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혜향
  • 조회 수 2871
  • 댓글 수 5
  • 추천 수 0
2010년 1월 4일 10시 41분 등록
서문 - 발품 팔고 손때 묻힌 집



나에게는 내가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는 여인이 있는데, 바로 나의 외할머니다.

외할머니는 양장을 입어도, 한복을 입어도, 값비싼 옷이 아닌데도 언제나 미리 준비하고 손수 손질해 두었다가 세련되고 고운 차림을 연출하는 진정한 멋을 아는 분이었다. 돈을 들여 비싼 옷을 사는 게 아니라 있는 옷을 가지고 이리저리 수선해서 입고, 간단한 바느질 하나로 손가방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고, 뜨개질 솜씨며, 바느질 솜씨며, 음식 솜씨며, 손재주가 남다른 분이었다.


외할머니가 엄마의 뜨개 옷을 풀어 떠 주신 꽃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과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고, 한살 아래 여동생과 나는 외할머니가 손질해 놓으신 빳빳하게 풀 먹여 한땀한땀 시침질한 요 호청 위에 누워, 짜찌 원단을 모아 하나하나 정성스레 이어붙여 만든 조각이불을 함께 덮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귀여운 추억을 만들고 따뜻한 꿈을 꾸었다. 새끼도넛모양의 동그랑땡 과자, 봉그랗게 배가 오른 노오란 빛깔의 색이 고운 오무라이스, 맛과 모양이 정말 예술이었던 타래과까지 음식점에서 먹어본 음식도 한번에 그럴듯하게 개발해내는 외할머니의 눈과 손이 만들어낸 흔적은 모두가 최고였다.


외할머니가 무언가를 만드실 때면 나는 외할머니 옆에서 뒤에서 졸졸 따라다니며 (외할머니의 표현에 의하면) 코를 박고 무얼 만드는지, 어떻게 만드는지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 만져 보고 부지런히 심부름도 했다. 


참한 외모와는 달리 털털한 성격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엄마는 내가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네가 아무래도 외할머니를 닮았나보다, 엄마(외할머니)가 이 모습을 보면 당신을 닮았다며 참 좋아하셨을 텐데.. 하시며 외할머니를 추억하곤 하신다.


센스 있는 눈썰미, 꼼꼼한 손맵씨가 남달랐던 외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영향일까. 그래서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눈에 먼저 담고, 눈으로 배운 것을 손으로 만지고, 잘 다듬어서, 예쁘게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어릴 적 살았던 주택의 안방 벽장 속 다락방, 낮이나 밤이나, 어둠 속에 손을 뻗어 켜야만 하는 동그란 전구 하나에 의지해, 온갖 잡동사니들로 그득했던 볼품없고 좁디좁은 그곳에 올라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그 안에 있던 쓰고 남은 벽지를 가지고 상자각도 만들고, 종이접기도 하고, 종이인형 옷도 만들어 입히고, 항상 무언가를 손으로 꼼지락꼼지락 만들었던 기억이 내게는 남아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짝꿍의 필통 속에 길쭉하고 시원스럽게 깎인 연필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모습에 눈이 꽂혀 고사리 손으로 연필 깎는 연습을 하다가 손이 크게 베어 그때 꿰맨 자국이 아직까지 남아있고 침대를 쓰지 않던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줄과 올을 맞추어 옷장에 차곡차곡 예쁘게 개켜 올려야 했던 이불, 요 때문에, 함께 방을 썼던 탓에 몇 번이고 손 맞춰 잡아주어야 했던 전형적인 O형 기질을 지닌 여동생의 고통이 누구보다 컸음을 나는 알고 있다. 


