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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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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14일 00시 54분 등록

 ***

혹시나 해서 밝힘니당^^ 
제가 쓰고있는 글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사실과 차이가 있습니다. 
묘사를 생생하게 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사실처럼 ?!
쓰고 있으니 오해 없으시길 바람니다. 악역은 누구나 싫거든요... ^^
  
***

너는 나를 왜 죽이려 하느냐?

그것은 네가 강 건너 사람이기 때문이다.

                                                                       -팡세-
왜 그렇게 그를 미워하십니까?

그것은 그가 우리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분이 나뻐!...
.


 

어쩔 수 없는 사람

 

요즈음 협회 돌아가는 사정을 아세요?

글쎄 나는 알고 싶지 않다

그 인간이 부회장이 됐다는군요!

네 이놈!

선생님 죄송해요 하지만 너무 불공평해요 사람 하나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프잖아요!

인간사가 다 그렇지 않겠니?

그런 사람은 어떻게 죽지도 않아요 욕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말이 맞기는 맞나봐요

나쁜 짓을 하는데 벌 받기는커녕 부회장이 됐다니…”

~! 그만해라, 됐다.

 

오랜만에 시합장에 들렸을 때, 선수 생활을 마치고 코치를 하고 있던 00 가 말하는 것을 그는 막았다. 펜싱게임을 보러 온 것이지 협회의 복잡한 정치적인 갈등이나 사건을 알려고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합을 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내내 불편했다.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중국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羞惡之心人皆有之 (수오지심 인개유지) 

恨人恨不死(한인한불사)

望人望不窮 (망인망불궁) 

江山易改 稟性難移(강산이개 품성난이)

                                    -漢詩, 藝虎-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미워하면 그가 죽지 않는 것이 한스럽고

그리워한다면 그가 가난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강산은 쉽게 바뀔 수 있어도 사람의 품성은 바뀌기 어렵다.

 

30이 넘은 나이까지 선수생활을 했던 그는 잘 생긴 얼굴을 가진 멋있게 생긴 사람이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펜싱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며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유 있는 집안의 막내로 자란 그는 성품이 가볍고 욕심이 많고 시기와 질투심이 강했다. 늘 최고여야 하고 자신이 가장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최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강습회 때는 다른 코치나 선수들이 잘 모르는 펜싱용어와 심판용어를 번역한 노트를 들어 보이며 질문을 하여 자신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해야하고, 시합장에서 굵은 다리통을 내보이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빠르고 계속되는 연속적인 동작을 피스트(펜싱경기를 하는 규격무대 면으로 바닥에 전기가 흐르는 장치가 되어있다) 위를 열심히 오가며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 시선을 끌곤 했다. 한 때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하는 선수였으며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쩌다 국제시합을 나가는 그 시절에 그는 단골 국가 대표였다. 세계대회무대에서 예선 탈락하던 그 시절에 그가 눈 동냥하고 주워들은 것은 곧 정석이고 표본이었다. 하긴 그 시절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외국선수 시합하는 것을 본적도 없으니 그의 말이 곧 진실이었다.

그 때까지 전기검법* 을 잘 알지 못하던 전통적인 펜싱을 배웠던 한국 펜싱 일 세대들은 기술적인 공방을 분석해서 판정을 해야 하는 심판을 할 때 곤란을 겪었다. 오심이나 고의적인 편파판정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한 시절에 국가대표 주장에 코치까지도 했으니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러나 서울 올림픽이 결정되고 국제무대 진출이 계속되면서 많은 선수들이 국제시합에 나가게 되고 협회는 초청강습회와 초대된 외국인 코치에 의해 기술과 훈련들이 보급되었다.

