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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일 10시 58분 등록
1979년 2월 나는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머리를 빡빡 밀고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남자 삼형제 중 막내로, 형들이 모두 3년씩 현역 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의 군 입대는 우리 집에서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생각됐고, 어머님은 군에 가는 자식을 문밖 배웅도 해 주지 않으셨다.
“남들 엄마는 기차역까지 따라가서 배웅한다는데, 엄마는 같이 안가세요?”
“군대 너만 가냐? 뭐 대단한 거 한다고...” “몸 성히 잘 다녀 오거라”
우리 어머님, 담대하시기가 이순신장군 모친에 못지않다.

군 생활에 적응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 몇 개월은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고 한때는 탈영을 생각 할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사람이란 게 본시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인지라 ‘잘 적응해보자’고 마음을 고쳐먹고 나니 군 생활도 점차 할만 해져 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0월 20일 나는 꿈에 그리던 첫 휴가를 나오게 됐다. 군에서의 첫 정기휴가. 죽은 사람이 천국 구경을 하게 되면 그럴까?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그런데 휴가 나온 후 며칠 지나지 않아 10.26 사태가 발생했다. 집에서 아침 방송을 보는데 대통령이 시해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 때 불현듯 ‘복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뉴스에서 ‘휴가 나온 장병들은 복귀하라’는 말을 들었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그런 말 못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같이 휴가 나온 입대 동기 두 명에게 연락을 취했다. 동기들과 머리를 굴려 봤다. 복귀하면 나중에 특별 휴가를 나오게 될 터인데, 특별 휴가는 10일이다. 오고 가고 2일 빼면 8일, 지금 남아있는 휴가기간이 9일. 거의 비슷하긴 한데 꿈결 같은 첫 휴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동기들 둘 다 복귀하지 말자는 의견이었다. 조금 떨떠름하긴 했지만 동기들이 같이 행동하는 거니 그렇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꿈같은 첫 휴가를 마치고 불안한 마음으로 귀대하던 날 우린 귀대신고를 마치자마자 바로 두어 시간동안 얼차례(기합)를 받았다. 우리 여단에서 휴가 출발한 병사들이 30여명 되는데, 자진 귀대를 한 병사가 한 명도 없었단다. 그런데 우리 여단 옆 전차부대에서는 휴가 갔던 10여명 전원이 자진 복귀했다고 한다. 여단 본부 선임하사는 한참 열이 받아있었다. 기합을 주면서 그는 속에 맺혔던 푸념을 토해냈다.
“야! 이노무 자슥들아! 느그 같은 놈들 믿고 우째 전쟁을 하겠노?”
“우리나라에 진짜 전쟁이 나면 느그 같은 놈들이 부대로 복귀를 하겠나? ”
“전부 도망가 버리제! 얘이... 나쁜 자슥들!”
원산폭격 자세로 세워 놓고 군화발로 엉덩짝을 걷어차며 그는 흥분을 가라 않히지 못했다.
“이노무 자슥들! 나라 잡아먹을 놈들이여! 에이! 나쁜 놈들...”
두어 시간 기합을 받고 나니 자진복귀를 하지 않아서 휴가기간 내내 갖고 있었던 불안감이 싹 가시고 오히려 개운해졌다. ‘아! 첫 휴가가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이 찾아 들었다.

귀대하기 전에 정권인수를 준비하는 권력 실세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게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여하튼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 갈런지 매우 궁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군대 안에서는 바깥소식을 알 길도 없고 궁금해 해봐야 머리만 복잡해지니 자기만 손해다. ‘잘 되겠지...’ 하면서 별 고민 없이 군 생활에 충실했다.


12월 13일 새벽에 비상이 걸렸다. 비상 등급은 데프콘 2였다. 데프콘 2는 전쟁준비 완료 단계를 말한다. 부대원들에게 실탄과 수류탄이 지급되고 전원 참호에 투입됐다. 부대의 모든 장비를 차량에 탑재하고 전쟁이 발발(데프콘 1)하면 막사 건물 등을 파괴하고 바로 작전지로 출동할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말한다. 전쟁 발발 직전의 상태다.