중학생이 되면서 내 방, 내 맘대로 꾸밀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가지게 되었을 때의 그 감격이란... 책상의 위치를 혼자서 낑낑대며 이리저리 수시로 바꾸는 것은 물론, 책장에 꽂혀있는 책도 어느 날은 키높이에 맞춰, 또 어느 날은 색깔별로 분리하고, 혼자서 옮길 수 없는 옷장과 침대는 식구들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기어코 원하는 자리에 놓이게 했다. 물론 힘은 들었지만 아, 그때의 뿌듯함이란.. 가구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침대 위에 보라색 쿠션이 하나 얹어지고 소라빛 땡땡이 도트 문양의 커튼이 달리고 나의 방 곳곳을 깨끗이 쓸고 닦으면 나의 마음도 반짝반짝 윤이 나고 정말 공부를 잘 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언제나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우리 가족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인테리어 공사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이사를 하게 되면 모를까 언제 또 다시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만큼 여기저기 다니면서 잘 알아보고 제대로 꾸며 보자고 엄마에게 당부에 당부를 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집안 곳곳을 둘러싼 답답한 몰딩, 조명 박스 때문에 거실 천장은 더 낮아 보이고 가구와의 조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체리색 마루 바닥과 촉감이 거친 벽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집에 대한 취향이 그리 뚜렷하지 않았던 엄마는 전문가의 눈썰미와 감각에 대한 믿음, 한번 결정하면 그대로 밀어붙이고 마는 화통한 성격, 거기에 딸의 시험기간이라는 배려가 더해져 이도저도 아닌 분위기, 서로 다른 재료, 어울리지 않는 칼라들이 전혀 조화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한 날 밤 나는 거실과 주방 사이를 연결하는 복도에 털썩 주저앉아 너무나 안타깝고 속이 상해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 후로 엄마에게 두고두고 타박을 했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방에 전과 같이 공을 들이지 않았으며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리모델링 공사를 하게 되면서 이번만은 절대 그때의 악몽을 되살려서는 안 된다는 가족의 바람이 그대로 반영되어 여러 곳에 발품을 팔아 어느 정도 흡족함을 얻은 후에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집에 대한 나의 애정도 다시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릴 적의 나는 사소한 것 하나도 뭐든 내 성에 찰 때까지 연습하고, 예쁘지 않으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못 견뎌하는 좀 극성맞은 데가 있는 딸이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자라면서 어른이 되어서까지 그렇게 유난을 떨었으니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게 다 나의 운명이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때만 해도 난 내가 집을 꾸미는 일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학교에서 염색과 직물 디자인을 공부했다. 유행에 민감한 어패럴 분야보다는 스케일이 크고, 차분하며 안정감 있는 칼라 때문인지 인테리어 직물 분야에 더 끌렸고 그 후, 직장에서 원단과 침구류를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일을 시작으로 조금씩 범위를 넓혀 지금은 ‘홈드레싱’ 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일을 하고 있다.     


“우리 집은 몇 평인데 요즘 인테리어 비용이 얼마나 들어요?”

“얼마 전 아침프로에 나온 유명연예인 집 있잖아요. 그 집이랑 똑같이 해주면 좋겠는데요.”

“전문가니까, 알아서 해주세요.”


독립하여 숍을 운영한지가 어느새 7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런 고객을 대할 때면 사실 나는 화부터 난다.


집주인이 자신의 공간, 집에 대한 애착이 없으면 작업을 의뢰받는 디자이너 역시 그 공간을 사랑하기 힘들다. “난 이 분야는 잘 모르니, 전문가니까 알아서 근사하게 해주세요.” 하는 고객과 “예산은 이 정도이지만 이런 컨셉, 이런 스타일의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하는 고객이 있다면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후자의 고객을 선택하거나 후자의 고객에게 더 열정을 다할 것이다. 그만큼 공간, 집에 대한 주인의 관심과 애착, 취향은 중요하다.


집에 대한 관심, 애정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상담 때부터 많은 차이가 난다. 크지 않은 평수라도, 작은 공간이라도 집주인의 취향과 개성이 드러나면 얼마든지 훌륭한 공간이 될 수 있는데 아무리 전문가라도 그걸 처음부터 찾아내서 만들어주기는 어렵다. 자신이 원하는 정확한 컨셉을 말해주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취향이란 게 딱히 없어도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변화시키고 싶은지 만은 분명해야 한다.


잡지를 보다가 신문을 보다가 예뻐서 오려둔 사진이나 그림, 가족의 추억이 담긴 물건,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오면 디자이너는 물론 의뢰하는 고객에게도 그것이 정말 큰 도움이 된다.


