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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11일 10시 10분 등록

요즘 세상은 정신없이 바뀐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과 제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신기술, 새로운 용어, 신제품 정보들... 쏟아지는 정보 중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선별하는 것도 만만치 않고, 꼭 필요한 것들만 골라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렇게 습득된 지식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의사결정을 한다. 제대로 한 의사결정은 이익을 보게 하고, 잘못되면 큰 손해를 보기도 한다. 남들이 많이 경험해 보지 않은 최신기술 도입에 관한 결정을 할 때는 특히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High Risk, High Return 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배워야 할 것도 알아야 할 것도 많다. 그래서 우리 일상은 더 바빠진다.

IT 분야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난 정보기술 분야의 신기술, 신제품들을 접해 볼 기회가 많았다. SI(System Integration, 시스템 통합) 업체, 솔루션 업체, 네트워크 통신 업체 들은 수많은 세미나, 제품설명회를 통해 자신들의 신제품을 소개하며 적극적인 영업을 한다. 이런 데를 전부 쫓아다닐 수는 없다. 내게 꼭 필요한 부분만 찾아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모 SI 업체에서 개최한 CIO(Chief Information Officer) 포럼에 참석한 일이 있다. 그 회사에서 새로 만든 e-Biz(인터넷) 솔루션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첫 세션을 마치고 난 후 그 업체의 본부장이라는 사람이 인사말과 함께 포럼의 취지를 설명하고 질의응답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때 모 이동통신회사의 CIO라는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 회사는 1년 넘는 동안 수백억을 투자해서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했고, 얼마 전 그 시스템을 오픈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와서 들어보니 앞으로 e-Biz를 하지 않는 회사는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 회사는 시스템을 잘못 구축한 것입니까? 이제 막 오픈한 시스템을 e-Biz에 적합하도록 다 뜯어 고쳐야 되는 겁니까? 그리고 우리 시스템을 귀사에서 구축 했는데, 왜 2년 전에 이런 방향으로 구축하라고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우리 회사 CEO에게, 이제 환경이 바뀌어서 또 돈을 들여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고 말하면 난 바로 해고당하고 말겁니다.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답답함과 난감함이 배어나는 질문이었다.
그 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이 기술이 아직 안정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제안을 하지 못한 겁니다. 그리고 지금 오픈한 시스템을 다 뜯어고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귀사에서 인터넷 관련 사업이 필요한 부분에만 먼저 적용하고, 다른 부분은 시간을 두고 점차적으로 고쳐 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본부장의 답변은 궁색했다.

기업에서 흔히 IT부서를 ‘돈 잡아먹는 하마’ 라고 표현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과 제품이 나오고, 그것을 적용하지 않으면 다른 업체에 뒤질 것 같으니 새로운 시스템을 계속 구축해간다. 과연 언제까지 이렇게 따라가야 하는 건지, 이렇게 계속 신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잘하는 건지... 이것이 가속되는 변화 속에서 IT분야의 현장 실무자들이 갖는 고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행처럼 구축되는 전산 시스템이 많았다. 일반인들도 들어 봤을 법한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고객관계관리),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들이 대표적인 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기업에서 CRM 시스템을 구축했다. CRM을 설명할 때 흔히 ‘장바구니 분석’이란 예를 든다. 대형 할인점에서 장보는 사람들이 어떤 제품을 함께 구매하는 가를 분석해 봤더니 ‘아기 기저귀’와 ‘맥주’를 같이 산다는 분석이 나왔단다. 그 이유는 주말에 신혼부부들이 같이 장을 보러 와서 부인이 기저귀를 사는 동안 남편은 옆에서 맥주를 산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진열대 맥주 옆에 기저귀를 같이 놓았더니 매출이 증가했다는 말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CRM을 구축하면 일대일 ‘맞춤형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설명도 빠지지 않는다. 그 성공 예로 드는 것이 누구나 들었음직한 인터넷 서점 ‘아마존’이다. 신기술 도입을 검토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혹할만한 기술임에 틀림없다.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시스템들을 빨리 구축해서 아마존 닷컴 같은 회사를 많이 만들어 내면 좋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그 신기술이 대체로 과대포장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과대포장 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것을 판매하는 IT관련 업체이고, 그 업체들은 우리나라와 전산환경, 문화적 환경이 다른 외국의 성공 사례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신기술을 팔아먹는 것이다. 소비자인 기업은 CRM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어떤 환경이 필요한지, 그 시스템을 도입 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 등에 대한 치밀한 고민 없이 변화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영업하는 IT업체 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어설픈 컨설턴트의 말을 믿고 도입을 결정해 버린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CRM 시스템은 적게는 수십억, 많게는 수백억이 소요되는 시스템이다. 이렇게 급하게 구축된 시스템이 잘 활용되고 있을까? 물론 잘 활용되는 회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에 도입된 CRM의 경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아주 많았다. 우리나라에 CRM을 처음 도입했다는 모 CRM 전문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구축한 시스템 중 90퍼센트 이상이 실패한 시스템이란 자조적인 얘기를 한다.(물론 요즘은 많이 좋아진 것으로 알고 있다.)