가끔 불시에 비상이 걸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부대에서는 어떤 상황 때문에 비상이 걸렸는 지를 금새 안다. 간부들이 비상상황에 잘 대처하기 위해 그 상황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대개는 상급부대(국방부, 군단, 여단 급)에서 내리는 훈련용 비상이고, 가끔 비무장지대의 총격전이나 간첩 출현 등으로 비상이 걸린다. 그런데 이번 비상은 달랐다. 훈련 상황은 분명 아닌데 뭣 때문이 비상이 걸린 지를 몰랐다.
소대장이 상황실에서 빽빽 고함을 쳐대며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 몰라?...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그럼 대체 누가 안다는 말이야? 이런...”

비상 출동 준비가 완료되고 나서 소대원들을 모아 놓고 소대장은 짧은 훈시를 했다.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건 뭔가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는 거다. 마음의 준비를 해라” 본인도 상황을 잘 모르니 불안한 것 같았다.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운 소대장의 얼굴 빛이 그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새벽 세시쯤 호투입이 됐는데, 나는 입대 동기(김일병)와 같은 참호에 배치됐다.
“모야 이거? 북한에서 쳐들어오는 건가? 대통령이 없으니 김일성이 호기로 생각한 건가?”

둘이서 이런 얘기를 나눴다.
“야, 너 진짜 전쟁나면 뭐할래?” 내가 물었다.
“나 (부대 옆) 구멍가게 집 딸네미 만나고 싶어. 나 그애 좋아하거든...” 동기가 말했다.
“뭐? 전쟁이 났는데 임마 여자 만나겠다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죽어야지. 나 걔 엄청 좋아하는데 아직 말도 못 꺼내 봤단 말야. 죽기 전에 제일 하고 싶은 게 걔 만나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야” “넌 뭐하고 싶은데?”
“그래? 그럼 난 과수원집 아가씨나 만날까? 그 애도 괜찮던데...”
군인들이 항상 그리워하는 여자 얘기를 하며 웃었지만, 속으론 불안했다.

하루가 넘도록 비상상황이 왜 발생 했는지를 우린 몰랐다. 이틀인가 삼일째가 되어서야 12.12 사태의 전모가 뉴스에 나왔던 거로 기억한다. 우린 뉴스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다.

나와 동기가 참호 안에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던 바로 그때.
의정부 근처 사단의 사단장 부관실에 근무하던 고등학교 선배가 전하는 바는 이렇다.
비상이 걸려서 부관실에 갔더니, 이 곳 저곳에서 사단장을 찾는 전화가 빗발쳤다. 전화 중에는 당시 상황이 궁금해서 정보를 얻기 위한 전화가 대부분이었지만, 사단장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라고 지시하는 두 세력으로 부터의 전화가 있었다. 의정부는 서울 외곽에서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만약 쿠테타가 일어나게 되면 의정부 주둔 사단장이 어느 편에 서느냐가 혁명을 일으킨 쪽이나, 그것을 막으려는 쪽 양편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사단장은 수많은 전화를 받더니만, 앞으로 오는 전화를 연결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사단장실에서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한 시간 남짓 경과 후에 그 사단의 거취가 결정됐다. 출동할 것이냐? 아니면 그 곳을 사수할 것이냐?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목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역사의 전면에 나서거나 혹은 역사의 죄인이 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다행히 그 사단장은 결정을 잘 했더란다.

1979년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그리고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다. 1980년 그 화창했던 5월, 전라도에서 광주사태가 일어났다. TV에서는 연일 군인들이 얻어맞고, 난폭한 시위대들이 차량과 무기를 탈취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들을 방영했다. 군대 동료들은 내무반에서 함께 TV를 보며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 시민, 폭도들을 욕하고, 얻어맞는 군인들을 불쌍하다며 애처로워했다. ‘아니 저럴 리가 없어. 저건 조작된 뉴스가 분명해.’ 그래도 세상 보는 눈을 조금은 틔운 후 군에 입대했던 나는 처음엔 뉴스가 보내는 메시지를 부정했다. 하지만 열흘 보름씩 계속 해서 그런 뉴스를 보고 듣다보니 생각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점점 세뇌되어갔다. 하기야 내가 접할 수 있는 뉴스라곤 그런 것이 전부였으니...

