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김미영
  • 조회 수 2172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10년 5월 30일 14시 53분 등록



남녀가 헤어지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싫어졌다. 그와 함께 있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훨씬 편했다. 그에게 말하거나 간섭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사랑받는다는 느낌 없이 살아가는 일상이 괴로웠고 참기 힘들었다. 아이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참고 사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책임의 시간을 피하고만 싶었고, 생명을 책임진다는 절대적인 책임감을 놓고만 싶었다. 그리고 알았다. 남편의 말 한마디를 트집 잡아 그를 비난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는 것을. 그래서 얘기했다.


여보, 우리 이혼하면 행복할까?


결국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부모들이 살았던 삶을 반복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끊임없이 희생하며 참고 살아온 나의 엄마는, 내겐 벗어날 길 없는 정신의 감옥이었다. 문득 돌아보니 단순하고 지루한 일상의 죽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나와 엄마, 우리는 인간으로서 같은 길을 시간차를 두고 걸어갈 뿐이었다. 그렇다면 내 아이들도?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남편과의 관계가 절전모드로 겨우 돌아가고 있던 나는, 왜 이혼을 하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고민의 결과, 나는 일을 선택했다.


나이를 더한다는 건 또 다른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희망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희망을 희망했다. 그러려면 독립해야 했다. 더 망설일 이유 없이 선택한 ‘일’이라는 엄청난 괴물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절망했다. 단절된 경력으로 사회에 내딛는 무거운 발걸음은 낯설고 힘겹기만 했고, 방치된 아이들은 아파했고, 여전히 적으로 존재하는 남편과의 전쟁은 내게 남아있던 아주 작은 기대마저 포기하게 했다. 왜 그는 내게 그토록 화를 냈을까? 왜 그는 내 눈물을 외면했을까? 함께 하지 못한다면 각자 사는 수밖에 없었다.


여성문제, 육아문제는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과 사회, 국가, 더 나아가 인류가 함께 공적으로 풀어야 할 중요한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리고 남편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남들이 말하는 ‘멋진 가장’이 되기 위해 밖으로만 나돌았고, 남들이 말하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일과 가정에 치여 자신을 속이며 미친년처럼 뛰어다녔다. 어차피 세상은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며 변하고 있고, 그 안에서 영향을 받는 사람들도 계속해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외면한 채로. 하지만 자신이 주인인 여자가 좋은 여자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여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속인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나쁜 여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각자 하면 되지 않을까? 남편에겐 이미 아무런 매력 없이 일상만 남은, 늘 벽에 걸려 있는 그림처럼 평범해진 나는, 내 열정을 쏟고 함께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낭만적인 분위기와 감각적인 즐거움을 원하는 내 감정에 나 자신을 열어놓고 싶었다. 인생에서 뭔가를 놓쳤다는 느낌으로 자책하며 살고 싶진 않았다. 잃어버린 설렘과 강렬한 에너지를 되찾기 위해 다른 길을 찾아서 선택하고 싶었다.


마흔을 앞둔 그해 가을, 내 몸은 바스락거리며 쓸쓸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집으로 오는 길의 아이들 목소리는 그저 사는 이유였다. 남편과의 대화는 악다구니와 흐느낌으로 끝났고, 눈물로 화장을 지우곤 했다. 그때, 그를 만났다.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시를 쓰는 그와 함께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을 가고 동물원을 갔다. 전쟁 같은 일상의 나른한 휴식이자 아득한 꿈같은 달콤함인 짧은 만남을 향해 부푼 가슴을 안고 벅차게 날아갈 듯 집을 나선 그날 오후, 남편의 문자를 받았다.


나 바보 아니야. 남자 생겼니?



201022019726750.png


IP *.9.79.211

프로필 이미지
신진철
2010.05.30 22:06:35 *.221.232.14
지금이 딱 일요일 열시네요. 커피 한잔을 단단히 만들어 먹고서... 자리에 앉습니다.
10분의 카운트다운을 세면서, 당신의 글을 한 호흡으로 읽어 내려갑니다. 뭉클...
남자생겼니? ... 니 잘못은 아냐.
당신의 글에, 당신의 삶에... 힘이 되어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온통 사랑하라고...
사랑하라고만 말하면서,
정작 사랑한 죄를 묻습니다.
참 억울한 노릇이지요...
기가막힐 노릇이지요...

절대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미영
2010.06.02 12:18:21 *.9.79.211
emoticon
프로필 이미지
정야
2010.05.31 14:17:18 *.12.20.229
현실감있는 이야기에 참~ 공감이 되네요. 이혼은 순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자신이 주인인 여자가 좋은 여자다.' 이 말 참 좋네요.
사랑이야기 이후로 펜이 되었어요. 늘 응원보내욤~~^^ 
프로필 이미지
미영
2010.06.02 12:19:47 *.9.79.211
emoticon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960 6-2칼럼 나이가 경쟁력, 사골곰탕처럼 푹 고와야 진국이... [2] 윤인희 2010.06.06 2445
2959 [오리날다] 내 여자의 남자 file [4] 김미영 2010.06.06 2849
2958 '마려움'과 '고품' [3] 써니 2010.06.05 2034
2957 [오리날다] 나의 행복은 너의 불행 file [2] 김미영 2010.06.05 2181
2956 딸기밭 사진편지 36 / 위로 file [2] 지금 2010.06.04 2203
2955 정서적 허기 / 하지현 [4] 지금 2010.06.04 2862
2954 20주년 결혼 기념일 [1] 지금 2010.06.03 5193
2953 딸기밭 사진편지 35 / 사이 file [1] 지금 2010.06.02 2597
2952 비오는 화요일 아침 [3] 신진철 2010.06.02 2163
2951 [오리날다] 미친년 file [13] 김미영 2010.06.02 2354
2950 칼럼따라하기-13<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4] 청강 경수기 2010.05.31 1887
2949 [칼럼 13]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3] 신진철 2010.05.31 2109
» [오리날다] 니 잘못은 없었어 file [4] 김미영 2010.05.30 2172
2947 딸기밭 사진편지 34 / 소풍 file [1] 지금 2010.05.29 2181
2946 딸기밭 사진편지 33 / 관계 file [2] 지금 2010.05.27 2143
2945 봄의 아이들에게 [1] 김나경 2010.05.27 2163
2944 마주 앉은 거리만큼 일 때가 행복입니다 file 지금 2010.05.26 2084
2943 엉덩이 file [4] 진현주 2010.05.25 2502
2942 딸기밭 사진편지 32 / 2일 하늘 file [1] 지금 2010.05.25 2039
2941 칼럼따라하기12<절박할 때 비로소 글이 써지는가?> [7] 청강 경수기 2010.05.24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