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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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결말에 대한 강력한 스포가 있습니다.
어제저녁 비가 그치고 있길래 우비를 입고 한강에 나가 걷고 왔습니다. 보슬비를 맞으며 바람에 맞서 걸으려니 조금 춥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웅덩이가 곳곳에 생긴 한강 둔치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평소의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어둡고 조용해서 약간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목표 운동량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더 이상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여름이 지나가나 봅니다.
돌이켜보면 영원할 것 같은 것도 어느새 지나갑니다. 그것이 좋은 시절이든 고통스러운 순간이든 불현듯 찾아와서는 깨닫고 보면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순간이든 그 안에 있을 때의 감상과 기억을 붙잡아 놓는 것이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겠구나 싶습니다. 한 번 지나가 버리면 다시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만나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고전이 되어버린 책을 이제 와서 다시 읽는 것도 그래서 의미 있다 생각합니다. 지나간 시대의 기억, 특히 시대의 규범에 따른 한계와 희망 사항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최근에 완독한 <앵무새 죽이기>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워낙 유명한 책이니만큼 중학생 때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때는 아직 행간의 내용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어려웠습니다. 스카웃이라는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도 제약이 있었고, 등장인물들의 행동 속에 숨어있는 이유를 여중생이 모두 알아채기에는 미성숙했다고 생각합니다.
영미문학 특성상 뚜렷한 인물들과 시대상이 재미있어서 푹 빠져들어 읽었습니다. 여러 에피소드 사이마다 캐릭터와 갈등의 전조가 담겨있었고, 지금에야 당연한 것들이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으며 그중에는 인종차별이 있었습니다. (※ 주의! 아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술자 스카웃의 아빠인 애티커스 핀치가 법정에서 흑인인 톰 로빈슨을 변호하는 장면은 단연 이야기의 압권입니다. 가난한 백인 집안(유얼 가문)의 장녀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톰 로빈슨을 해치려는 것을 (당시 앨라배마에서 강간은 사형이었다고 합니다) 애티커스 핀치가 저지하려는 변론은 비록 유죄로 끝났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공유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실제로 판결 이후 애초에 나빴던 유얼 가문에 대한 평판은 땅에 떨어졌고, 밥 유얼은 이런 상황에 분개하며 재판을 진행했던 테일러 판사, 톰 로빈슨의 변호사인 애티커스 핀치, 그리고 톰 로빈슨을 사적으로 복수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특히 애티커스 핀치의 두 아이들인 제레미와 진 루이스를 깜깜한 밤길에서 해치려 하는데 그때 마을의 은둔자인 아서 에 들 리가 개입하여 밥 유얼은 자신이 들고 있던 부엌칼에 찔려 죽습니다.
매우 유명한 책이라 결말을 다 쓰긴 했는데, 저는 결말을 모르고 봐서 갑자기 사건이 훅 터져버린 마지막 몇 챕터는 바쁘게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말을 읽고 났을 때 왜 이 책을 이제서야 읽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습니다. 분명 제목에 비해서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향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밥 유얼이 무력한 어린아이들을 죽이려고까지 들 줄은 몰랐거든요. 그것도 명백한 자기 딸의 잘못을 덮기 위한 보복으로 그런 선택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나 봤던 악인들을 실제로 맞닥뜨렸을 때의 기분이랄까요. 이런 충격을 더하기 위해 이 책의 서술자가 진 루이스 핀치라는 어린 소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참 노련하게 잘 쓴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은 그 안에 방향성이 있습니다. 사건을 다룰 때에도 이 방향성을 잃지 않고 가져가며 그 방향성이 현시대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좌절되고 있는 경우로, 주인공과 사건을 통해 이를 해소해 보며 대리만족을 주기도 합니다. <앵무새 죽이기>는 이런 목적에 딱 걸맞은 소설로 보이며 특히 결말까지 보고 났을 때의 충격과 진행이 무엇보다 소설적 완결성도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직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록을 통해 현재를 보고, 한계와 그 너머를 그려보는 것은 비단 시대의 문제만 해당사항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꾸준한 기록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부터 어떤 것이든 하나씩 기록을 해나가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예쁜 다이어리를 사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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