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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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단어장]
진눈깨비 흩날리는
어렸을 적 나는 눈에 굶주려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고개를 잔뜩 뒤로 젖히고 받아먹어 본 적 있는가. 잿빛 하늘에서 땅으로 무섭게 몰려오다 내 머리에, 이마에, 손등에 내려앉을 때는 더없이 가볍던 눈송이. 달콤까지는 모르겠고 꽤나 간질거리던 그 느낌. 어린 날의 나에게 눈만큼이나 환희인 것은 없었다. 아련하게도 그때는 늘 눈이 내렸던 것만도 같다. 눈이 내릴 때면 하늘을 쳐다보고 눈이 그치면 하얗게 변한 환상 속에서 뛰놀던 것이 일상이었다. 어떤 아이들이라도 그러했겠지만.
요즈음 아이들은 눈오리 군단을 만들고 있지만 나는 언제나 눈사람이었다. 연탄재를 굴려 만든 눈사람. 동네는 집집마다 쌓인 연탄이 그득했다. 어디서 가져오든 전혀 줄어들지 않는 연탄재를 굴리고 굴린다. 길은 막힘이 없었기에 눈을 머금은 연탄재를 따라가다 허우적거리며 눈길에서 미끄럼을 탔다. 그런 재미들 속에서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고 만들었다. 참으로 전형적이게도 정말로 두르고 있던 목도리며 장갑을 눈사람에게 걸어놓기도 했다. 그랬던 겨울이었고, 늘 그렇게 눈은 가까이 있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남쪽으로 이사를 온 이후로 내 소원은 “눈 오는 날”이었다. 어릴 적엔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눈이 사라질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울이라면 당연히 눈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눈을 맞는 것이 소원이 되어야 했던 남쪽의 겨울은 허탈함을 가득 안겨주었고 빌어도 소용없음믈 매년 겪다보면 이루지 못하는 꿈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눈이 내린다는 예보에도 설렘도 없어진 지 너무 오래되었다. 눈사람도 눈싸움도 이미 행동으로 해본 지 오래고 무덤덤해지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어린 날의 내 마음에 겨울이면 내려와 주던 눈을 맞지 못해서 상처로 남았나, 아니면 너무나 오래된 눈의 외면에 감각을 잃은 건지도 모르겠다.
기억에 눈이 펑펑 내린 날이 있었다. 눈이 쌓이고 한참을 녹지 않았다. 그날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휴교였다. 눈이 조금 내렸을 뿐인데 도로는 마비되었고 세상은 난리가 났다. 몇 년에 한번씩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출퇴근길이 엉망이 되며 도로가 통제되었다. 뉴스는 늘 똑같았다. “폭설이 내려 도로가 통제가 되고……” 글쎄, 남쪽에 오기 전엔 그런 폭설이 자주 있었던 것 같은데, 마냥 기다리던 눈이 ‘폭설’이란 이름 아래 골칫덩어리처럼 취급되었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지하철이 없는 동네라서 도로 위의 혼잡은 늘 당연한 것이 되었던 건가. 그런 뉴스를 들으며 난 컸고 어느새 그저 별탈없이 출근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직장이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폭설은 1년에 한 번 정도도 일어날까 한 것 같은데 자주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2023년 11월 18일은 눈 내린 아침이었다. 창문을 열었다가 지붕 위에 엷게 쌓인 눈을 보았다. 새벽녘 곱게 내려앉았을 눈을 생각하며 저 멀리 산자락에 쌓인 눈, 음지에 녹지 않은 눈의 흔적 또한 새겨보았다. 동네 아이 누구도 눈오리를 만들지는 않았다. 물론, 폭설도 아니었다.
글쎄, ‘눈’은 아이에게 무언가를 자극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눈(雪)이 뭘까?
“눈(雪)은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이런 T적 대화법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이들에게도 마음을 간질이게 하는 무언가가, 분명.
강아지가 눈 오는 날을 좋아하는 것은 눈 때문이라고 들었다. 강아지는 색깔을 구분하지 못해 세상이 검은색과 흰색뿐이라던가. 그런 강아지들에게 흩날리는 하얀 눈은 경이롭게 보일 것도 같다. 그럼, 아이들에게는? 물론 더할 나위 없는 놀잇감이다.
내게 눈은 따스하다는 느낌이 있다. 어쩌면 눈 오는 날마다 마구 뛰어놀았으니 정말이지 더웠을지도 모른다. 눈 내리는 하늘을 마냥 쳐다보고 있던 그때의 아련함, 꿈꾸는 듯한 설렘, 세상을 뒤덮은 하이얀 눈이 너무나 깨끗해서 그 깨끗함에 대한 감탄과 숭고함 또한 깊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던 어린 날을 그리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눈이 쌓인다고 해서 뛰어놀 나는 더 이상 아니니까. 생각해보면 너무나 오래 그런 날은 시작되었다.
“이거 눈 맞는데요?”
그렇게 말한 건 직장 동료와 걸어가며 하던 말을 들은 남학생이 외치는 소리였다. 우리가 한 말은 별다른 건 없었다.
“이건 눈 아니지?”
그렇죠. 진눈깨비죠. 나는 그렇게 말했었나. 맨손으로 눈을 모으고 있던 아이는 놀라워하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손에는 우산이 있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는 늘 그렇듯 눈 따위는 내릴 일도 그러니 쌓일 날도 별로 없는 겨울왕국이었다. 이미 그런 겨울에 익숙한 나는 조금의 눈발이라도 날리면 마냥 좋아하던 아이를 지난 지 오랜 모양이었다. 조금씩 질척거리는 거리, 진눈깨비를 ‘비’로 인식하는 우리와 ‘눈’으로 인식하는 아이. 그 명확한 간극이 나를 씁쓸하게 했다. 20대였건만 내가 무심함으로 뭉쳐진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으니까. 진눈깨비에도 활짝 웃는 눈을 모으기 위해 뛰어다니는 아이의 뒷모습이 반짝였다. 이딴 건 눈도 아니라며 당장에 우산부터 찾는 내게서는 볼 수 없는 반짝임이었다.
나는 일찌감치 어른이 되었는지 모른다. 좀더 늦게까지 피터팬이었어도 좋았으련만, 세상을 향한 희망과 꿈, 낭만…… 그런 것들을 너무 일찍 놓아버린 것 같다. 삶이 팍팍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런 탓도 있는지도. 바닥에 닿지도 않는 눈송이가 흩날리면, 진눈깨비가 흩날리면 생각하곤 한다. 나는 너무 이르게 어른이 되었다고. 그러면서 변명한다. 세상이 자꾸 모든 아이들을 이르게 어른이 되도록 만들어 가고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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