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182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겨울 들판을 거닐며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_ 허영만 시집, 『비 잠시 그친 뒤』, 문학과지성사, 1999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04 | [리멤버 구사부] 나는 사는 듯싶게 살고 싶었다 | 정야 | 2021.04.26 | 1591 |
203 | [시인은 말한다] 밀생 / 박정대 | 정야 | 2021.04.19 | 1713 |
202 | [리멤버 구사부] 자연의 설득 방법 | 정야 | 2021.04.12 | 1517 |
201 | [시인은 말한다]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 정야 | 2021.04.05 | 1822 |
200 | [리멤버 구사부] 매력적인 미래풍광 | 정야 | 2021.03.29 | 1500 |
199 | [시인은 말한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 정야 | 2021.03.22 | 1823 |
198 | [리멤버 구사부] 불멸한 사랑 | 정야 | 2021.03.15 | 1588 |
197 | [시인은 말한다] 간절 / 이재무 | 정야 | 2021.03.08 | 1869 |
196 | [리멤버 구사부] 실천의 재구성 | 정야 | 2021.03.02 | 1710 |
195 | [시인은 말한다] 동질(同質) / 조은 | 정야 | 2021.02.22 | 1789 |
194 | [리멤버 구사부]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될 때, 몇 가지 충고 | 정야 | 2021.02.15 | 1582 |
193 | [시인은 말한다] 나는 새록새록 / 박순원 | 정야 | 2021.02.08 | 1751 |
192 | [리멤버 구사부] 일이 삶이 될때 | 정야 | 2021.02.01 | 1598 |
» | [시인은 말한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 정야 | 2021.01.25 | 1829 |
190 | [리멤버 구사부] 카르페 디엠(Carpe diem) | 정야 | 2021.01.18 | 1508 |
189 | [시인은 말한다] 눈 오는 지도 / 윤동주 | 정야 | 2021.01.11 | 1597 |
188 | [리멤버 구사부] 나를 혁명하자 | 정야 | 2021.01.04 | 1860 |
187 | [시인은 말한다] 픔 / 김은지 | 정야 | 2020.12.28 | 2288 |
186 | [리멤버 구사부]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 정야 | 2020.12.21 | 1793 |
185 | [시인은 말한다] 잎 . 눈[雪] . 바람 속에서 / 기형도 | 정야 | 2020.12.14 | 17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