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박경숙
  • 조회 수 2041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11년 3월 7일 02시 47분 등록
 

2.1.1 종결기-버림과 끝냄 : 어제를 버리기 전에 새로운 내일을 기다리지 마라

 

 

3. 버릴 수 있는 용기는 인생에서 배울 수 있는 최초의 전환이 주는 선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종결의 단계에서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앞에서 나는 우리가 종결기에서 버려야 할 것들이 오래된 습관과 태도, 정체성과 내적인 믿음 혹은 자동적 사고라고 했다. 여기서 버리거나 포기한다는 것이 인생의 말년기에 이른 사람들의 ‘무소유’나 종교적인 색깔을 지닌 사람들, 혹은 순수한 휴머니즘에서 출발한 ‘나눔’과 혼동하지 마라. 여기서의 버림은 무소유의 버림이나 나눔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다. 진정한 무소유는 소유를 하고 난 다음에 일어난다. 한 번도 자기 것을 가져보지 못한 자가 무소유를 외치는 것은 일종의 도피이다.  무기력한 우리는 우선 ‘기력’을 차려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버림은 무기력한 자신을 이겨내기 위해 하나의 전략적 시초임을 말해두고 싶다. 그 이후에 본인의 희망에 따라 다시 버려도 된다.


고능선 선생이 백범 김구 선생님에게 자주 말했다는 “ 得樹攀枝無足奇 懸崖撒手丈夫兒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살수장부아 : 가지를 잡고 오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되  벼랑에서 잡은 가지마저 놓을 수 있는 사람이 가히 장부로다”라는 말 처럼 우리의 ‘발전’은 새로운 것의 취함에 의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이미 가졌던 것을 던져버려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선지자들이 가르쳐주고 있다. G.K .체스터든은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지식을 버리는 데 있다.” 라고 했는데, 그런 면에서 과거의 습성을 버릴 수 있을 때 우리의 진정한 전환은 시작될 수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결국 인지의 전환이란 과거의 생각을 버리는 작업이다. 자신이 살아온 만큼 누적되어 있던 학습된 결과를 부인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벼랑에서 잡고 있던 가지를 놓는 것만큼이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 탓에 자신의 인생을 망치면서까지도 과거의 습관을 고수하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예로든 퇴직한 사업가가 전 직장에서 만들어졌던 모든 심리적 의지를 버리고, 마치 어릴 때부터 장사만 했던 장삿꾼의 마음으로 사업을 했다면 적어도 망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대기업임원이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벼랑에서 잡은 가지를 놓는 것과도 같은 결단을 필요했으므로, 그는 변하지 않았고 자신의 사업체를 날려버릴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변화에 성공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여, 인생을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미 떠나온 어제에 에 대한 ‘전면부정’ 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가 인지 전환의 핵심이다. 넘치는 요단강의 푸른 강물에 발을 딛던 여호수아의 결단이 필요하다. 홍해가 갈라져 그 마른땅을 지나게 하던 모세의 지도력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아직 갈라지지 않은 요단강을 갈라질 것이라 믿고 그냥 들어갈 수 있던 여호수아의 지도력이 전환을 원하는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다. 아직 새로운 시작은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려야 할 때 우리는 쉬이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 버림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입성할 수 있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 인격과 삶의 질이 더 이상 향상되지 못한다. 포기하고 버릴 수 있을 때 매일 매순간 전환이 일어날 것이고, 인지의 전환이 일어날 때 비로소 구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아침을 맞을 수가 있게 된다. 그때 비로소 변환을 거쳐 성장으로 갈 수가 있게 된다.


4. 그런데 버리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새 건물을 짓는 것보다 리모델링에 비용과 시간이 더 든다고 건축업자들이 말한다고 한다.

 건물을 리모델링 해본 사람은 누구나 그 작업이 개인의 변환 과정과 비슷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고 한다. 버림->중립지대->새로운 시작과 같은 변화의 3단계처럼, 리모델링 공사 역시 대개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먼저 기존에 있던 건물의 부속물들을 뜯어내고 부수는 것에서 리모델링은 시작한다. 버림과 끝냄의 단계이다. 이때는 아직 새것이 지어지지 않은 시기이다. 그 다음엔 계속 해체의 작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구조들이 만들어 지는 시기이다. 이때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라고 하는데 중립지대와 비슷하다. 건축가들은 이 어중간한 중립 상태에서 ‘임시조치’를 취하면서 ‘해체와 건설’이라는 두 작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구 건물의 해체가 완전히 끝나면 새로운 구조물을 보강하는 단계에 접어드는데 ‘새로운 시작‘과 비슷하다.

