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용
- 조회 수 96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그 날, 그녀
라오스에는 여성의 날이 두 번 있다. National women’s day와 International women’s day. 라오스 여성의 날이 이맘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곳 National women’s day에는 남자들은 출근하고 여성들은 쉰다. 휴일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는 건 의외다. 오늘은 여성의 날이어서 여성 분들은 쉬는 날이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라오 분 중에, 외모는 남자지만 성 정체성은 여성인 분이 있는데 오늘 아침 출근하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Good morning~ 한다. 짙은 립스틱을 바르시고 출근하셨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 분을 부를 때 일부러 꼭 미스터를 붙이는 짓궂은 사람들이 있다. 그 분은 이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 항상 웃으며 ‘미스’를 붙여 말하는데 (오해하시면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날, 함께 일하는 여성분을 하대하며 미스를 붙이곤 했지만 이 곳에선 기혼, 미혼을 따지지 않고 쓰는 그야말로 존경의 의미로 여성을 부르는 호칭으로 쓰인다) 그럴 때마다 갑자기 밝은 얼굴이 되어서 ‘뭘 도와줄까’하며 굵은 목소리로 되물어 온다. 마치 무슨 일이든 도와 줄 것만 같은 알라딘의 믿음직한 모습을 그녀에게서 발견하기도 한다. 좌중을 들었다 놓는 유머감각과 굵은 허스키 보이스가 그녀의 매력 포인트다. 가끔 두꺼운 화장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두꺼운 코털을 볼 때나, 우스운 농담에 반색하며 자기도 모르게 후려치는 등짝에 이 분이 한때 남성이었음을 다시 한번 각인하게 되지만 오늘 같이 여성들이 죄다 쉬는 휴일에 출근하는 장면은 우리를 짠하게 한다.
라오스는 모계사회다. 라오스뿐만 아니라 동남아 일대 거의 모든 나라가 모계의 힘으로 사회가 지탱된다.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도 여성이요, 가족의 대소사도 여성이 결정하는 집안이 많다. 그러다 보니 유산이나 재산 또한 딸에게 대물림 한다. 지금은 조금 흐려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사무직을 비롯한 일터의 60~70%는 여성이 차지한다. 여성은 이 나라 경제활동의 중추이자 핵심이다. 관공서에 끗발 있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다. 대통령은 남자지만 이권과 권력에 밝은 자들은 영부인에게 줄을 댄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뭘 할까. 글쎄 말이다. 성급하게 말하긴 뭣하지만 우회하여 말하면, 이곳에선 아침에 일하러 가서 저녁에 들어오는 남성을 최고의 신랑감으로 친다. 그만큼 가계를 위해 성실한 남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그러고 보면 대체로 한국의 어지간한 남성들은 이 곳에선 일등 남자의 조건을 갖춘다.
다녀온 글을 바로 잡아 앉히면, 그녀를 통해 나는 이제야 보게 된다. 지난 날 나의 편견과 좁고 좁았던 성 평등의 관념들, 이 세상의 성별을 남성과 여성으로만 재단하는 이분법적 사고. 아름다운 중간이 있음을, 그 안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물었다. 모두가 당신을 여성으로 알고, 대하는데 여성의 날에 굳이 왜 출근했는가. ‘회사에서든 사회에서든 남성이지만 나는 스스로 여성이라 여긴다. 어쩌겠는가, 공식적으론 나는 남성이다.’ 스스로 여성이지만 남성의 굴레를 쓰고 있는 참담한 심정이 깊게 전해졌다.
‘여성의 날’ 사건이 있고 난 뒤 인사부서에서 관리하는 직원들의 신상명세에 그 분이 Mr. 아무개로 등재된 사실을 알게 됐다. 제도는 늘 이렇게 사람을 가둔다. 간만에 오지랖을 부리기로 했다. 적절한 날을 골라 사실을 말씀 드리고 정정하는 게 어떻겠냐고 정중하게 건의 드렸고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이후 나는 사는 곳을 옮겨왔으므로 그녀가 그 다음해 여성의 날에 쉬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즈음 여성의 날이 다가오면 그녀의 굵은 목소리와 두툼했던 주먹이 생각나면서 그녀가 기죽어 있던, 화창했던 그 해 여성의 날 오전이 함께 생각나는 것이다.
(참고) National women’s day는 7월 20일이며 정확하게는 ‘라오여성연맹창립기념일’ 이다. International women’s day는 3월 8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