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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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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22일 08시 26분 등록

3.  

“잘 죽었어.”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말 한마디에 유연은 들이키던 소주잔을 가만히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가슴 깊숙이 솟구쳐 오르는 거센 불길을 굵은 침을 삼키며 막아내느라 온 몸이 경직되어갔다. 오른쪽 눈꺼풀에 가느다란 떨림이 일었다.

“지가 무슨 점령군인 것처럼 마음대로 칼을 휘두르려고 해. 내가 말했지. 언젠가 자신이 휘두른 칼에 베일 날이 있을 거라고.”
“그만 하세요. 누가 듣겠어요.”
“들으라고 하지. 내가 아닌 말을 하나.”
기획실 직원들끼리 수군거리는 치졸한 대화가 유연의 귓속을 할퀴고 지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장례식장까지 와서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저리 심하게 이야기해도 되나.’
유연은 빈 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벌컥 들이켰다. 맹물을 마시듯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연신 입으로 술을 부어댔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했다.

유연은 경영혁신실로 부서를 배정받았을 때 연화강 실장을 처음 만났다. 부드러운 미소가 매력인 연실장은 새로 부임한 전무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전임 전무의 신임을 받던 기획실이 신임 전무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자 그 때부터 치열한 권력다툼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동안 기획실에서 회사의 모든 전략을 담당하였지만 회사의 대내외적인 여건상 내실부터 다지자는 신임 사장의 경영방침으로 인해 경영혁신실에 권력이 집중된 것이 화근이었다. 권력이 한 곳에 모이면 더러워지고 더러운 곳에는 파리가 꼬이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런 곳에서 총괄책임을 맡고 있었으니 부러움과 시기가 얽혀 연실장의 부드러운 미소도 점점 사라져갔다. 유연도 연실장이 추구하는 회사의 혁신 방향과 실행방안에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지만 회사와 직원을 생각하는 부분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변화가 있는 곳에 저항이 있듯이 고통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연실장의 다소 이상적인 방식에 유연도 꽤 힘들어했다. 그런 연실장의 고민도 모른 체 표면적인 변화에 기득권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세력들의 구차스런 대화에 유연은 삶이 구질구질해졌고 그런 사람들에게 넌더리가 났다.

“오셨어요.”
들이키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이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실장의 부인이었다. 갑작스런 충격에 얼굴이 핼쑥해보였다. 이전에 몇 번 얼굴을 뵌 적이 있어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온화했던 예전은 사라지고 지금의 초췌한 모습은 전혀 딴 사람이었다.

“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당황스러워서 짧게 대답했다. 게다가 같은 부서의 부하직원이고 대학후배이지만 장례식을 치르면서 도움이 되지 못해 부인을 뵐 면목이 없던 차였다. 유연은 부인으로부터 연실장의 죽음에 대한 사연을 자세히 들었고, 회사나 보험회사로부터 보상이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백방으로 뛰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연실장은 최종 혁신 제안서를 마무리하면서 회사에 일주일 휴가를 신청하였다. 혁신 제안서를 기획하면서 밤샘을 밥 먹듯이 하느라 6개월 동안 가족들과 휴가 한번 제대로 가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중국으로 휴가를 떠났다. 가족과 여행을 즐기며 행복한 휴가를 보내던 중 피로를 풀고자 중국에서 유명한 발마사지를 받았다. 그런데 발을 주무를 때마다 하도 고통스러워해서 마사지사가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검사를 꼭 받아보라고 했단다. 그러나 연실장은 모처럼 휴가를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서 원래 일정대로 휴가를 보냈다.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 새벽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다가 갑자기 쓰러져 2주째 인사불성으로 병원에 누워있다 저 세상으로 떠난 것이었다.

“술 많이 마시지 마세요.”
유연이 걸신스럽게 술 마시는 모습에 부인은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네.”
유연은 다시 짧게 대답했다. 그러다 분노와 슬픔이 섞여 그동안 억지로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하여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형수님.”
“무슨 말씀이세요. 유대리님이 도와주셔서 큰일을 잘 치르고 있는데요.”
“아니, 그저 면목이 없습니다. 회사마저 외면해 버리는 현실이 너무 분하고 원통하네요. 그렇게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밤낮없이 일에만 매달렸는데 돌아오는 것이라곤 고작 위로금 몇 푼이니 말입니다. 물론 돈 때문에 일하지는 않았지만……”

유연이 이야기 하는 동안 부인은 그저 눈물을 닦으며 옆에서 울고 있었다.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세상 물정 모르고 남편만 의지한 채 살아온 여인이. 그렇게 남겨진 가족에게 유연은 앞으로 살아갈 조금의 경제적 도움이라도 주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현실은 값싼 동정마저 쉽게 외면해버리고 배신의 칼을 들이대며 냉정하게 내동댕이쳤다.

“이것도 유대리님의 덕분입니다. 조촐한 장례식이라도……”
“그래도 그렇죠. 실장님의 사고가 휴가기간에 일어난 일이라며 더 이상의 지원은 할 수 없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누구도 꺼려하던 구조조정을 맡아서 마지막까지 직원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그렇게 애를 썼는데……”

유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회사가 연실장을 두 번 죽였다는 생각에 이르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충성의 대가가 이런 것이라면 그 누가 회사에 자신을 희생하겠는가. 유연 자신도 회사의 한 소모품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씁쓸한 마음에 다시 술잔만 들이켰다.

 

IP *.215.1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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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05.22 09:19:14 *.219.168.83
유연함은 곧 현실감일까? 생의 균형감을 위한 곧은 유연함이 일상의 성실한 글쓰기로 화사하게 아침을 여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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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10.05.24 11:23:04 *.93.112.125
현실적 유연함이 어떻게 전개될 지 지켜봐주세요.
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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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10.05.22 09:36:56 *.70.61.217
기존 소설가의 글 못지않게(아니 더 잘) 글이 술술 읽히네요, 선배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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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10.05.24 11:24:55 *.93.112.125
과찬이십니다.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조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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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0.05.23 05:58:25 *.75.11.246

언제 소설가가 됐을까...
사색이 깊은 얼굴,  성찰이 쌓여서 나온 던 단어들이 ... 그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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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10.05.24 11:28:28 *.93.112.125
소설가보다는
그저 경영을 쉽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스토리텔링을 접목할 뿐입니다.
깊이와 통찰을 더한 형님의 글에 늘 감동받습니다.
곧 뵐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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