에서 젊은 시절, 일본에서 겪었던 더 넓은 세상의 문화 충격과 한국, 일본, 유럽을 오가는 무경계인의 삶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의 그가 있을 수 있었을까요.

"모든 예술은 혼돈과의 유희요 혼돈에 대한 싸움이다. 예술은 언제나 혼돈을 향해 점점 더 위태롭게 다가서서 더욱 더 넓은 정신적 영토를 그로부터 건져오는 작업이다. 예술사에 어떤 진보가 있다면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탈환해온 이러한 영토의 끊임없는 확대를 말하는 것일게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권, p. 309)

하우저의 말처럼, 예술이 그러하듯 자신을 찾는 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찾는 일, 그것은 지도에 없는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모험입니다. 세상과의 싸움인 동시에, 절대적으로 자신 내부의 혼돈과의 싸움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격렬한 싸움을 치른 자만이 달콤한 외로움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우환은 한 인터뷰에서 작품을 완성한 순간의 느낌을 이렇게 담담히 털어놓습니다.

"내가 작업을 하는 순간은 … 절대적인 나의 삶이고 순간이에요. 그러나 일단 그리고 난 다음에는 내가 무슨 짓을 하던 … (작품은) 내 말은 안 들어요. 자기 발로 걸어가요. … 내 말과 그림은 같은 것은 아니고, 서로 다른 삶을 사는 거예요.

그리고 작업을 했을 때, '아, 잘 된 것 같다.' … 희열이라고 그럴까, 아주 기분이 좋을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는) 보통 때는 담배를 안 피우는 데, 담배를 한 대 피운다거나 차를 한 잔 마신다거나 그러면 기분이 썩 좋아요. 좋고, (그러다) 조금 있다가는 쓸쓸한 느낌, 서운한 느낌, 외로운 느낌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럴 때 찾아오는 외로움은 너무나 근사한 거예요."

전시를 감상하고 내려오는 길, 텅 빈 하늘을 바라보며 셔터를 가만히 눌러봅니다. 어딘가 쓸쓸한 겨울 저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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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2007.12.31 15:59:15 *.131.139.97
스카이라인이 평범한듯 하면서도 이쁘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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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8.01.03 12:43:19 *.249.162.200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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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1.05 08:14:47 *.72.153.12
하우저의 예술은 혼돈과의 유희요, 혼돈과의 대한 싸움이라는 말과
화가 이우환의 창조의 즐거움과 외로움을 블로그로 퍼간다.

충만함과 허탈함이 공존하는 혼돈과의 유희, 싸움에 대한 허허로운 마음이 가슴으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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