새 건물을 지을 때와는 달리 리모델링은 시작만으로 이루어 지지 않고, 3단계에 걸친 작업을 하는데, 이런 건물의 리모델링 과정은 변화의 3단계와 비슷하다. 구 건물의 해체는 ‘종결’을 말하고 새로운 건물이 만들어지는 것이 ‘새로운 시작’단계와 흡사하다. 그리고 그 중간에 ‘해체와 건설’이 함께 공존하는 시기가 ‘중립지대’이다. 이 중립지대에 건축가가 임시조치를 취하듯 우리도 중립지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주의할 것은 이때의 조치가 완성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조치를 가급적 최소한으로 하고, 빨리 건물을 완성하여야 하듯 인생의 변화 단계에서 치루어야 할 중립지대의 조치 역시 최소한으로 줄여야만 손실이 적다. 중립지대는 오래 머물수록 혼란과 고통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중립지대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진다. 중립지대의 혼란이 길어지는 것은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화의 어려움이 여기에 있다. 청년기에 사업을 배우는 사람은 쉽게 개인 사업기술을 습득해 나간다. 그런데 중년기의 퇴직자는 개인 사업가가 되기에 버려야 할 전 직장의 추억이 너무 많다. 그 결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인생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게 된다. 과거를 잊는 게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몸이 우리가 과거에 해온 것을 기억하고 그대로 유지하려는 항상성의 법칙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변화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다. 항상성의 법칙에 영향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원래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려고 하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 변화하려는 시도가 쓸데없는 소모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건물을 짓는 건설업자들이 “새 건물을 짓는 것보다,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 하는 것이 항상 더 많은 시간과 돈이 든다”고 고백한 점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개인적인 변화가 어려운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리모델링이 그러하듯 변환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나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었다. 우리는 사람이고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법칙에 그대로 적용받는 존재이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인간이고 자연법칙에 노출되어 있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마음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그것이 성장이고 진화이다. 변화는 어려운 작업이다. 변화가 어렵다는 것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 나만의 어려움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위안이 되지 않는가? 


5. 과거에서 벗어나려면 상실감의 우울을 공개하라


“모든 변화는 그것이 간절히 원하던 것이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우울하다. 왜냐하면 뒤에 남겨두고 와야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하려면 반드시 그전의 생을 마감해야 한다.”  -아나톨 프랑스- 


앞에서 나는 끝내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다. “거의 모든 일에서 시작이 끝내는 것보다 쉽다.” 라는 아그네스 알렌의 말처럼 정말이지 끝내는 것이 시작보다 훨씬 더 어렵다. 자연을 지배하는 많은 물리법칙 중 항상성의 법칙이라는 유기체가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자연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그렇다. 내면의 저항과 싸워야 하고, 오랜 정체성을 포기해야하고, 상실의 아픔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 새로운 방식을 배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방식을 잊어야 한다. 그리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정체성을 버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은 끝냄에 달려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끝냄을 싫어한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저항하는 것은 변화자체가 아니다. 그들이 싫어하는 것은 상실의 경험이고 그 상실감에 저항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변화가 주는 유익과 성과가 아무리 매력적으로 보여도 별 소용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가 주는 유익과 성과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상실과 끝냄이 주는 우울함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상실감의 대부분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데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뭔가를 버리고 끝내려 할 때 발생하는 우울감의 원인이 정확히 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상실감이 가져오는 더 큰 어려움이다. 기존의 ‘태도’와 ‘가정’들, 온갖 종류의 ‘기대’들이 복합되어 우리의 몸에 익숙해져있고, 머릿속에 굳은 인지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건 그 유기체에게 당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것’ 혹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 덕분에 우리는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간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그 당연하던 것의 상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 사항의 소멸로 느껴지게 만든다. 그런 당연한 것들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모두 다 중요한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버림이나 상실이 몰고 오는 우울의 근거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 것도 달라진게 없어 보일지라도, 그에게는 세상을 대응해 나갈 중요한 자원들을 모두 잃어버린 것과 같다. ‘버림’이 어려운 이유이다.


