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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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든 그것을 평생 죽을 때까지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인연이다.
세월과 함께 그 일을 더 잘하게 되고, 그 일을 골수를 얻게 되면
그 일이 곧 내 삶의 정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은
한 직업인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그들은 그저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들은 세월에 인생을 더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세월과 함께 더 깊은 세계를 가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프로다.
한 분야에 통달하게 될 때,
인생의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그 기본적 묘리를 미루어 터득해간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거기에는 잡다한 것을 제쳐두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우주적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엇으로 당신의 길을 갈 것인가?
무엇으로 우주적 공감이 이루어지는 깊은 곳에 다다를 것인가?
구본형의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중에서
평생직업’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질 만큼 사회구조가 변화무쌍해진 요즘,
일단 되면 죽을 때까지 현역에서 뛸 수 있는 평~~~생 직업이 남아 있습니다.
혹하시나요?
그렇습니다.
정답은 바로 ‘엄마’
(‘아빠’들의 간곡한 청원에 의해 ‘엄마’라고 쓰고 ‘부모’라고 읽도록 하겠습니다. ^^)
엄마가 무슨 직업이냐고요?
저도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그랬으니 풀타임 직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간 크게 아무 대책도 없이 아이를 낳을 엄두를 낸 거겠지요?
출산준비물 세트를 완비하는 걸로 아이를 맞을 준비가 다 끝나는 줄만 알았으니
제 무지의 레벨은 더 이상 말이 필요없을 듯 하죠?
세계적인 경영의 구루 피터 드러커는 저서 <성과를 향한 도전>에서
목표를 달성하는 최고경영자는 「불가능한 직무」,
즉 그저 정상적인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직무가 등장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 직무는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인간에게는 보기 드문
다양한 기질들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인간은 노력에 의해
매우 다양한 종류의 지식과 고도의 갖가지 기술들을 획득할 수 있지만,
누구도 자신의 기질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갖가지 특수한 기질들을 요구하는 직무는「수행할 수 없는 직무」,
즉 「사람을 죽이는 직무」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피터드러커는 대표적인 「사람을 죽이는 직무」로 규모가 큰 미국 대학의 총장,
대규모 다국적 기업의 해외담당 부사장, 주요 강대국 대사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활동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그런 일을 모두 관리하다 보면,
정작 자신의 제1업무에 쓸 시간이 없고
흥미마저도 잃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합니다.
결국 6개월 또는 1년 후,
그 직무를 맡은 사람들은 실패자라는 낙인과 함께 그 직무를 떠나게 되며
이 자리를 물정 모르는 예비 실패자가 채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는 이 어이없는 불합리를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은
직무를 재설계하는 것뿐이라고 단언합니다.
이 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않고 성과를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그 직무들이 제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엄마’라는 직무만 할까요?
거액의 연봉과 사회적 인정, 뭐 이런 이야기는 다 그만두더라도
결정적으로 ‘엄마’는 일단 되고 나면 죽기 전에는,
아니 죽어서도 절대로 그만 둘 수 없는 종신직이기 때문입니다.
‘당나귀를 팔러 가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제목의 우화 들어보셨나요?
선녀와 나무꾼, 콩쥐밭쥐만 큼이나 익숙한 이야기일 겁니다.
제게도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엄마가 되고 다시 만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물론 깜짝 놀라 얼른 눈물을 훔치고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이가 잠든 후 다시 나와 펴들고 혼자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면되는 거냐고!
좋은 엄마는 바라지도 않아!!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나쁜 엄마를 면할 수 있는 거냐고!!!
듣기만 해도 갑갑하시다구요?
과거 어느 시절의 당신을 보는 듯해 짠하고 안타까우시다구요?
그렇더라구요.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 모든 당혹이 억세게도 무능하고 불행한 제게만 주어진 시련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육아의 목표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디서 또는 언제 그것을 할 것인가?
이 답 없는 질문에 대한 저마다의 답안을 만들어가는 것이
제 부모님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부모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그렇게 스스로 찾아낸 답을
소위 ‘육아철학’이라고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루하루 주어진 일들을 처리하기만도 벅찬 부모의 삶 속에서
‘철학’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게 여겨질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살면 살수록 절감합니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육아철학’ 없이는 주위에 휘둘리며 우왕좌왕하다
결국은 당나귀마저 잃게 된 아버지의 오류를 되풀이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것을요.
그렇게 부모로서 17년을 살면서
개인적으로 부모라는 직무의 제1업무가
‘육아철학’을 가다듬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자칫 「사람을 죽이는 직무」가 되기 쉬운 부모 역할을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재설계할 때도
육아철학은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 중에 하나라는 것을
체험으로 납득하게 되었거든요.
알겠고 다 알겠는데 도대체 그걸 어떻게 하면 되느냐구요?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는 일상에 듣기만 해도 가슴이 턱 막히는 미션을
더 추가할 엄두가 안 나신다구요?
저도 그랬습니다.
저의 경우는 너무나 절실해서 일상을 이루는 기본적인 것들마저도 허물어가면서
'육아철학'이라는 막막한 목표를 추구했더랬지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니 엄청 당연하게도 핵심 중의 핵심을 그리 치열하게 추구했는도
삶이 위태롭기는 그 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더라구요.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처음에 방향을 틀었을 때는
오랫동안 한 쪽으로 쏠렸던 것이 균형을 찾으면서 굉장한 충족감이 찾아오더니
그 균형추가 반대편으로 기울어가면서 다시 휘청거리기 시작하더라구요.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어쩌겠습니까?
반대편 끝에 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방향을 튼 것이니
끝까지 가보는 수 밖에요.
그러다 알게 되었습니다.
'철학'을 세워가는 것이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과 정확히 같은 활동이라는 것을요.
일상과 유리된 철학은 말 그대로 모래 위의 성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다시 말해 나만의 철학은 나만의 일상에서 다져 집니다.
내 몸을 살리고, 공간을 살리고, 관계를 살리고, 돈을 살리고
그 모든 살림의 기본토대가 되는 존재를 살리는
엄마로서의 의무들.
아니 엄마 뿐만 아니라 생활인이면 누구나 피해갈 수 없지만,
어느 누구 하나 정확히 같을 수 없는 고유하고 유일한 일상을 챙겨가는 과정에서
삶의 기반이 되는 '철학'은 자연스럽게 완성됩니다.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는 잡일로만 여기던 살림이
새롭게 느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저는 이제 기꺼이 '살림을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살림을 통해 얻게 된 수없이 작은 깨달음으로 남은 삶을 채워가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