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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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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30일 11시 57분 등록

어쩌면 나는 ‘연구원 해외연수’를 가고 싶어 연구원에 지망했을지도 모른다.

한 달을 읽어도 소화할까 싶은 책들을 매주 한 권씩 읽어내야 하고 엄청난 글쓰기의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점차 다가오는 여행은 나를 늘 들뜨게 했고 여름이 되면서부터 나의 생활은 거의 여행의 일정에 맞추어졌다. 아직 아이들이 어린 주부의 상당기간의 여행은 꽤 많은 주변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엄청나게 기대하고 설레어하는 나의 모습은 그들의 웃음과  자발적 도움을 이끌어낼 정도였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설레게 했을까?
어릴 때 즐겨보았던 <그리스&로마 신화>의 땅인 그리스와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서양사에서 등장하던 이스탄불의 첫 방문이라는 매력 때문에?
혹은 결혼 10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진 출장을 제외한 여행이기 때문에?
여행 전 막연하게 짐작했던 이런 이유들만으로도 어쩌면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와 많은, 정말 많은 시간이 예정에도 없이 마치 날벼락처럼 주어졌다.
시차적응을 하고 여행의 후유증에서 간신히 벗어나 겨우 일상에 적응하고 있던 주말, 예정된 하루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분주히 서두르던 아침의 사고였다. 간단한 화장을 하기 위해 콤팩트를 두드리다가 눈을 손가락으로 찌른 것이다. 어찌나 아팠던지 그 순간 눈을 뜰 수 없었고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살며시 눈을 떠보려 하자 다시 엄청난 통증이 몰려왔고 다시 눈물이 바가지로 쏟아졌다. 어찌어찌 눈을 살짝 떠 보자 앞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거실에서 놀던 아이들이 놀랄까봐 살짝 신랑을 불러 이야기를 했다. 밖으로 나오자 눈부시게 쏟아지던 햇살에 다시 눈물이 쏟아지고 눈을 뜰 수 없는 상태로 신랑의 팔에 매달려 병원으로 향했다. 안과 응급실을 찾아 세브란스 병원까지 가서 간신히 진찰을 받고 각막파열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정말 다행으로 상처가 크기는 하지만 각막만 다쳤고 중심부가 아니어서 시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다만 손으로 난 상처는 2차 감염의 우려가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는 처방에 따라, 그리고 눈을 뜰 수 없는 엄청난 통증과 눈에 직접 바른 연고 때문에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책은커녕 TV조차 볼 수 없었다.   

덕택에 밀린 집안일과 나를 필요로 하는 모든 상황과 심지어는 연구원 숙제들도 모두 쭈욱 밀어놓고 그냥 쉬면서 정말 간만에 찾아온 여유를 통증 속에서 누릴 수 있었다. 그 여유 속에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 나에게 맞는 것인지, 그리고 난 왜 그 길이 내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이번 여행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왜 나는 이번 여행에서 그렇게 실망했던지, 왜 여행을 즐기지 못했는지, 내가 기대했던 것은 정말 무엇이었는지......

이제 눈은 거의 다 나았다. 일주일 후에 다시 한 번 보자는 의사의 말에 따라 금요일 한번만 더 병원에 가면 된다.  

사고가 난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사고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손으로 그렇게 깊게 찌를 수 있냐고 의아해했고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어쩌면 여행 전부터 많이 분주하고 심란하던 내 마음과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나의 여행과 일상으로 돌아온 후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다시 밀려오는 나의 상황들 속에서 나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해야만 하는’ 많은 것들과 혼란스러운 ‘하고 싶은’ 것들의 카오스 속에서 어떤 것을 해야 할지, 또 우선순위는 무엇인지, 아무 것도 정리하지 못한 상태로 우왕자왕하는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무엇’ 내지는 ‘누군가’가 벌린 일은 아니었을까?

