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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27일 04시 29분 등록
연구원 4기에 지원하신 예순의 어르신(? 노인이라는 칭호는 절대 아님)께서 탈락의 애석한 심사를 공개적으로 토로하시면서 연구원과정의 학습을 나름대로 해나가실 것을 선포하셨다.
나는 우선 그분의 지원의 동기에 매우 감동하였었는데 낙방의 변까지 털어놓으시며 이곳에 동참을 하시는 것을 보고 더욱 크게 감동하였다. 왜 굳이 이 과정의 연구원을 지원하셨는지 무슨 책을 그리도 쓰고 싶으신 건지 아직은 잘 알 수 없으나, 그분은 아마도 인생을 성실히 살아오신 것 같은 깊은 신뢰감을 준다. 저토록 당당하신 것을 보면 말이다. 그 모습이 보기에 좋다. 아마도 그분과 같은 많은 장년층들에게 공감과 귀감이 되시기에 충분하리라고 여겨진다.

지난해에 나는 이 과정을 하면서 내가 꼭 찾아뵈어야 할 그리고 찾아뵙고 싶었던 은사님들이 다 모이시는 동문회에 초청을 받고도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참석을 하지 아니했다. 그 동문회는 특별했는데 우리를 가르치셨던 교수님께서 정년퇴임을 하는 자리였고 그래서 예전의 은사님들을 한자리에서 다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마도 내가 잘 살고 있었다면 아니 보통의 가정이라도 지켜 살고 있었다면 나는 단박에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과제를 마치지 못했다는 이유를 달면서 나는 가지 않았고, 그날 내내 공부도 안 되고 안절부절 도리를 못한 것이 안타까워 몹시 후회를 하며 내 자신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 무렵 24~5년 만에 만난 나의 동창 하나는 나를 보고 여전히 활기차다고도 하였고 또 다른 남자동문들은 나의 변화를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왔다. 그다지 가까이 지내온 동문들은 아니었고, 그저 한때 같이 어울려 공부하고 MT간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들은 그 시절 나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창시절의 나를 아직도 또렷이 추억하며 지금의 내 모습과 변화를 보고 크게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내 신상의 변화를 읽어냈던 것이다. 남자 동창 하나는 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깜짝 놀랐다. 사람을 가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토록 새침때기에다 함부로 아무하고 어울려 놀지도 않았고 언제나 여성스럽고 조신했다는 것이다. 나도 나를 기억한다. 나는 선배 형들에게 행동거지를 잘 한다고 칭찬을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왈가닥이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연구원 동료 하나가 지금의 내 모습이 원래의 성품인지 살면서 변화되었는지를 물어온 적이 있었다. 나는 천성이 밝은 성격의 소유자라고만 했었다. 그런데 그 후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많이 바뀌었고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그것은 내 원래의 밝음과 지금의 밝음이 많은 차이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유년과 청년의 내 밝음은 맑은 밝음이었다고 하면 지금의 내 밝음은 어두운 밝음인 것이다. 그것에는 눈물과 분노와 억압과 광기가 서려있는 듯하고 숨은 열정과 발작과도 같은 슬픔이 혼재되어 있어서 인 것도 같다.

나의 큰 오라버니는 고단한 삶을 피해 주도적 삶을 찾아서 살기위해 미국에 이민을 갔다. 오빠와 나는 그다지 친했던 것 같지는 않다. 워낙에 나이차가 많이 나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살갑게 남매의 정을 나누는 사이는 못 되고 또 우리 사남매 자체가 별로 말이 없이 컸다. 사람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면 이 집은 애들이 없는 것 같이 조용하다고 한 적이 많았는데, 우리 형제는 그렇게 제 각각 알아서 조용히 컸고 유별난 우애도 나누지 않고 무심한 듯 평범하게 지내는 편이다. 큰 올케는 우리 집에 시집와서 나를 붙들고 식구들이 너무 말이 없어 삭막하고 심심하다고 호소하곤 하였다.