그러나 상실이 우울을 동반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상실이 주는 우울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놓는다면 그 우울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다. 인정해버리면 된다. 우울을 시인하면 우울이   야기하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가 있게 된다. 우리는 어떤 ‘끝냄’을 하려고 할 때, 그 ‘끝냄’이 주는 상실감으로 인해 ‘화’, ‘슬픔’, ‘공포’, ‘실망’, ‘혼돈’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런 감정은 ‘슬픔의 징후’로서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가족을 잃은 가정이나 ‘끝냄’이 시작된 조직 등 에서 이러한 징후들은 자주 발견된다. 앞에서 나는 사람들이 끝내는 것 자체를 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그러나 혹시 그가 끝낸다고 하더라도 그 끝냄이 주는 상실감을 또 부정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부정’은 ‘슬픔’이 가져오는 프로세스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심리적 반응이다. 사람들은 심리적 ‘부정’을 하면서 끝냄의 상실이 가져다주는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따라서 ‘부정’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 부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 한 건강한 심리반응이며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빨리 중단하는 것이 더 좋다.

   

뭔가를 상실한 사람들이 하기 쉬운 ‘단순한 투덜거림’에서부터 ‘업무지연’, ‘연속되는 실수’, ‘근무태만’ 등이 이 부정의 외부 증거 중 일부로 볼 수 있다.  또한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거나 도망치고 싶어하는 비현실적인 시도들’, ‘침묵과 눈물’ ‘방향상실’ ‘건망증’이나, 늘 가라앉고 맥 빠지고 기운없는 상태가 지속되거나, 절망감과 만성 피로감이 계속될 때 상실의 우울이 시작된 것으로 생각해도 좋으리라. 슬픔이나 분노처럼 이 우울증도 견디기 힘들 것이고, 쉽게 떨쳐버릴 수도 없이 겪어 내야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우울의 단계는 상실이 주는 당연한 결과로서 이겨내야만 한다.  이 상실의 우울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상실을 대신할 것을 찾아야 한다고 심리학자들은 충고한다. 고통만 야기하는 변화는 실패하기 쉽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악을 대체할 수 있는 매력적인 덕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혁명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끝냄이 주는 상실의 우울을 대체할 수 있는 보상책이 필요하다. 상실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보상책은 뒤에서 논하겠다.


 “인생에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중요하다. 씨앗이 싹이 트려면 먼저 썩어야 하듯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끝냄’의 기간동안 사람들을 저항하게 만드는 것은 과거 수년간 익숙해져 있었던 행동 방식과 태도를 버리도록 강요하는 상황이다.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사람들은 새로운 단계에 들어가도 마땅히 있어야 하는 장소가 아닌 중립지대라는 중간단계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끝냄과 버림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버림에서 발생하는 상실감을 예상하지 않은 댓가로 중립지대에 오래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중립지대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끝냄과 버림 단계에서 나타날 ‘상실감의 우울’을 미리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변화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새로운 시작’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이유로 끝냄의 과정에 대한 준비도 없고, 중간지대라는 것의 존재에 대해선 전혀 무지한 채 시작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변화를 했으나 변환을 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변화를 위해선 끝냄의 통과의례, 중간지대의 막막함이 도래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어야 한다.



“떠나보내야 하는 과거보다 더 아쉽고 소중한 것은 없다” -제사민 웨스트-

IP *.67.106.20

프로필 이미지
써니
2011.03.07 21:17:54 *.97.72.79


一切唯心造
라는 말이 생각나네.^^

무심코 지나가다가 돌이 날라와 다쳤을 때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다퉜을 때의 일은 사건의 분류와  감정상으로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감정이라는 착을 떼고 물러나서 사건의 양태로 관조하여 바라보면 똑같이 어느 날의 단지 재수 옴붙은 하찮은 일일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감정이라는 놈은 그렇게 생각질 않고, 한쪽 특히 후자의 경우에 가치 이상의 의미부여와 기대심리를 반영시키며 판단의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관계의 논리를 구분(게다가 보다 인간적인을 주창하면서까지)지어 파악하려 드는 행위로 말미암아 점점 더 감정의 골을 깊게 파거나 엉키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 두 가지 상황은 전혀 예상치 않은 결코 바람한 적이 없는 사건이었으므로, 그냥 타인의 시선- 방관자적인 입장-으로 바라본다면 그 비중은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어디선가 이유없이 날아든 돌맹이에 한 대 얻어맞은 거와 누군가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의 강도의 차이는 어떻게 얼마나 다를 것인가? 다른가? 일반적으로 대부분 다르다고 생각한다. 실상은 같은 저울에 달아 따져보면 그 차이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으련만, 애정이라는 착은 두 사건을 극단적으로 분리시켜 인지하려들고, 대부분은 근시안적 혹은 집단의 이득에 적합한 논리적 틀에 맞추어서만 판단하려 드는 경우가 태반이기도 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관대히(?) 설정하여 두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다수든 소수든 서로가 팽팽하게- 상대의 배려나 의지로 개선이 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도 지극히 인간적인 것을 각자의 입장에서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들에 필요 이상으로 빠져들 필요가 있는 것인가? - 나는 오래동안 이 문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우리는 시나브로 누군가와 끊임없이 경쟁하고 실로 죽는 것들(사람이든 가축이든 사물이든)과 더불어(죽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이 매정하게)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인데, 그러한 점들을 전혀 염두해 두지 않고 살아가는 채 말이다. 그래서 우매함이 무엇인지조차 근본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자기 인식도 안 되고 따라서 주변 인식도 더불어 안 되는 채 나불나불 나풀나풀...

