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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8일 17시 18분 등록
회사의 책상 안쪽, 파티션으로 만들어둔 벽 안, 나의 공간으로 만들어진 곳에는 전임자가 붙여둔 사진이 있다. 올해 1월 10일에 찍은 명자나무 꽃봉오리 사진이다. 지금은 지척에 아름다운 꽃이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봄꽃이 일찍 피어버리는 것을 흔히 보았기 때문에 꽃봉오리에 눈이 덮여 있다 하여도 내 흥미를 자극하지 못했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눈을 맞고 피어 버린 이 봄 꽃에서 무엇을 보았던가?

오늘 오전 문득, 그 종이를 떼어 버리고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그 자리에 붙이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버리기 전에 글을 한번 읽어보자는 심정으로 그 아래에 써둔 글귀를 보았다.

명자나무에 얽힌 그 사람의 이야기이다. 명자나무의 꽃 이야기는 그녀의 이야기였다. 아마도 이 명자나무가 이른 봄에 핀 것도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은 이유가 되겠지만, 그보다 앞서 그녀는 명자 나무에 얽힌 아름다운 사연을 하나 가지고 있기에 그녀와 명자나무가 서로 눈을 맞춘 것 같다.

그녀의 글에 따르면 명자나무는 집의 정원에 심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에는 '울 안에 심으면 집안의 여자들이 바람이난다.'라는 말이 전해저서 일부러 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진을 찍은 그녀는 지금은 정원에도 심고, 이처럼 공원의 울타리용으로 심어져 있기도하다면서 조심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 사진을 찍어서 붙여둔 그녀는 이 꽃을 만나면서 30대 중반에 아무런 이룸없이 지내는 상실감을 이 꽃을 통해서 벗어났다한다. 바람이 난다는 말이 그 사람에게는 주술처럼 작용해, 꽃의 붉은 잎사귀에 빠져들고, 그 속에 흐르는 요염함을 통해서 열렬한 연애를 꿈꾸었다. 그것은 한 남자를 통한 연애는 아니었다. 자신이 모르고 있던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세상과 소통하는 연애였다. 그녀는 꽃에 자신의 새로운 삶을 갈망한다는 주술을 외워댔나 보다. 바람이 난다는 말을 통해서. 바람난 처자가 발이 땅에 닿는 듯 닿지 않는 듯 살아가는 것과 같이 자신의 삶이 세상 속에서 황홀한 듯이 계속되길 바랬나 보다.

7년전에 만났다던 이 꽃이 현재의 그녀를 어떤 사람이 되게 했는지는 난 잘 모르겠다. 내가 왔을 때는 이미 그녀는 이곳에 근무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단지 한장의 사진에 그 사진에 써둔 그녀의 글귀를 통해서 그녀가 지금은 7년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짐작을 해본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그것이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한다고 한다. 동물학자 데즈먼즈 모리스는 인간의 미적추구 활동은 모두 순식간에 일어나는 미의 판단과 관계가 있다고 했다. 무의식이라고 여길 만큼 아주 짧은 시간에 아름다움은 판명이 난다. 그 짧은 시간은 수퍼컴퓨터가 저장된 자료를 꺼내서 연산을 하는 것보다 수천배, 수만배 따른 짧은 시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개체로서의 생명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동물의 생존본능에 연결된 것이기에 그렇다. 기존에 쌓아놓은 정보들 속에서 자신에게 좋게 작용했던 것들은 '미'라는 말을 대표해서 그 아래 묶인다. 순식간에 일어난 정보검색은 어렷을 적부터 쌓아온 기억, 추억을 한마디로 아름답다 혹은 추하다 하고 판단한다.

명자나무의 꽃에 얽힌 전임자의 경험도 그렇다. 자신을 꿈꾸게 만든 그 꽃이 그녀에게 순식간에 아름다운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그 꽃에 얽힌 실연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면 그녀는 명자나무 꽃을 아름답다 하지 않을 것이다. 개에게 물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 모든 개를 위험한 동물로 취급하는 것과 같이.

나에게 희미한 기억을 남겼던 명자나무 꽃은 전임자의 사진과 글을 통해서 내게 또 하나의 정보를 추가했다. 그것은 데즈먼드 모리스의 설명에 따른다면 아름다운 쪽에 분류될 것이다. 자극과 반응이라는 한 세트의 경험을 통해서 아름다움 혹은 추함 같은 추상적인 것들은 하나씩 그 실체를 더해간다. 어떤 자극에 반응한다는 것, 그것은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활동의 하나이다.
IP *.247.8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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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희
2008.04.08 21:46:17 *.41.62.236

전임자와 후임자가 한 공간에 의해 교감하는 느낌.
영화의 한장면이 생각나요.

정화씨의 전임자, 아름다울 그녀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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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8.04.09 10:26:46 *.209.28.250
그럼 우리 이 봄에 열 일 제쳐두고
화분에라도 명자나무 하나씩 심자. ^^
속설이 주술처럼 작용해,
세상과, 나와, 너와 열렬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정화씨, 좋은 봄날에 바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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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4.10 13:07:57 *.248.75.5
좋은 글이네요.
글을 엮어가는 정화씨의 마음이 보여요,
그리고 그 마음을 따라가다 보니
정화씨의 갈망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명자꽃 사진이 추가된 아름다운 정보망 속에
더 많은 좋은 것들이 쌓여서
정화씨의 삶이 더 많은 것에 공감하는
더 행복한 삶이길,
그리고 나의 삶도 그러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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