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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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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일 07시 15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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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완전한 침묵 속에서만 우리는 듣기 시작한다. 언어가 잦아들 때만이 우리는 보기 시작한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영화 <위대한 침묵>은 해발 1,300미터 알프스의 깊은 계곡에 위치한 프랑스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잔잔한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이 수도원은 방문객을 받지 않고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곳입니다. 필립 그로잉 감독은 침묵을 어떻게 영상 속에 담을 것인가란 화두를 고민한 끝에 수도원이 적격이라 판단하여 1984년 카르투지오 수도원에 촬영을 신청했으나 수도원은 아직 이르다는 답변을 보내왔고 무려 16년이 지나서야 준비가 되었다며 촬영을 허락하여, 영화는 2005년에야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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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타임 162분 동안 대사는 거의 없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졸기 십상입니다. 영화는 그저 기도 드리는 수도사의 옆모습, 종을 치고 미사를 드리는 모습, 음식과 옷을 만드는 모습, 해가 뜨고 별이 지고 눈이 오고 비가 오는 자연의 모습 등 마치 사찰에서 수행하는 수도승의 일상과도 비슷한 풍경을 절제의 미학으로 담아냅니다. 한 마디로 생각을 좌우하는 대사가 거의 없는 영화, 침묵을 체험하는 영화입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언어가 주는 편견과 사고를 넘어 오직 침묵을 통해서만이 사물은 더욱 본연의 가치를 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관객 역시 그런 경험을 하길 바랬다.”고 고백합니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 하나하나는 인상적입니다. 일하다가 햇빛이 비치는 문간에서 혼자 기도하듯 식사하는 장면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새로운 수도사들이 들어와 일일이 포옹하며 인사하는 장면, 사전을 밑에 두고 책 읽는 장면, 고요히 울려 퍼지는 종소리와 함께 숨막히게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토론을 하고 산책을 나가는 장면, 눈 쌓인 언덕에서 수도사들이 썰매 타는 장면. 특히 정면으로 수도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마치 침묵으로 말하는듯한 수도사들의 눈빛을 담아낸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침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살아가면서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말입니다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나이가 들어 갈수록 수다 떠는 게 재미있어 집니다여자들의 심리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서로를 공감하고 칭찬하면서 대화를 나눈다는 건 무척 기분 좋은 일입니다그러나 말을 많이 하는 건 내 자신을 충만하게 하기보다는 밖으로의 에너지 소모가 많습니다어쩌면 대화가 단절될 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수다를 만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쓸데없이 입을 놀리고 곧바로 후회와 초조를 느낀 적도 있습니다괜한 인간관계의 오해를 만들기도 합니다또 얘기를 하다 보면 다소 과장이 심해집니다해서는 안될 약속도 하게 되고 그 말에 책임지기 위해 끙끙거리기도 합니다요즘 세상에서는 침묵하는 것이 수다떨기보다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침묵은 보약입니다강의를 하거나 회의를 많이 한 날은 유난히 기운이 없습니다말을 통해 기운이 빠져 나가기 때문입니다침묵은 심신을 보호하고 순화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침묵은 충만한 대화입니다말은 침묵과 함께 있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침묵이 말 자체를 투명하고 생기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말은 침묵이라는 호수 위에 떠 있는 밝은 구름과 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아쉬워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또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고 또 하나의 대화로 인식되는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그윽한 시선과 미소를 동반한 침묵은 흥분과 야릇한 뒷맛을 느끼게 합니다사랑 속에는 말보다 오히려 침묵이 더 많이 있습니다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 속에 있습니다
 

침묵은 수련입니다. 칼 융은 인생 중반 이후의 과제는 우리의 내면을 바라보고 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나이가 든다는 것은 침묵과 고독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자신을 직시할 수 있는 지름길이 바로 침묵입니다불교에서는 묵언수행을 합니다묵언수행은 말을 하지 않고 하는 참선입니다말을 함으로서 짓는 온갖 죄업을 짓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시키자는 뜻입니다달마선사는 무려 9년간이나 면벽수행을 하시면서 묵언수행을 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의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가 휴식할 줄 모르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파스칼의 명언은 침묵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종입니다.

 

침묵을 통해 우리는 평소에는 듣지 못한 미세한 움직임을 듣게 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과 귀로 들어오게 됩니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했던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오로지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위대한 침묵은 덧없는 반복과 치열한 속도와 경쟁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일상의 의미를, 그리고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합니다.

 

오늘, 말없이 묵묵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아픔을 담아내는 아버지 같은 침묵이 무척 그립습니다

 

* 함께 읽고 들으면 좋을 책과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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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Jan Garbarek Offic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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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3 13:46:19 *.160.33.217

아침에 일어나 글을 쓰는 모양이구나.  좋은 일이다.   차분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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