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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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몇 정거장 일찍 버스에서 내려 걸으면 스쳐 지나가던 풍경들이 천천히 다가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거리의 냄새를 맡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들여다보고, 가게 진열장을 구경합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먼 곳도 쉽게 갈 수 있게 되었지만, 오직 자기 발로 걸을 때에만 세상의 알몸을 만나게 됩니다. 길 위에 서면, 평소에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발이 새로움 앞으로 걸어갑니다.
걷기에는 비싼
자동차도, 두둑한 지갑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운동화와 가벼운 짐입니다. 차창 밖을 바라보다 마음에 드는 곳이 나오면 걷습니다. 저는 이것을 도시탐험이라고 부릅니다.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느슨한 목적지만 있어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입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골목을 아무 생각없이 들어갑니다. 담벼락을 따라
흐르는 꽃나무를 구경하다 지나가는 길고양이가 걸어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봅니다. 막다른 길이어도 괜찮습니다. 얽혀 있는 다른 골목을 탐험하면 되니까요.
걷기
편한 길이 나오면 그대로 잠시 즐깁니다. 한 발, 한 발
자신 안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러면 생각들이 뭉게 구름처럼 머릿속을 떠다닙니다. 구름의 모양을 살펴보듯 하나하나 눈여겨봅니다. 하루 종일 괴롭히던
고민들이 멀어지면서, 멀리서 그것을 여러 각도로 바라봅니다. 거리가
생기면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좋은 해결방법이 떠오릅니다. 걸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들은 그래서 산뜻합니다. 감각 기관뿐 아니라
발도 힘을 합치니 아주 든든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풀어놓기 좋은 길을 몇 개 알고 있습니다. 동네 골목길,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산길, 광화문 사거리, 윤중로, 계동, 잠실나루역 근방, 합정
절두산 공원 등 서울에는 산책을 위한 길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저는 자라왔습니다. 길을 걸으며 생각과 길을 바느질하듯 몇몇 장소는 당시의 생각과 강력하게 연결돼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감정과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수년 전, 제 첫째 조카는 서울아산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일이라 업무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전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지하철역에서 내려 아산병원까지 십여분을 걸으면서 한 걸음씩 조카를 만날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클라이맥스를 향해가는 영화처럼, 약간 느리게 흘러가는 그 시간동안
좋은 이모가 되겠다는 다짐을 마음 속에서 몇 번이고 했습니다. 아직도 잠실나루역에 가면 그 때의 마음이
되살아납니다.
그렇다면
즐겨 걸었던 장소들을 모으면 저의 성장 지도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컨셉을 한번 실현해보자는
생각으로 친구 하나와 서울에 얽힌 추억들을 같이 모으고 있습니다. 이제 이 기억들을 이어 붙이면 나만의, 아주 사적인 지도가 됩니다. 지도의 개인화 작업이지요. 작업을 하다 보니 오랜 시간 걷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달라진 나의 모습도 언뜻언뜻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작업은 예전보다 성장한 나를 생각해보는 기회 또한 되어줍니다.
도시탐험은 하나의
긴 호흡이라기 보단 틈날 때 하는 짧은 호흡에 더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걷기의 즐거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으니 틈날 때마다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인간의 인생처럼 긴 길을
오랜 시간을 들여 걸어보고 싶습니다. 아마 그때에는 길을 떠나기 전의 저는 제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길 위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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