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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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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1일 01시 06분 등록
 

 



습관적으로 쓰는 말을 ‘관용어’라고 한다. 대개의 인사말이 그렇다. 내게도 ‘안녕하세요?’는 관용어다. 하지만 ‘어떻게 지내?’, 이건 아니다. 누군가 이런 인사를 건네면 내 머릿속은 엄청나게 바빠진다. 정말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정확하게 대답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답한 적이 없다. 일상의 오만 가지를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을까. 그것도 웃으면서. 그래서일까. 내 속엔 차마 정리되지 못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우글거린다.


내가 말을 잘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 이런 이유이다. 짧은 인사말을 제대로 받아넘기지 못하다보니 그 뒤에 이어지는 대화도 어리벙벙, 뒤돌아서면 후회하고 자책하고, 결국엔 말을 아끼다가 집에 돌아와서 일기장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냥 인사로 건넨 말에 인사로 답하면 그만인 것을 그걸 할 줄 모른다. 미련 곰탱이다. ‘응. 잘 지내!’ 그 한마디면 자연스레 다음 얘기로 넘어갈 것을 늘 쭈뼛쭈뼛하다가 그냥 찌그러져버린다. 그 초라함이라니.


문제는 또 있다. 내가 건넨 인사에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낸단 답을 들으면 괜스레 서운해진다는 것이다. 성의 없이 대충 말한 것만 같아서 허전해진다. 진짜 잘 지내는 거야? 정말? 난 아닌데. 그냥 말만 그런 거 아냐? 아니지, 사실일 수도 있지. 저렇게 환하게 웃는데 정말 잘 지내는 지도 몰라. 어쩜. 부러워라. 이러면서 또 쭈뼛쭈뼛하다가 찌그러진다. (속으론 다시 묻고 싶은데 참는 거다. 어머, 진짜 잘 지내? 어떻게?)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잊고 산다. 그러다가 책을 읽는 날, 어떤 글귀에 어딘가가 흔들리면 내 안에 고여 있는 생각의 소리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어딘가에 눌려있던, 뭉뚱그려있던, 감추어져있던, 꼬여있던, 뒤섞여있던 것들이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 된다. 그런 날, 나는 글을 쓴다. 물론 그때의 그 상태 그대로 풀어내진 못한다. 하지만 그 비슷한 느낌으로 가려고 노력한다. 내가 풀어내고자 하는 것과 글로 정리된 것이 비슷하면 된 것이다.


글로 정리된 나는 또 다른 내가 된다. 새롭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까지 글이 안내해줄 때도 있다. 신통방통한 ‘언어의 마술’이다. 그런 자신이 싫지 않으니 자꾸만 시도하게 된다. 자꾸 하다 보니 이것도 중독이다. 뭔가 풀려 있지 않은 채로 산다는 것에 답답증까지 더해져서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곤 한다. 언제 어떤 글귀가 나를 흔들어 깨워 종소리를 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허허벌판에서 살 수 없어서 벽을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벽 속에서 살기가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창인 그림을 그렸을 것이고, 벽에 붙였을 것이고, 실제로 상처를 내어 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자연과 만났을 것이다. 가끔씩 나는 내 창을 연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언제나 변함없이 푸른 하늘처럼 열리는 모니터 창엔 늘 ‘새로운 시작’이 나를 맞는다. 나는 여기 이곳에서 새로운 나를 만난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리움이 글이 되었을까. 그리움이 그림이 되었을까. 허공은 그림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 자체가 이미 완벽하기 때문이다. 나도, 자연스럽게 스스로 그러한 상태를 꿈꾼다. 노력해볼 일이다.


그거 아나? 우글거리는 내 마음을 글로 정리하다보면 내가 아주 예뻐 보인다는 거. 말을 제대로 못해서 사람들과 함께할 땐 어리바리하지만 언제든 정리하면 된다는 여유를 부리게 된다는 거. 느리게 정리하며 만난 새로운 자신을 통해 또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고 있는 내가 진짜 귀엽다는 거. 사랑스럽다는 거. 그래서 거울을 보면서 웃게 된다는 거. 요거요거, 누가 뭐래도 괜찮은 중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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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03.21 21:03:33 *.108.50.124
음... 미영씨를 한 걸음 더 이해하게 해 주는 글이로군요.
'언제든 정리하면 된다' !  그렇고 말고지요.
글쓰기라는 든든한 빽이 있으니 다시 신발끈 고쳐 매고 걸어갈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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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2010.03.23 06:26:32 *.210.11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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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10.03.22 22:02:00 *.160.33.180

나는 어리버리 미영이가 요즘 예뻐 죽겠다.  매주 글이 올라오고 있다.  더 빨리 올라 올 때도 있다. 
아마 그것은 다음 책의 훌륭한 거름이 될 것이다.  
그녀는  절반만 연구원인 객원연구원이었다.  그러나 그녀야 말로 진짜 연구원이다.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그녀는 이 홈페이지를 사랑하고,  여기에 자신을 쏟아 넣는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주인임을 증명한다.   그녀가 돌아왔다.   오리는 날 것이다.  발끝에 호수를 달고  훤한 달 사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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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2010.03.23 06:22:10 *.210.111.178
실천은 너무 늦었고, 칭찬은 너무 빠르십니다.
늘 감사합니다.
모두 선생님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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