결국 설레고 기다리던 여행보다 뜻하지 않았던 나의 사고가 나를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 준  휴가였을지도 모른다.
이 두 번의 휴가에서 아직 해답을 얻지 못했다.
다만  다시 길을 떠날 다짐과 마음을 간절히 구했고 휴가의 끝자락에서야 이것을 얻었다.

지난 주말 이사를 했다.
살림을 싸고 또 살림을 풀고 짐과 함께 내 마음도 정돈하고 정리했다.
오늘부터는 새 집에서 새로운 맘으로 다시 즐겁게 길찾기 시작해야겠다.  

   

IP *.230.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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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0 12:18:53 *.230.26.16
간신히 칼럼을 마쳤습니다.
북리뷰는 두주 연속 올리지 못했습니다.
밀린 숙제 꼭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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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0.08.30 12:21:01 *.10.44.47
언니 칼럼이 이렇게 반가울수가..
우리가 9명인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다시한번 확인했습니다. 
새집에서 새로 시작하실 수 있게 된 거 축하해요~!!
새집이 불가능한 저는 청소라도 해놓고 다시 시작해야겠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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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08.30 13:21:16 *.30.254.28
반갑구나..선형아.
너의 글이, 너의 마음을 보여준다.

전화기 너머로.
스스로 눈을 찔렀다 말하며 웃더니,
컬럼 제목으로 나왔네...ㅎㅎㅎㅎ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지..그런데, 지나고 나면
다시 느끼게 될거야..
별로였다고 생각했던 그때가 좋았던 것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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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0 16:18:23 *.186.57.62
이제 여름도 거의 다 지나고, 새 집으로 이사도 하고,
눈을 다쳤다길래... 혹 못볼 걸 봤나 했더니, 누구를 탓하지도 못할 일이라니..
ㅋㅋ 웃음도 나왔지만, '오빠, 나 괜찮아.. 감염만 조심하면 된데..' '으이구.. 바보팅구...'
암튼.. 시간도 걸리고,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어여 일상으로 돌아오셈..
기다리는 사람들 있잖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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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08.30 22:19:07 *.212.98.176
이사를 앞두고 눈을 다쳐 마음이 어려웠겠구나ㅎㅎ
전화 목소리에 피곤끼가 묻어있긴 했지만 여유는 여전한 것 같아 좋았다^^

내 생각에는 네가 무의식의 세계로 좀더 들어가면 발견하는 게 많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무의식의 세계가 꼭 현실과 대척점에 있는 건 아니니. 명확하지 않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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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08.31 07:27:34 *.146.69.208
그런 일이 있었군요. 눈 찔러서 눈물이 많이 나왔다는, 글에서 창조의 샘이 분비되는 것에 경이로웠습니다. 여행에서 많이 실망했을 수도 있지만, 많이 발전하셨네요.  

명료하지 않은 것 같아요.. 어디로 가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을 땡기는 것이 있다면, 그 쪽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모자이크 같다고 할까요? 시간이 지나면, 당시에 땡겼던 일, 직업들이 어느날 모양새가 드러나는 날이 오겠지요. 

전 대학에선 일본어를 전공했고, 여행사에서 일했으며, 디자인을 공부했고, 그림을 그리며, 동영상을 찍고, 지금은 음식점 사장이에요. 정말 중구난반의 이력이지요. 

그런데, 외식업과 여행업이 찰떡궁합이고, 두 사업을 동시에 한다면 시너지 효과가 생기지요. 제가 여행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필요하겠구나 라는 생각합니다. 음식에도 이미지가 필요하지요. 손님은 사진이나 가게 이미지를 보고 들어옵니다. 영상을 만들고, 인쇄 매체를 제작하는 것이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현장에서 느껴요. 

전 누이의 '제 손으로 눈찌르기 사건'에 대해서, 너무 멀리 보지말라는 무의식이 작동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회사 잘 나오셨고, 지금 하려는 일도 잘 선택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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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1 13:56:35 *.93.45.60
다행입니다. 시력을 잃지 않아 다행입니다. 
이사한 것 축하드립니다.
가을에 새로운 뭔가를 시작하기에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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