하지만 큰 오라비에게 나는 어쩌면 가장 애가 타는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인지 모른다. 당시만 해도 덩치가 컸던 큰오빠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나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학부형처럼 나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가끔씩 전화통화를 할 때면 오빠내외는 늘 내 안부를 빼놓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주요 사항 외에 거의 전화를 하는 법이 없고 또 잘 받지 않는다. 특히 명절에는 전화통화를 할 때면 끝내 목이 메고 만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아픈 것이다. 나는 오빠가 내게 뭐라고 하지 않아도 절로 그 마음이 들려온다. 제발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아 잘 살아라하는. 오빠의 그 더듬거리듯 머뭇머뭇 애석해 하는 느린 말투에는 네가 어떻게 자랐는데 하는 아쉬움이 늘 배어있고, 빨리 예전처럼 밝고 환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깃들어있다.

오늘 예순의 장년이신 이수님과 일면식도 없이 함께 공부하자고 나부대면서 갑자기 같은 연배의 우리 집 맏이 내 큰오빠생각이 떠오른다. 오빠는 한때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다. 결혼 후 간이 안 좋은 것이 발견 되어서 우리 집안은 초상집과도 같이 침울했고 특히 어머니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큰오빠의 건강을 보살피셨다. 아마 그때 우리 식구는 큰오빠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면 무엇이건 다 했을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병을 다스렸고 마침내 오빠는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만의 의지의 길을 찾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솔직히 큰오빠가 그런 용단을 내릴 줄 아무도 몰랐다. 다만 유독 나만이 오빠에게 신신당부했었다. 그냥 여행 삼아 바람이나 쐬고 돌아오지 말라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오거나 그곳에서 오빠의 길을 개척해 보라고. 큰오빠는 우리의 기대에 200% 이상 선전했다. 건강을 지켰고 두 조카들을 결혼시켰으며 조그만 자기의 사업을 꾸려가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가족 중에서 나만 아직 큰오빠가 사는 곳을 가보지 못했다. 차일피일 미루었고 살기에 바빴고 마음도 그다지 여유롭지 않았다. 이제 나도 큰오빠처럼 강인하게 생을 다시 꾸려가야겠다. 큰오빠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나도 부조리한 내 삶을 폐기하고 씩씩하게 내 삶을 온전히 살아내야겠다. 내 장한 큰오빠처럼.
IP *.70.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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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2008.02.29 16:16:22 *.75.127.213
안녕하십니까. 저는 써니씨의 형아가 된지 얼마되지않아 얼떨떨한 기분이 채가시지 않아서인지 그 의미를 되새김질 하고 소화를 하기 위해 한참은 좀 지나서 이런 글에 댓글을 달가 했는데 저를 거론하시면서 그 배경을 얘기해 주시니 몇마디 안하고 지나가기가 힘이 듭니다.