신기술 도입하면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기상청 슈퍼컴퓨터이다. 10여 년 전 큰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우리나라에는 미국, 일본 등에 있는 슈퍼컴퓨터가 없어서 기상예측에 어려움이 있다는 말들이 언론에서 흘러나왔다. 결국 기상청에 슈퍼컴퓨터가 도입됐고, 앞으로 예보의 정확성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얼마 후 또 재해가 발생했고 언론에서는 다시 문제점을 보도했다. 슈퍼컴퓨터를 도입하기는 했지만 잘 활용되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었다. 예보의 정확성을 높이려면 수년간 충분한 데이터가 쌓이고 이를 분석할만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이 소프트웨어가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몇 년간 데이터를 더 쌓고, 그 데이터를 이용해 정교한 기상예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된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흘렀다. 데이터를 축적하고 정교한 기상예측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음직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재해에 대한 예보는 또 빗나갔고 이번에 나온 분석기사는 이랬다. 기상청에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었다. 데이터를 분석하고 기상예측 프로그램을 돌리려면 전문가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경력 3년에서 5년차 정도의 초급 또는 중급 직원이 그 업무를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순환보직으로 다른 업무를 담당한단다. 그래서 전문가가 만들어 질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인사제도의 문제였다. 왜 수퍼컴퓨터 도입 초기부터 이런 준비를 하지 못했을까?

요즘은 기상 이변 현상으로 예측이 어려운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위 사례에서 말하고 싶은 점은 신기술이란 것이 적용 돼서 효과를 발휘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단계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신기술이 도입되면 당장 무엇이 좋아지고 우리 생활이 바뀔 수 있다는, 신기술에 대해 과장된 설명을 우리가 너무 쉽게 믿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슈퍼컴퓨터를 도입해도 H/W 도입만으론 아무것도 안 된다. 예측력이 높은 S/W를 개발해야 하고, 무엇보다 이런 역할을 할 전문가가 키워져야 한다. CRM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서 CRM의 경우는 이 시스템이 활용될 우리사회의 문화적 현상까지 고려가 돼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 문화를 갖고 급하게 일을 해나가지만 결국 실속을 차리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 얘기다.

과대포장 된 신기술의 또 다른 예는 황우석 박사 사건이다. 이 사례는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니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엘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를 읽으면서 이 책에 나오는 신기술의 내용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개인 생활에, 우리 업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만한 신기술이나 변화는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그 신기술이 그리 빨리 변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얘기는 변화를 강조해서 상품을 팔아먹는 업체가 하는 얘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과장된 선전에 혹해서 너무 급하게 결과를 만들려다 우리는 많은 실수를 경험했다. 이제는 신기술이나 변화를 너무 과장하지 않는 신뢰를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각 개인들은 신기술이나 변화에 대해 조급해하지 않는 생활의 지혜를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점점 더 복잡해진다. 이건 분명 사실이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내가 혹시 변화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한번쯤 자문해 볼 일이다. 내 생활에서, 내 업무에서 나를 복잡하게 만드는 변화가 무엇인지 한번 찬찬히 살펴볼 일이다. 그리고 이 변화가, 이 정보가 내게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별 관계가 없는 것인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난 TV와 신문을 끊었다. 매일 습관적으로 보던 TV뉴스, 신문을 안보니 처음엔 좀 이상한 듯하더니 요즘은 참 마음이 편하다. 내가 뉴스를 안본다고 해서 업무하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없다. 직장일과 관련된 뉴스는 회사에서 스크랩핑 해서 제공되는 뉴스를 보면 된다. 별 필요 없는 짓을 수십년 동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인냥 습관적으로 반복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뉴스나 신문을 보지 않으니 내 생활이 많이 단순해지는 걸 느낀다. 우린 자신과 별 상관도 없는 일들을 수도 없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그걸 주제로 얘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아도 생각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얘기들인데 말이다. 그런 불필요한 일부터 줄이면 좀 덜 복잡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엘빈 토플러는 그의 최근 저서 “부의 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민첩성(agility)은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전략이 없는 민첩성은 상황에 대한 조건반사에 불과하다. 그것은 당면한 문제에 있어서 어떤 개인이나 기업, 국가를 다른 사람, 기업, 국가의 전략에 종속시키게 한다. 혹은 단순한 운에 종속시킨다.”