믿어의심치 않을 일이란 것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두 가지 사항은 일상을 통해 관조해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무엇 무엇은 "꼭 이러 이러해야만 한다"고 하는 고지식한 편견과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믿어버리는 우매함 등 우리의 판단과 감정상의 오류는 없는 것인가? 이렇듯 하찮은 일에 크게 매달려 우울해 하거나 상황을 확대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의 상태들에 관조하며 흘러가는 것들에 무관하게 나 대로의 삶에 힘쏟을 수 있다면  그것들을 인지 전환 훈련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다면 어떨까? 상황은 자연적으로 착에서 멀어지고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인식은 전과 다르게 보다 용이하고 간결하게 필요한 것들에 전환의 박차를 가하며 긍정적 효과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당사자(사물이 아닌 나와 같이 머리 검은 짐승)들은 이처럼 단순하게 끌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일의 원만한 해결이나 진정한 나눔/교감이 쉽지가 않다. 단지 당연히 이러 저러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실상은 자기 편의 위주로만 줄창 믿고자 하며 선점하려 드는 권력구조를 취한다. 이런 모습들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단지 의심없이 사고해온 우발적 습성에 기인함일까 무의식적으로 수용해온 도덕관념 때문일까?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시간이 경과되다 보면 더군다나 힘 없다고 생각하는 한쪽이 힘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한쪽으로 무작정 딸려가게 되기도 한다. 버텨봐야 크게 좋을 것이 없다고 지레 겁먹으며 자책하거나 스스로를 가두어 배신자의 행위라도 한 것 같이 늪에서 허우적이며 죄의식에 빠지기도 한다. 나도 그렇고 내 주변의 많은 어설픈 이들도 이러한 사고틀이나 상황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 같다. - 실제로 가을 한 철, 나는 내 것을 선의로 내어주고도 결과적으로 손해는 물론 뺨 맞은 격의 일을 겪으며 그 어이없음에 망연자실 한 채, 한동한 심한 우울한 감정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여태 마음에서 말끔히 사라지지 않는다. 부당함을 까발리자니 피곤하여 혼자 삭혀야 하는 일이 되었으므로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인 게다. 그래서 아마도 내심 두고 보는 중? ㅋㅋ 두고 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는 옛말과도 같이 없는 허상/ 중요하지 않은 망상에 끄달리며 무의미를 붙잡고 놓치 못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이러한 감정의 면면들이 개인의 인지 전환적 요소( 때때로 필요 기전을 불러일으키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작동시키는 일)를 억제시키며 불합리한 태노나 작용을 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지전환은 필요를 원하는 인식자들을 통해서 시작/발화되지만 나아가 비인식자들도 공동으로 깨닫게 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은 존재들이고 어떤 상황도 그 외향대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니까. 어떤 시선의 관점에서 어떻게 논리에 타당하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양 측간 본래의 취지가 훼손되지 않는, 더 나은 제대로된 합리성과 관계의 진보를 이루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앞의 두 가지 상황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혹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 즉 그 자체로만 무심히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러한 공부가 조금이라도 되고 있노라면, 지금보다 명징한 일상(필요 없는 부분을 과감히 제거하거나 착을 떼어버리며 맴돌지 않는)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작은 깨달음의 나날들로 일상의 내 지난한 허물들이 허물을 벗고 가볍게 진화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 삶의 고락에 허우적이기보다 바람직한 혁신(작은 것들을 변화시킴으로 해서 크게 달라지는)으로 실로 인생의 개운의 행운을 맞이 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공부가 살과 뼈를 뚫고 피와 진액으로 올올이 배어들어 다시 두 발로 우뚝서게 되어야 하는 이유일까?

..........................................................................