광주사태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등학교 때 친구가 면회를 왔다. 친구는 기독교학생회 소속으로 시위를 주동한 혐의를 받아 당시 수배 중이었고, 강원도 강촌의 한 방갈로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중이었다. 그 친구나 나나 갖은 돈이 없어 부대 옆 민박집에 자면서 라면을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그 친구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들은 세상 얘기는 매스컴에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서울의 봄’이란 얘기를 그 친구에게서 들었다. 이제껏 입국이 허가되지 않던 친북성향의 인사들이 입국해서 학교에서 강연 했던 얘기. 국내 매스컴과 외신이 바라보는 우리나라의 상황. 권력자들의 언론 통제. 자기가 타임지 기자와 인터뷰 했던 얘기. 지금이 민주화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할 것 같다는 회한. 우린 이처럼 좋은 기회를 다시는 얻지 못할 거라는 얘기까지.

군대에서 세뇌당한 채로 세상 돌아가는 바를 모르고 살아가는 내 처지가 안 스러웠다. 그리고 그 혼란한 와중에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친구가 듬직하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광주사태는 내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지나갔다. 난 군인이었고 명령이 떨어지면 그걸 수행하면 되는 병사였다. 내게 광주사태는 가슴 아픈 역사라고 생각되기는 했지만, TV를 통해서 소식을 전해 듣는 그냥 일개 지역에서 벌어진 소요 사태일 뿐이었다. 우리 부대 인근에 있던 7공수가 광주에 투입되면서 7공수가 담당했던 지역에 우리 부대가 계엄군으로 투입될 것이란 소문이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광주사태가 일어나는 동안 난 이전 같이 평범한 군 생활을 했다.


난 이렇게 10.26, 12.12 사태와 광주민주항쟁을 군 생활하면서 겪었다.

그런데 81년 12월 제대할 무렵에 난 “국난극복기장”이란 것을 받았다. 마치 훈장같이 생긴 모양으로 왼편 가슴에 그것을 달면 모양이 제법 그럴 듯했다. 이걸 왜 주냐고 물으니, 10.26, 12.12, 광주사태를 다 겪고 제대하는 제대병들 모두에게 주는 거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어려운 국난을 극복했다고...

제대하면서 집에 그걸 가져왔다. 어머님이 이건 뭐냐고 하시 길래 장난스럽게 군에서 받은 훈장이라고 했다. 어머님은 한동안 그것을 가슴에 달고 다니셨다. “우리 아들이 군에서 훌륭한 일을 많이 해서 훈장을 받았대.” 어머님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랑을 하곤 하셨다.

내가 우리나라의 국난을 극복했나? 도대체 무얼 했길래?
국난 극복의 역사를 입증하려고, 그 역사의 증인들에 대한 노고를 치하 하려고, 당시에 제대한 수많은 군인들에게 그 기장을 주었나?
전두환 정권 입장에서는 그게 국난극복의 역사였으리라. 하지만 그로부터 핍박받은 수많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치욕의 역사고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역사였을 게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우리나란 어떻게 됐을까?
일본이 우리나라를 정복하지 않았을까? 그럼 일제 36년이 360년 정도로 연장 되지 않았을까?
난세가 영웅을 난다고, 이순신 같은 또 다른 영웅이 나타나 우리나라를 살려냈을까?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12.12 때 정승화가 전두환을 제압 했더라면?
광주민주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뒤집혔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그래서 되돌아 갈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게 역사다.
우리가 지난 역사에서 그 ‘뜻’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있다.
우리는 앞으로 제대로 된 역사를 살고자 한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역사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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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6.02 12:52:34 *.244.220.254
한국의 근현대사가 한 편의 드라마처럼 지나가는데요~

저는 형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80년 광주'의 빛바랜 필름때문에 '인생의 변곡점(變曲占)'을 맞이하였답니다. 비디오를 통해서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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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6.02 16:05:46 *.84.240.105
저는 80년 광주에 사는 유치원생이었습니다.
우리집은 도청 근처에 있어서 날마다 총성이 들렸었습니다.
길건너 가기만 하면 되는 유치원도 못가게 해서 너무 슬퍼했지요.
밤마다 총알을 막는다고 이불을 문에다 두르고 잠을 자고 재수하던 사촌 오빠는 계엄군에게 맞아서 죽을 뻔 했었습니다.
수퍼집 위에는 날마다 총을 든 계엄군들이 서 있었는데....