지금 서점에는 ‘누구씨의 무슨 스타일북‘같은 비주얼북이나 ’5분만에 뚝딱 완성하는 인테리어‘ ’수납의 기술‘ 같은 실용서가 대부분인 것이 현실이다. 그대로 똑같이 따라하지 않으면 멋지게 보이지도 않고, 웬만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막상 그들과 다른 여건, 즉 나의 현실에서는 이것저것 의문이 생겨 헤매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집에 대한 생각, 인테리어, 공간 데코레이션에 관한 지식과 정보들이 너무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의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은 집이라는 공간이 나를 대변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간을 꾸밀 때는 좀더 기본적인 지식과 사고방식, 이를 제대로 해석한 이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안목을 키우고 배우는 편이 그 사람다운 집을 꾸미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그 후에 스타일북이나 실용서를 본다면 확실한 참고가 될 텐데... 언제나 아쉬움으로 남았다.   


어쩌면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실질적인 데코레이션 기법만을 얻길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전에 먼저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생각과 마음을 바꾸라고,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자고 말하고 싶다. 내가 공간을 꾸미는 일을 하면서 실수하고 성공하고 경험한 것들을 통해 집이라는 공간, 그리고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집이라는 공간에서 어떤 꿈을 꾸며 살게 될지, 그 생각과 마음에 대하여 함께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게 되는 독자가 자신의 집, 공간을 꾸미는 데 있어 관심과 애정을 바탕으로 스스로 안목과 감각을 키우고(생활의 발견, 생활 감각, 디자인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여기에 자신의 발품을 팔고 손때를 묻힌 정성을 더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공간,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공간, 자신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멋진 공간을 만나기를 바란다. 그들이 최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고 싶다.


IP *.143.134.217

프로필 이미지
부지깨이
2010.01.04 22:31:52 *.160.33.244

예쁘구나, 혜향은.
프로필 이미지
2010.01.05 10:03:55 *.40.227.17
사부님~ ^^

'불확아,  재미있구나.. 너 닮아서.. 좀 웃긴다.. ㅋ'
말씀.. 들을 수 있도록.. 여기에.. 깊이.. 더하도록.. 더..더. 더.. 노력할께여.. ^^
근데여.. 사부님.. '얘가.. 이번에는.. 재미에 꽂혔네..ㅉ' 하고 계시져.. 헤헤^^ 

글구.. 사부님.. '부지깨이'..
음.. 흠.. 설마.. 추늬언니.. 따라쟁이? 뽕공주의 삘? 향? 때문인가여..
좀.. 재밌어여.. ^^ 

사부님~, 오늘도.. 존경해여~~~ ^O^
프로필 이미지
정야
2010.01.05 00:42:59 *.12.20.43
향아. 너의 향이 그대로 묻어난다. 흠~~  향 좋다~ ㅎㅎ 이런게 서문이구나 싶다.^^
사부님의 짧지만 깊~~~~은 칭찬 앞에 감히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안되지만,(사부님 용서하소서-.-;;)짧은 견해를 말하자면 지난주 서문과 이번 서문을 붙이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너도 이미 생각하고 있겠지만.^^)
지난 주에는 앞이 짧고 뒤고 길고, 이번주는 앞이 길이 뒤고 짧은 느낌이 드니 둘을 합체하면 짱일 것 같다. 

향아, 깊다. 아주!^^ 
프로필 이미지
추늬
2010.01.05 18:57:17 *.12.20.43
푸헤헤..머리와 손가락이 따로 노는 이런 현상이.... 죽을 병은 아닌거지? 그런거지?? ㅠㅠㅠ
깊으니까 번역도 지대로 하는구나..크하하
프로필 이미지
2010.01.05 10:14:54 *.40.227.17
추늬 언니~ ^^

'지난 주에는 앞이 짧고 뒤고 길고, 이번주는 앞이 길이 뒤고 짧은 느낌이 드니..'
 이거이가?.. 무슨?.. 혹여.. '굴세안 바르레'에서는.. 원래.. 이케.. 쓰나여..  내가.. 몬살아여.. ㅋㅋㅋ

향이의 삘?로 번역하믄..
'지난 주에는.. 앞이 짧고 뒤가 길고, 이번주는 앞이 길고 뒤가 짧은 느낌이 드니.. ' 
맞져.. ㅋㅋㅋ

추늬 언니~, 향이 맘에.. 콕! 들어오는 견해.. 아니.. 삘!,  우짤 수 읍는..오타..ㅋ, 특히.. 깊다.. ㅂㄲㅂㄲ
무쟈게 땅큐~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