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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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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21일 00시 41분 등록

연달아 읽은 책 두 권에서 ‘낭만적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연히 새로 접한 사실이 다음 번 책에서 이어지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예를 들어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 일단 고미숙의 책이니까 구입해 놓았다. 하지만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이라는 소개와 두꺼운 양장본에 질려 언제나 읽으려나 막막한 실정이었다.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자천 필독서에 포함시켜 놓았었는데, 류시화역 “인생수업”을 읽고난 직후 무심히 들쳐 보았다.


그랬더니 웬걸, 두 챕터 정도 딱딱한 관문을 들어서자 마자, 18세 이상가의 자료들이 인용되면서 性과 몸, 앎과 글쓰기로 펼쳐지는 내용이 쉽고도 재미있기 그지없다. 연암과 푸코라는 두 師友에 대한 고미숙의 헌정 앨범이라는 이 책의 배치가 왜 이런지는 아직 아리송하다. 고미숙이 말하듯 이 책의 중심은 ‘몸에 대한 표상’이란다. 혁명이란 궁극적으로 몸을 바꾸는 것이고 우주로 통하는 건 우리의 몸뿐이기 때문이란다.


‘근대’를 알기 위해 ‘탈근대’의 바다로 나아간다는 저자의 의도를 모두 파악한 것은 아니고, 나로서는 최근에 읽은 “몸과 미학”과 “인생수업”과 겹치는 내용이 신기할 뿐이다. 지식은 지식에 연이어져 있어 나의 탐구열을 부채질하고 나로 하여금 계속 나아가게 한다.
요즘 느끼는 재미와 속도로 보자면 죽기 전에 도가 틀 것 같다. ^^


각설하고, 마치 복습이라도 하듯 “인생수업”에서 다룬 내용이 다시 한 번 “나비와 전사”에서 다루어져 있어, 내게 쓰고 싶은 아이템을 하나 던져 주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제목인즉 <‘낭만적 사랑’이라는 허구>

“인생수업”의 3장 ‘관계는 자신을 보는 문’에서 주로 다루어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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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낭만적인 사랑, 곧 연애만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까이에 있는 사랑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의 수만큼이나 주위에 많습니다.
이성과의 사랑은 분명 아름답고, 존재의 기쁨을 일깨워주지만, 문제는 상대방이 우리의 삶을 바로잡아 줄 것이라 믿을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모든 개구리가 왕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특별한 누군가를 찾을 때까지는 자신이 반쪽에 불과하고, 완벽히 맞추어져야 하는 퍼즐의 일부라는 동화에 세뇌되었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우리의 삶을 치유해 주는 것은 동화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완전한 삶은 당신 자신 안에서부터 나와야 합니다. 미혼의 당신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면, 특별한 누군가를 만난다 해도 결혼한 실업자일 뿐입니다. 이상적인 짝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그런 무력감은 언젠가는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도 생겨날 것입니다. 당신이 찾고있는 완전한 모습은 당신 안에서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배울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스승이 나타나듯이, 당신이 관계를 맺을 시기가 되면 ‘특별한 누군가’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도 당신은 충분히 가치 있고 사랑스런 존재입니다. 당신은 이미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 해답은 낭만적인 사랑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더 많은 사랑을 원한다면, 당신의 삶과 사랑에 빠져야 합니다.

모든 관계는 상호 작용입니다. 곧 관계 속에서 서로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으며, 그들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상대방을 더 좋게 고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언제나 당신이 중심입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만들고 있습니다. 상대방은 당신의 문제와 당신 자신을 들여다보도록 독특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 뿐입니다.

또 모든 관계가 평생 동안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가 얼마나 오래 가는가, 또는 어떤 식으로 끝나는가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공적이고 완성된 관계란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계가 단지 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하더라도, 그 관계는 성공적이고 우리 자신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관계가 필요치 않을 때, 관계 그 자체는 성공적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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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수업”이 나긋나긋하게 잠언적 문체로 전달하고 있다면, 고미숙은 특유의 파워풀한 문체로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고미숙에 의하면 근대 이전에는 연애라는 감정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 가슴을 뜨겁게 하는 관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에는 충이나 효, 사제 간이나 도반들 사이의 우정과 의리 같은 가치들이 ‘백가쟁명’했고, 그 열정이 결코 성애만 못하지 않았다. 근대 이후 우리 문화의 핵심 코드는 사랑이다. 마치 사회 전체가 무슨 열병에나 걸린 듯이 사랑을 갈구하고 또 갈구한다.