광주 사람들은 그런 기억들을 잊고 싶어 하나 봅니다.
아무도 그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지요.
그들에게는 그 시절은 너무도 아픈 기억이지요..

어린 나이였지만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는지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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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6.03 11:09:59 *.244.220.254
현정낭자가 '광주' 출신? 오~ 역사의 아픔을 함께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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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6.03 15:01:11 *.36.210.11
<야! 이노무 자슥들아! 느그 같은 놈들 믿고 우째 전쟁을 하겠노?”
“우리나라에 진짜 전쟁이 나면 느그 같은 놈들이 부대로 복귀를 하겠나? ”
“전부 도망가 버리제! 얘이... 나쁜 자슥들!”
원산폭격 자세로 세워 놓고 군화발로 엉덩짝을 걷어차며 그는 흥분을 가라 않히지 못했다.
“이노무 자슥들! 나라 잡아먹을 놈들이여! 에이! 나쁜 놈들...”>

: 나는 이런 이야기조차 듣고 자라지 않는 요즘의 청년들에 대해 우려하는 마음이 있어요. 내가 독재 정권에 철저히 길들여진 학습을 받으며 살아와서 그럴까요? 군대가는 것이 정말 시간 낭비에 그치지 않을까요?

며칠 전 대학 졸업반 조카와 식사를 했는데 입에 붙은 말이 시간이 아깝고 시간이 없다는 말 이었어요. 그 아인 영어를 잘해서 비교적 편하게 군대생활을 했지요. 우리가 과연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만을 하며 살겠다는 이기심으로 그렇게 종종거리며 사는 이유와 모든 것을 자신 위주로 취하여 살려 하면서 배려와 다른 입장에 대해서는 엿이나 바꿔 버린 양 치부하며 살아가는 일상과 양상에 대해 이따금씩 무지 갑갑한 감이 들곤 해요.

우리 살아온 시간들 다 무용지물이었을까요? 지금의 방식들이 다 옳기만 한 걸까요? 우리의 정권은 언제까지 이분법 적 잣대로 나뉘어서 반대를 위한 반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성토하고 비난하며 그 속에서 국민들은 살아나가야 하고 또 언제가 되어야 온 국민이 열망하는 우리의 국권과 국력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하나같이 제 입장에서만 떠들어대는 난국을 언제쯤이면 이 시끄러움에서 해방되어 한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그래서 되돌아 갈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게 역사다.
우리가 지난 역사에서 그 ‘뜻’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있다.
우리는 앞으로 제대로 된 역사를 살고자 한다.>

: 형아의 이 대목에 저의 개인적인 일상이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만약에 ...했더라면 이라는 망상을 버려야 하겠다는 것, 그 보다 현실을 좀 더 직시하며 살아야겠다고 하는 생각에 일침을 놓아주시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원숙함과 함께 은근한 힘이 있어 전 좋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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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6.03 16:13:19 *.122.143.151

'국난극복기장'이라..
그런게 있었군여.. 첨 들어봐여.. 신기신기..
6월 오프모임 때 멋지게 차고 오심 어떨까여? 함 보고싶어여. ㅋ
흘러가는 역사 속에,
개인의 역사들이 같이 버무려 얽혀져 있군여..
그래요, 어찌되었던 역사는 흘러가고,
우리는 오늘도 그 역사에 맞추어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는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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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4 01:19:16 *.41.62.236

저는 나중에 명동성당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실상을 알았지요.

'국난 극복기장이라
오장동 냉면 한그릇 오라버니께 대접 할 터이니
저 좀 보실래요. ^!~
후일담이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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