그대의 단호해진 논리적 서술을 읽다가 한 생각이 들어 적어보았다네. 잘 되고 있는가? 쉽지는 않겠지만 열심히 하는 모양이고 담대해진 모습일세그려. 암 그래야지. 끝은 다시 처음으로 이어지므로 이제부터 다시 초심을 다져나갈 수 있다면 그대 가슴의 은근한  불씨, 아니 광활한 불길들이 바람대로 더욱 오래 타오를 수 있을 것이야. 기대하며 응원보내네. 또한 우리 많이 웃으며 살아가세. ㅎ~    ^-^*
프로필 이미지
경숙
2011.03.14 03:31:42 *.67.106.15
" 一切唯心造 "
그래요 언니 모든 것이 이 마음이라는게 문제인 듯 하지요
" 끝은 다시 처음으로 이어지므로 이제부터 다시 초심을 다져나갈 수 있다면 그대 가슴의 은근한  불씨, 아니 광활한 불길들이 바람대로 더욱 오래 타오를 수 있을 것이야."

끝내는 것이 곧 시작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지금 제게도 적용되고 있나 봅니다
많은 아픔이 있었고 오해와 왜곡이 있었지만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 발산한다면 그 모든 것이 다 없어질수도 있었겠지만
그게 안되는게 늘 문제였습니다

진심이 안통했다는 나의 상처는 그 어떤 위로나 훈계로도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치유할것이라는 쉬운 말도 그 지나가는 시간속에 있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 못하는 고통이지요
그러나 끝냄이 시작의 출발이라
모든 끝의 뒤에는 새로운 시작이 오겠지요

늘 감사했었습니다
언니의 응원에 중도포기않고 수료라도 할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돌맞은 상처는 차츰 아물어 가겠지만
돌맞은 기억은 아직도 뚜렷하고 키득거리던 악의들도 아직 생생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듯 사람들 모두가 그럴수 있으므로
사부님의 말씀대로 선한 천사에게 영양분을 줘야 겠지요

열심히 못하고 잡념만 들어요
되든 안되든 끝까지 써내야 하는데......
나의 무기력과의 싸움이 이 책을 쓰는 나의 여정일듯합니다
정말이지 지루한 이싸움 빨리 끝내고 훨훨 날고 싶어요

언니의 긴 칼럼같은 댓글에 뭐라 감사를 드려야 될지 몰라 두서없이 씁니다
언제나 늘 많이 감사해 하는거 아시죠? 사랑합니다.. 헤~~~~~emoticon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252 아이 방 드레싱 1 - 핑크와 파랑은 엄마의 취향? file [4] 불확 2011.03.11 3394
2251 칼럼. 남도에서 사랑을 만나다. [6] 연주 2011.03.08 2425
2250 응애 58 - 에필로그 [9] 범해 좌경숙 2011.03.08 1843
2249 [호랑이 실험 5: 멋장이 인디는 표범일까? 호랑이일까?] [6] 수희향 2011.03.08 1740
2248 [호랑이] 호랑이의 사례 [3] crepio 2011.03.08 1893
2247 결국 기다리던 연락은 오지 않는다 [6] 2011.03.08 2128
2246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4] 신진철 2011.03.08 1896
2245 [호랑이] 몇가지 생각을 정리해봤습니다 [8] 정세희 2011.03.08 1921
2244 응애 57 - 진정성에 관한 한 연구 : 호랑이 철학 4 [2] 범해 좌경숙 2011.03.07 1835
2243 6끼 열전 (졸업여행 후기) - 자유 file [19] 최우성 2011.03.07 1861
2242 '방법 없음이 방법' 나의 방법론. 맑은 김인건 2011.03.07 1891
» 칼럼-<종결기: 버림과 끝냄 2> - 2/2 [2] 박경숙 2011.03.07 2041
2240 발길 가는대로 물길 닿는대로 떠난 여행 [8] 이은주 2011.03.06 2265
2239 라뽀(rapport) 42 - 산다는 것 [2] 書元 2011.03.06 1719
2238 단상(斷想) 54 - 聖人(saint) 2 file [2] 書元 2011.03.06 1832
2237 우리, 정남진 흐린 주점에 앉아 있었네(수정본) [10] 박한평 2011.03.06 2169
2236 응애 56 -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3월 [2] 범해 좌경숙 2011.03.04 2307
2235 [호랑이: 4분면] 사례 추가 [2] crepio 2011.03.01 2110
2234 [호랑이 실험 4- Case Study: 사색하는 나무디자이너는 표범일까? 호랑이일까?] [6] 수희향 2011.03.01 1847
2233 [호랑이 실험 3: 실험키트- 수정본] [5] 수희향 2011.03.01 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