선수들은 그의 지식이 정확하거나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중국을 제외한 그 당시의 아시아 수준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의 권위는 추락하였다. 그는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국가 대표 코치가 되었다. 그는 계속 대접받기를 원했고 결국엔 편법판정이나 고의적인 심판배정을 통해서, 혹은 정치적인 알력의 줄다리기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 모략과 중상을 일삼았다. 혹은 대선배들의 정치적인 주도권 싸움에 지저분한 일들을 도맡아 했다.  보이지 않는 조롱과 멸시 속에서 그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대표팀 코치 자리였다. 내가 모략과 중상의 더럽고 지저분한 일들을 하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그의 말대로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았다 대선배들은 그의 성품을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껄끄럽고 불편한 일을 해주는 그를 잠시 자신의 수하에 두었다가 버리곤 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점점 더 비열해져 갔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그의 눈에 스물 여섯의 나는 재수 좋게 발탁되어 프량스 유학을 다녀오고 대표팀 코치로 들어왔으니 얄미울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신은 선배들의 뒤치닥거리하며 이눈치 저눈치보는데 이 친구는 전혀 개의치 않고 한 때 잠시 그의 대학코치로도 있었는데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게 아닌가? 어쭈 이게 대학원 물 먹었다 이거지.. 프랑스에 유학갔다 왔다 이거지  내가 이 자리를 얻으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마빡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시건방지게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온갖 말을 만들어 내고, 면전에서는 웃으면서 시범케이스로 갖 들어온 애송이 코치를 골탕 먹였다. 네가 숙소를 지켜라. 막내가 해야 되지 않겠냐? 네가 대학원 물 먹었으니 훈련계획서 좀 써라 보고서 어떻게 쓰는지 알지? 부탁한다. 우리들 것도 부탁한다 .야 다 그런거야 나도 그랬어! 체력훈련은 네가 시켜라 넌 잘 하쟎니? ! 사람이 성실하기만 해서 되니?  선배가 까라는데 맞고 틀리고가 어디 있어..고개 빳빳이 들고 아니라고 .건방지게…’ 쥐뿔도 없는 게 똥뱃장이야, 니가 뭘 믿고 까부는데다 그렇게 하는 거야…’ .. 허리 부러져서 될려..…’ 너하고 어떻게 같이 술마시겠냐, 코치라고 다 같은 코치냐.. 한 때 넌 내 제자였잖아.. 넌 얘들이나 지켜라…’ 우리는 같은 동향이잖아.. 우리 우리는 우리야 알지 우리라고…’

 

그는 언제나 안달이고 사사건건 시비였다. 나는 그가 그러던지 말든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훈련과 코칭에 관한 모든 것을 해야만 했다. 밤을 새우고 온갖 사람들에게 묻고 배워서 그리고 '그'라는 산을 넘었다. 북경을 다녀 온 후로 그는 대표팀에서 밀려났다. 그가 처남의 도움을 받아 사업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대표팀을 나와 대만으로 가기 위해 모두들 외면하는 그를 찾아 가 인사를 했을 때, 그가 그랬다. 너 잘했다. 힘있을 때 떠나라, 나 봐라, 이게 뭐냐,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단물 다 빨아먹고 팽개치잖니?  너도 기회 있을 때 떠나라.. ,, 지금 속 편하다. 처남이 도와주고 잘 나간다. 그러나 그의 눈은 슬펐다.

그런 그가 내가 복귀하게 되었을 때, 온갖 이야기로 나와 절친한 사이인 것처럼 행세했다. 나를 불러서 자신이 내가 복귀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반대자들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와 그는 우리고 같은 편이라고 말했었다.

나는 욕심이 없다. 그냥 니들 잘 도와주고 지켜 주고 싶다. 대표팀 감독 안하고 싶은데 나 말고 할 사람이 없잖니? 너는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내가 일을 꾸미는데는 알쟎니? 그치..우리는 한 편이야.. 그렇치..?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은원으로 복잡한 대표팀 속에서 시간과 에너지를 정과 사가 불분명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인간관계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만한 시간도 없었다. 나는 늘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죠 뭐…' 라고 대답하고 더 이상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훈련시간에 한 번도 늦지 않았고, 평일엔 술도 마시지 않았고, 언제나 선수촌을 지키고 있었고, 사람들을 찾아가지도 않았고, 스포츠 과학 연구원에 가거나, 엎드리면 코 앞인 집에도 2주에 한 번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내가 거부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은 선수 훈련에 관한 나의 태도였다. 그는 늘 자신이 시키는 대로 내가 가르치길 원했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가르쳤다.

나는 그의 지도 법에 대해 경청했지만 그래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수용해서 활용했지만 그가 바라는 대로는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뿐 아니라 대학의 스승님이고 그 당시 전권을 가지고 협회를 좌지 우지하던 부회장님의 간섭도 거절했다. 나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 저의 소신대로 하겠습니다. 그 대신 책임도 지겠습니다. 부회장님은 더 이상 내게 훈련에 관한 어떠한 지시도 하지 않았었다.


