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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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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6일 14시 37분 등록
안도현 - 바닷가 우체국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 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 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 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서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 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 속 주머니에 넣어 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 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 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 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 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________________

아침에 어느 분 때문에 좋은 시 하나를 읽었습니다.
시를 읽으며 명치 끝이 아려오더군요.
어린 시절 간혹 타보던 기차에 대한 추억을 반추하다 이 시를 떠올린 그 분은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 우리에게로 달려온다'고 적고 있습니다.
300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이 표현에 그토록 내가 공감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같은 40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이듦'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이 나이가 정녕 축복이라고
이 아침, 자신에게 우겨봅니다.
한 편의 시 때문에 제 속에서 많은 것이 아우성을 치며 올라옵니다.
상처? 그것이 없으면 인생이 그토록 다채롭고 무궁한 세계가 되진 못할 것 같습니다.
한 여자 보다는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은 아닐까,
그래서 이 슬픔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봅니다.
안도현씨의 시, 꼭 나의 시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그 친구도 이 시를 나와 같은 40에 쓰지 않았을까...요?

IP *.51.218.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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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주
2008.05.07 06:30:29 *.221.78.72
고향의 노부모님을 뵙고 오면서 '나이듦'의 서러움을 구석구석 훔치고 왔습니다.

간절한 염원 하나,'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계절은 눈이 부신데 마음은 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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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5.07 15:48:04 *.248.75.5
희주언니 반가워요, 시축제는 그대를 위한 잔치같아요.
초록빛 시심을 마음 속에 담고 일상을 사시니 행복하시기도 하겠고,
외롭기도 하겠습니다.
외롭다는 것이 때로는 산다는 것의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제야 우리는 알지요.
이 지면에서 자주 뵈니 좋아요.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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