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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4일 23시 00분 등록

응애 3 - 바람이 불어와

  세찬 바람이 가슴 속으로 파고들며 유혹하기에 바람이 이끄는대로 따라나섰다. 보통 때 같으면 수요일이니 몸을 좀 쉬어 주자고 엎드려 책 읽고 뒹굴거리며 온갖 한가함을 다 누렸을텐데 오늘은 일찌감치 집을 나서서 치과에 들렀다가 탕춘대 능선으로 올라갔다. 며칠 전부터 북한산의 소나무와 진달래가 보고 싶어서 꿈에서도 바위 진달래가 아른거리더니 오늘은 기어이 보고야 말리라. 바람이 서늘하고 날이 차가우니 산길 걷기에는 딱 좋은 날이다.
 
나의 오랜 등산친구 하나는 바람이 부는 날은 집에 있지를 못한다. 바람을 맞으러 바람을 무릅쓰고 산에 올라 큰 숨을 들이쉬면 정말 속이 다 시원해지며 살 것 같단다. 친구는 친구에게 물결을 일으키며 닮아가자고 말하는 것 같다. 내 친구의 표정을 그대로 따라하며 나는 산 속에서 솔바람 소리를 즐겼다. 그리고 향로봉 아래 맑은 소나무 한그루를 나의 나무로 정하고 앞으로도 자주 찾아올 것을 약속했다.

마주오는 사람들이 등산복이 아닌 나의 차림새를 보고 바람이 많이 분다고 걱정을 하며 지나간다. 빵도 물도 없이 올라간 나는 마냥 걸었다. 조용한 산길이 얼마나 좋은지 계속 걸어가서 드디어 향로봉까지 갔다. 늘 늦은 시간에 올라가서 봉우리까지는 가지 못하고 평지에서 되돌아오곤 했는데...오늘은 높이 높이 올라갔다. 올라갈수록 진달래 꽃은 더 진하고 소나무는 더 푸르렀다. 그리고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서울은 점점 더 정리되고 통합되어 일목요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속으로 “그래, 노력에 대한 댓가이지 이렇게 좋은 조망은...”

그리고 눈을 감고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애환이 생각난다. 부모 친척을 멀리 떠나 타국 땅에서 죽어가면서 해풍에 쏴~ 소리를 내던 솔바람소리가 그리워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사람과 어떻게 해줄 수 없어 눈물만 흘리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그 뒤로 내게는 솔바람 소리가 언제나 쏴~ 하며 들려온다.

한참을 그렇게 바람을 맞다가 내려와서 탕춘대 성벽 위를 걸어가며 다음 글에 쓸 첫 문장을 생각했다. 법정스님의 상좌인 길상사 덕현스님이 4월 초하루 법문에 스승께 올리는 시를 낭송했다. 그는 스승이 그리워 참고 참은 눈물을 가사 자락으로 훔치더니 급기야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울고 말았다.
 
그는 스승이 즐겨 입으시던 조금 짙은 색깔의 가사를 입고 스승을 곁에서 정성껏 모셨을 뿐만 아니라 큰스님 돌아가시기 전날 밤, 스승께 서울에서 둘째로 잘하는 집의 단팥죽을 가져다 드렸다. 평생을 검소하게 사셨던 스승께서 단팥죽이 먹고싶다 하셔서 마지막 호사를 올려드렸다. 정말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울면 안되지만 그래도 젊은 감성을 어쩔 수 없어 울고있는 제자의 모습이 더욱 애달파서 사람들은 함께 울었다.

“덕현 스님이 울었다. 흐느끼는 덕현스님... 단팥죽 한그릇.... 길상사는... ” 어떻게 첫 문장을 시작할까 고심하며 성곽 위로 난 길을 걸어내려 오다가 그만 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온 몸이 넘어졌다. 눈 깜짝할 새에 나는 1 미터가 넘게 슬라이딩을 하고 말았다. 그대로 엎드려 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모직 바지는 뚫어지고 코트는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손바닥은 얼얼하고... 다행히 얼굴은 무사하다. 그리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 아직 죽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참, 그러기에 길을 걸을 때에는 걷는 걸음만 주시하라고 옛 선사들이 가르쳤었지.....

그렇게 처량하게 내려오는데 넷째 손가락이 이상하다. 손톱이 깨지고 첫마디가 푸르딩딩하더니 기어코 탱탱하게 부어올라왔다.“ 아이구, 손가락이 부러졌나보다 ”

“에잇, 첫 문장 잘 써보려고 고심하다가 손가락이 날라갔구나”

그러나 손가락은 손가락이고 ... 내 머리에는 아직도 첫 문장이 맴맴거린다. 레퀴엠을 쓸까? 해골 이야기를 쓸까?, 아니 이미 잡혀있는 목차를 따라가야지... 하다가도 아, 정해진 메뉴 지루하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웃기는 죽음...뭐 이런 것....
그래서 전체 연구원 모임에서도 이미 공지를 해두었다. 재미있는 죽음을 알고 있으면 좀 말해 달라고, 잊지 않고 책에 헌사를 써주겠노라고 부탁을 해 두었다.