저는 써니씨의 후련히 살다 홀연히 사라지리라를 찬찬히 읽어 내려 가면서 그리고 부지갱이씨의 부지갱이질을 당하시는 모습 연구원 동료들과 지적인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혼비백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화의 힘을 이번주내로 두번째로 통독을 하고나서 과제의 글을 써나갈 내용을 마음속으로 다듬고 있는데 이글을 보면서 저는 저의 마음가짐을 다잡기를 보다 철저히 해야 될것이라는 시그날이 저를 무섭게 흔들어댑니다.
그러면서도 금년 일년을 보낼일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합니다.그러나 어찌하든지 자임 연구원 생활로 써니씨같은분과 같이 자신을 가다듬지 않고는 모임의례에 입장도 못할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저는 97년 외환위기로 어머니 자궁같은 월급쟁이 생활을 99년 초에 때려 치우고 말았습니다. 회사에서 분식회계를 담당한 임원이라고 서울 지검 중수부 재보험공사등에서 한 3년 불려 다니면서 곤혹을 치루다가 카나다토론토에 이민가서 3년 반동안 조그만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세상공부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니뎐 회사에서 임원이라고 해도 오우나를 비롯해서 사장단이 즐비하니 저는 피램이에 지나지 않아 관련 업무에 밝으니 조사는 철저하게 받았지만 책임질 감이 아니라고 대부분이 일심이나 이심에서 탈락이 되고 말았습죠. 그러나 다른 높으신 분이나 재수없이 걸러든 사람은 사실 아직도 곤혹을 치루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저의 처가 카나다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하고 저의 딸냄이가 타지역에 교대를 나와서 서울지역에 초등학교교사 임용고시를 재수하고 있었는데 혼자 살면서 고생하는 것을 멀리서 안스러워 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국에서 다시 직장생활할 것을 권하는 얘기를 듣고 다시 지난 10월에 귀국해서 변경연의 구소장의 강의를 듣고 저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저자신을 다시 찾고 여기 써니씨같은 분을 알게 된 것입니다.이런 저를 보고 좀 일찍 변경연을 찿지 않았느냐고 써니씨가 얘기를 하시니 일일이 말씀을 다 드릴 수도 없고 답답합니다.그러나 저는 이렇게 늦게나마 누군지 모르지만 이런 기회를 주신 분께 고마울 뿐입니다.
거기다가 딸냄이가 이번에 서울지역에 붙었습니다. 저는 변경연에 연구원에 떨어졌는데 말입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극적인 순간이 많습니다.그래서 저는 저의 친구가 야 너는 귀신도 함부로 못대려갈 독한 놈이라고 듣고 삽니다.

써니씨의 큰오빠에 대한 한 매침이 구비 구비 저의 가슴을 후려치네요.저는 남이 보면 그저 평범한 월급쟁이를 했을 뿐인데 신화의 힘의 저자 죠셉 캠벨씨의 얘기로 그렇게 오랫동안 사셨지만 이세상에서 보통 사람을 자기는 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맞다 나도 결코 보통사람의 생활이 아니었구나 이세상에서 보통사람의 인생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다.보통사람을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느낄수 있는 시각을 가지는 것이 내가 할일이다.

그러니 내가 살아 낸 세월도 지난때는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똑같은 것은 없을 것이니 그냥 그것을 한강물에 떠내려 보내면 영원히 없어질 것이니 얼마나 아까운 보배냐 말입니다.

외국에서 이민가서 살고 있는 중늙은이를 다시 월급쟁이을 하라고 부르는 사람이나 그소리를 듣고 낼름 쫓아오는 사람이나 조금은 좀 이상하지요.그러나 다 이런 인연을 맺으라는 뜻으로 해석해보니 재미있지 않아요.

저는 세상에서 재미는 그냥 누가 갖다주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자기 몫은 자기가 찾아야지요. 누가 그러는데 산아 나에게로 오너라 하더니 아니 오니 그래 그럼 내가 가마 하는 얘기가 생각이 나네요. 콜럼버스 달갈이라고요. 아무렴 이런 얘기도 쓸모가 있으니 생겨났겠지요. 써니씨나 저나 다 세상에 쓰임새가 있으니 지금껏 굴러다니는 것 아니겠어요.이왕 그럴바에 왕창 쓰임새가 있어야지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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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3.01 02:31:12 *.70.72.121
하하하.
형아, 과제는 하셨어요? 빨랑 하셔야죠. 저도 지금 잘 안 되서 끌탕 중이에용. 에고 머리야~

이수형님 뵈면서요, 초아선생님이랑 또 박노성님이라고 지점장 퇴임하시고 사업하시는 멋진 선배님이 계신데요 연배도 비슷하고 말씀도 비슷하신 거 있죠. 초아선생님은 저만 보시면 회초리 드시구요 박선배님은 껄껄껄 웃으시죠. 형아께서는 써니에게 어찌 하실지요? ㅎㅎ 언제 세 분 자리에 함께 하시면 무지 재미있을 것 같아요. 구이사님의 인간시대 인간승리 같은 삶도 들려주시고요.

참, 따님 임용시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아빠 닮아 머리 좋겠지요?
한 턱 근사하게 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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