근대에 이르러 욕망을 오로지 연애감정으로 치환해 버렸는데, 이는 연애를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불구자들을 양산하였다. 무의식의 판타지에는 무수히 많은 욕망이 흘러넘치고 성욕은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연애만이 삶을 떠받치는 지고한 가치가 되면서 연애이외의 다른 관계들은 다 별 볼일 없어진 것이다. 존재를 걸고 욕망을 투여할 만한 다양한 경로들이 막혀버린 것이다.


모든 문학작품과 TV드라마에서 ‘멜로의 순정과 씁슬한 권태’를 변주해내는데 둘 다 삶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결코 지상에 있지 않다. 저 아득한 천국의 계단에서나 만날 수 있는 신화 같은 것이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춘향과 황진이를 각색하는 데까지 이른다.


판소리 <춘향가>를 보면 춘향은 절대 요조숙녀가 아니라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작업의 고수’라고 한다. 그런데 근대 계몽기 이해조가 개작한 <옥중화>로 변신하면서 춘향은 순정가련형의 절개의 화신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황진이역시 절세가인에 신비로운 여인상이기 보다는, 삶과 행보에 거리낌이 없었던 ‘중성적’ 캐릭터인데 근대적 코드와 맞부닥치면 생동하는 에너지는 사라지고 미모와 사랑타령만 남는다는 것이다.


고미숙은 삶과 유리된 근대적 사랑의 허구에 비해, <옹녀>와 <대장금>의 사랑을 내세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변강쇠가>가 판소리인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 조상들이 그처럼 엽기적인 ‘하드코어’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1971년 박동진 명창이 <변강쇠가>의 창을 복원하였고, 80년대 후반에 빨간 딱지 영화 붐으로 하여 변강쇠와 옹녀가 바야흐로 범민족적 지명도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옹녀’나 ‘덴동어미’같은 근대 이전의 여성상은 실로 험난한 인생유전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원망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너끈하게 갈무리함으로써 삶을 충만하게 채운다. 그녀들을 밀고 간 건 연애와 사랑이라는 초월적 이념이 아니라 오직 삶의 구체적 실감이었기 때문이다. 장금이역시 궁중에서건 유배지에서건 수라간에서건 내의원에서건 늘 무언가를 배우고 터득해간다. 어디서건 새로운 스승을 만나고, 동료들과 깊은 우정을 나눈다. 그녀의 사랑은 그것들과 함께 간다. 삶의 유형과 사랑의 유형은 나란히 간다. 장금이에게 연인에 대한 사랑은 다른 것들에 비해 작지도 않고 최종 심급이 되지도 않는다.


장금이에게 사랑이란 삶의 모든 과정을 멈추게 하고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사랑들과 함께 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진입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름하여 ‘걸으면서 사랑하기’!


고미숙의 ‘근대와 사랑’에 대한 분석은 흥미롭게도 글쓰기의 영역과도 연결된다. 2005년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가보니, 한국관은 주빈국답게 멋지게 장식이 되어있더란다.
정면 벽에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전신상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엔 오직 소설가와 시인들 일색이었단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문장이라면 정치와 경제, 사상,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있어야 마땅한데 오직 소설과 시만이 대표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文이 사대부의 삶의 전부였다. 文이란 ‘우주의 비의’를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에 문장의 표현 형식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웠다. 연암이 말했듯 “대체 이 천지간에 흩어져 있는 것 가운데 책의 정기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천지자연의 흐름을 ‘절단, 채취’할 수 있다면 어떤 유형의 것이든 무방한 것이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어떤 대상과도 접속할 수 있고, 접속의 순간이 바로 글이 탄생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삶이 곧 글이고, 글이 곧 삶이 되는 경지.


그에 반해 근대적 글쓰기는 문학이 특권적 지위를 확보함에 따라 그 영역이 현저히 축소되고 삶과 맺는 관계가 지극히 얇아졌다. 그런데 문학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 여전히 ‘근대적 사랑의 허구’라면 우리의 정신적 자산은 형편없이 위축되는 셈이다


문학도 아니고 문학 아닌 것도 아닌 새로운 장르들이 범람해야만, 글쓰기는 근대적 영토를 넘어 삶과 온전히 대면할 수 있다고 고미숙은 주장한다. 우리 연구원들의 글쓰기에 대한 이론적 관계망을 획득하는 기분이다. 사랑이건 글쓰기이건 의존하지 말 것, 과장하지 말 것, 한정짓지 말 것, 그리하여 종내에는 삶의 진솔한 속살과 대면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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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7.31 00:08:50 *.145.125.146
ㅋㄷㅋㄷ
죽기전에 도 통하겠다는 데 한표 던집니다.
요글 프린트 해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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