 
그는 여자 플러레를 맡고 있으면서 선수단 전체의 감독이었다. 선수의 훈련에 관한 한 초강경인 나의 태도에 관해 늘 불만스럽지만, 그리고  대놓고 항의하지 못하지만 빈정대는 다른 코치들을 내심 난처해 했었다. 그래서 늘 나를 앞 세워야 했다.

저녁이 되면 나는 무척 바쁘다. 렛슨내용을 매일 다시 짰기 때문에 바뻣고, 전략 구상을 위해 세계대회 자료들을 보고 또 보며 그들의 습관을 기록하고 상대적인 기술들을 찾거나 대응 책을 찾느라 늘 자정을 넘기곤 했다.

그는 할 일이 없었다. 내가 선수들을 잘 관리해서 문제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그이유는 그가  쩝쩝 이를 쑤시며 말하기를 ' 심심하잖아... '
 그래서 그는
자주, 다른 종목의 코치들과 선수촌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시고  자정이 다 되서 들어 오곤 했다. 그리고는 내 방으로 찾아와 치근덕 대곤 했었다
.

있쟎니! 내가 최고 쟎아 그치.. 내가 최고 맞지?

,

그럼 넌 뭐니..?

전 아무 것도 아닙니다.

!... 근데 왜 얘들이 널 따르니.. 내가 최고잖아, 맞지? 내가 대한민국 최고지 그지?

, 선생님이 최고입니다.

근데 왜 이것들이 날 안 따르냐고  왜 시키는데 말을 안듣냐고..니 말은 듣고

누가 그러는데요?

보면 모르냐,,, 나는 눈치가 없는 줄 아니 나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다 엉..누가 모를 줄 알고 니들 말야 그리고 이 놈의 자식들…”

“…

그렇게 과거사가 나오고, 자정이 지나 두 시가 되곤 했다.

! .. 김 코치! 내가 최고 맞지 "
은근히 나의 부아를 돋구고는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는 나를 보며 그는 말한다.
"에이 알았다. 알았어
눈에 힘주지 말고미안하다이

내가 술 먹고 잔소리 해서, 

아닙니다.

그래,, 그래..열심히 해라, 너 착실한 거 내가 잘 알지 그래,,, 머리 좋고 똑똑하지 진짜 아깝지. 나쁜 놈들이지 그렇지 않냐?.. 그 새끼들..

“…

그래.. 근데,, 내가 최고 맞지?..

..

근데 왜 얘들이 날 존경 안하냐? 니가 좀 가르쳐라.. 날 좀 존경하게 말야 넌 할 수 있잖니? 얘들이 널 따르잖아…”

“…”

않돼 너는 한 다면 하잖아 니가 그렇게 좀 할 수 없냐?

선생님 사랑이나 존경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잖아요..

내가 대한민국 최곤데 왜 얘들이 존경을 안 하냐~니가 그렇게 해 줄 수 없냐?

“…”

알았다. 알았어 그래 계속 공부해라.. 그래 갔게 나도 잘란다 나 간다~아 내일 아침에 나 안 나간다. 니가 알아서 해라..

 

그는 내가 싫었다. 아니 미웠다. 내가 그에게 잘못해서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싫었다.

 

최근에, 실업팀 감독이던 어느 분이 내게 전한다.

김 선생 내가 김 선생 잘 아는데.. 왜 찾아가 인사도 드리고 그래~나 좀 보게 사는게 다 그런거네…”

“…

내가 물어봤어 도대체 형님은 왜 그렇게 김선생을 싫어하냐고…”

내가 그를 쳐다 보자 그 감독이 그랬다.

김선생, 기분이 나쁘다네 자네가..

감독님!...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하하

저 한테는 그 분이겠지만, 그 분한테는 저겠죠?... 하하하하

 

* 전기검법 : 펜싱은 전자장비를 사용하여 심판판정을 한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플러레 종목을 시작으로 그리고 1950년대에 에뻬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사브르 종목까지 공식경기는 모두 전기심판기 사용하여 심판한다 전기 심판기의 발명은 펜싱 기술과 전술전략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현대의 펜싱을 전기검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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