변화는 분명히 진행되고 있고 다가온다. 그렇다고 너무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큰 그림을 이해하고 변화에 차근차근 대처하면 된다. 너무 호들갑을 떨다 보면 불필요한 행동이 많아지고 필요 이상의 비용을 치루 게 된다. 우리는 이미 이런 개인적 또는 사회적 비용을 많이 치루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좀 바뀔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변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말이 혹시 과대포장된 건 아닌지, 이 변화가 당장 내게 필요한 변화인지를 차분히 따져보고 상황에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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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8.11 11:46:09 *.36.210.157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을 해보게 하는 글이네요. 정산 형아 다운 냄새가 물씬 풍기기도 하고요.

최근의 경제상황에 대해 조지 소로스는 현재의 금융적 위기가 대공황 때처럼 장기화될 조짐을 보인다고 책을 내놓았고, 그의 견해는 사실 두 번 이나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이 주목을 받는 것은 미리 그러한 상황들을 예측하고 대비하게 함으로써 더 나은 모색으로 치환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변화에만 초점을 두고 급급하게 쫓다가 정작은 현실감을 상실하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경계하게 되는 문제점도 되새겨 보게 됩니다.

차분한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이중적 시선과 보편적인 균형감을 갖추기 또한 쉽지 않아 이 여름 이렇게 고심들 하며 진땀을 흘리나 봅니다.

형아가 쓰고 싶었던 글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군요. 특유의 관점도 잘 나타나 보이고요.

연구원 하면서 오히려 신문이나 뉴스의 집착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거, 아예 그 좋은 연속극을 볼 틈도 없더라는 거, 우리 연구소 연구원들 만의 특징 아닐까요.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는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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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1 22:21:49 *.123.204.118
형님, 담배를 먼저 끊어야 되는거 아닌가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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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트(IT)양
2008.08.12 09:59:30 *.122.143.151
앨빈 삼촌이 정산형에게 좋은 영감을 준 것인지,
원래 이렇게 침을 튀기듯 강력한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글의 흐름과 연결,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까지
공감과 어우러져 잘 전달됩네다..
긴 글임에도 불구하고 잘 읽혀지는 거 보면 틀림없슴다.^^;
글쿠 위 창형님~! 정산형님과 같이 끊으심 어떨까여?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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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8.12 10:59:41 *.244.220.254
글쓰기가 일취월장 하고 계십니다. 형님~
특히 IT분야와 연금제도에 대해 전문성이 깊어 지시는 것 같아요^^

* 추신 : 이트(IT)양~ 넌 누구냐? 혹시 배아복제에 성공했다는 유산균 먹는 그 양? ㅎㅎㅎ 반말을 용서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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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8.12 11:09:07 *.127.99.61
긴 글인데도 잘 읽힙니다.
이글 읽으니 우리는 참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일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면서 생각이 아웃풋, 변화에 대한 갈망은 비슷하다니...
그것이 human being (not doing) 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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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2 21:41:25 *.228.146.136

누구나 십년 정도 일하면, 전문가이려니. 정산 헝아님. 써니 선배버전. 일내겠어요. 전문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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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2 21:41:25 *.228.146.136

누구나 십년 정도 일하면, 전문가이려니. 정산 헝아님. 써니 선배버전. 일내겠어요. 전문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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