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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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목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도 살다보면 스스로의 일과 방향에 대해 불신하는 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반복되고 길어지다가 깊어지면 삶 전체를 회의하게 되는 날마저 만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일과 노동에 대한 의심, 그리고 삶의 방향에 대한 불신은 충만한 삶의 가장 강력한 적입니다. 이런 때는 부정적인 언어가 끝도 없이 솟구칩니다. 회의적인 예측이 밀물처럼 몰려옵니다. 이때는 벗어나서 비우고 자각하여 새로워질 시점입니다.
자각은 채우고 있는 그 사태로부터 벗어날 때 마주할 수 있습니다. 용을 써 봐도 해소될 기미가 없으면, 아니 해소되기보다는 점점 더 의심스러워진다면 나는 일단 내버려두고 좀 벗어나보라고 권합니다. 하릴없이 걷거나 산을 오르거나 시장 골목을 배회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누구를 만나 조언을 듣는 것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이 너무 가득 차 있으니까요. 우선 비워내야 새로운 것이 채워지는 법인데, 비우지 않은 상태에서 듣는 조언은 내 안으로 들어설 공간이 없으니까요. 할 수만 있다면 기약하지도 목적하지도 않고 훌쩍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아주 강력하고 훌륭한 방법입니다.
벗어나 있는 시간을 제대로만 보내고 나면 어느 순간 가슴 안에 복잡하고 단단하게 들어서 있던 돌덩어리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는 날이 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어떤 인연이나 장면을 통해 일어섰던 의심과 불신의 마음이 가라앉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 언어와 생각이 늦가을의 낙엽처럼 쏟아지듯 떨어지고 가벼워지는 느낌이 포착됩니다. 이때도 중요한 것은 서둘러 무엇을 채우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덩어리가 차지했던 가슴이 서서히 말랑해지고 그 안에서 무언가 부드럽고 새로운 기운이 움트는 것을 충분히 느껴야 합니다. 그런 나를 희롱하듯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좌절하고 엎어지게 된 그 땅바닥의 온도와 질감과 냄새를 있는 그대로 충분히 느끼는 편이 좋습니다.
그 위에서 일과 삶에 대한 새로운 신념이 싹트고 그 신념을 믿고 일어서면 됩니다. 모든 걸 잃어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벗어나 진정으로 마주한 가장 낮고 텅 빈 바로 그 지점에서 바로 그 새로운 신념을 따라 일어서는 겁니다. 그렇게 일어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은 가치관이 바뀌기 쉽습니다. 그는 궁핍 때문에 작아지지 않습니다. 일과 노동이 지우고 싶은 하루의 시간으로 삶을 가로막지도 않습니다. 일과 생활이 합일 하는 경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얼른 일을 끝내고 일상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자신의 삶과 노동이 분리된 괴리감 가득한 나날을 보내지 않습니다. 노동을 통해 충만해집니다. 노동 후의 휴식을 통해 밤과 어둠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내게는 여우숲에 오두막 흙집 백오산방을 맨 손으로 짓던 나날들이 그랬습니다. 가장 고된 노동을 경험한 그때, 나는 그 노동을 얼른 끝내고 다른 일상을 살고 싶단 생각을 단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전의 삶에서 마주했던 내 일과 삶의 방향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나날들은 ‘비워내기 산행’ 2년여의 시간을 겪고서야 비워졌습니다. 그리고 비워진 자리에서 다시 서서히 새로운 신념이 나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삶은 새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내게는 무엇도 나를 작아지게 만들지 않는 삶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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