처음 학교를 졸업한 여대생이 동사무소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한 아주머니가 사망 신고를 하러 왔다.
여대생: 본인이세요?
아주머니: 아니 본인이 와야 되나요?

죽음을 가지고 즐겁게 놀기는 틀렸다. 산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산이 되는 날, 어쩌면 죽음은 축제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은 죽음의 춤을 추기에는 우리가 너무 굳어있다. 아니 내가 너무 굳어있다. 그러니 손가락이 다 부러지고 말지.... 유연하게 첫문장을 생각해냈으면 손가락이 왜 멍들고 부어오르겠느냐 말이다. 그눔의 첫문장....

해골놀이나 하나 베껴다 놓아야겠다.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지 1천년도 더 지났을 때, 그리스의 풍자작가 루키아누스는 왜 그토록 많은 사내들이 헬레네의 이름으로 목숨을 바쳤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가 쓴 풍자적인 대화체 작품에서 메니푸스라는 철학자는 죽어서 저승에 도착하자 헤르메스 신에게 길안내를 부탁했다. 헤르메스가 저승의 유명 인사들을 가리키자, 메니푸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저한테는 해골밖에 안 보입니다. 해골은 모두 똑같아 보여서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군요.”

그러자 헤르메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시인들은 모두 네가 해골이라고 부르면서 경멸하는 저런 것들을 숭배하지.”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어떤 해골이 헬레네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제 안목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이게 바로 헬레네야.”

메니푸스는 깜짝놀라서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는 물었다.

“10만 대군을 가득 실은 1천척의 배가 그리스 전역에서 떠난 이유가 바로 ‘이것’이란 말입니까? 그 많은 그리스 군과 트로이군이 죽고 도시들이 폐허가 된 이유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요?”

“그렇다. 하지만 너는 이 여자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못 보았잖느냐, 만약 보았다면, 사내들이 무엇 때문에 저따위 여자 하나를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고난을 겪었는지, 그 이유를 너도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꽃은 시들면 추해 보이지. 하지만 활짝 피어서 색깔이 있을 때는 정말 아름다운 법이라네.”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정녕 몰랐을까요? 그들이 얻으려고 애쓰고 있는 게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빨리 시들어버리는지를 말입니다.”

트로이의 흙먼지 속에는 그들의 용기를 증언해 주는 것도, 그들이 죽어간 이유를 기억하게 해주는 기념물도 전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봄이 오면 폐허가 된 성채 밑의 드넓은 평야에서는 피처럼 붉은 들꽃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 <동굴에서 들려오는 하프소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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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04.15 08:52:26 *.36.210.247
emoticon에그~ 유쾌한 죽음 연구하다 황천갈 번 하셨네요.

아마도 법정 스님의 원력(力)이 범해 언니야의 고꾸라져버린 네 째 손가락에 윤회되어 환생될 듯합니다.

장엄하나 원없는 삶과 죽음의 미학이 범해 왕언니야에 의해서  장쾌하게 탄생되기를!!!  ^-^*   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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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니
2010.04.15 22:37:29 *.67.223.107
에그, 황천갈 뻔... 오랫만에 들어보는..우리 조직 - 죽음 담당 - 의 용어군요.
해골과 장미꽃이 잘 어울리네요.  .....

나는  도서관에서 심각하게 책 읽는데..
사람들은 벚꽃 흐드러진 윤중로를 지나며  봄놀이 하느라 바쁘더군요.    좋은 봄을 신나게 살아봅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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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0.04.15 21:43:45 *.74.255.51

왕 누님!
건강 살피시고요,,,  
아시죠,  우리 나이가(?!)  되면 멀티테스킹이 안 된다는 거,,, ^^

아프지 마쇼...   서럽습니다.  꿩 저만 춥당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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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산
2010.04.15 22:48:16 *.67.223.154
백산  방가방가방가방가...
그동네도 날씨 변덕이 좀 심하지?  옆구리 시리지않게 잘지내다 돌아와요.

왕누님 슬라이딩 하는 것 보여줬어야  했는데.... ㅋㅋ
이번엔 쪽팔린다는 여유도 없이 영화찍었어... 우와...좀 겁이 나긴했어.

근데 젊디젊은 백산은 왠 우리나이.?...
바람분다꼬 산을 오르는 나도 아직 청춘인데....
청춘을 다~아 ~ 바치고 죽어야 할낀데....아직 많이 남아서...오히려 걱정이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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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건친구
2010.04.15 21:54:03 *.180.96.4
한 아주머니가 사망 신고를 하러 왔다.
여대생: 본인이세요?
아주머니: 아니 본인이 와야 되나요?

저 빵터져 웃다 죽는줄 알았습니다.
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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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친구
2010.04.15 22:49:55 *.67.223.107
우와 성공이다.
썰렁유머에 웃어주니...너무 캄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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