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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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때 일입니다. 조별로 과제를 하는데, 하필 왕따인 근석이가 우리 조에 끼게 되었습니다. 작은 키에 헤진 옷, 항상 어깨를 수그린채 바닥을 보고 다니는 근석이를 좋아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조장인 나뿐만 아니라, 다른 조원들 모두 근석이를 투명인간 대하듯 무시했습니다. 괜히 일을 맡겨봤자 골치만 아플거라는 생각에 모두 동의한 듯 했습니다.
휴일 오전 과제를 위해 모이기로 했습니다. 그 자리에 근석이도 나왔습니다.
"재, 왜 온거야?"
"그러게, 눈치도 없네"
"야, 그러지 마, 그냥 냅둬"
조장인 나는 어쩔수없이 근석이 자리를 만들고, 근석이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햄버거와 음료를 사려고 돈을 모으는데, 근석이 주머니에서는 동전 한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기만 돈을 안 가지고 나온 걸 안 근석이는 안절부절했습니다.
"야, 너는 돈도 안 가지고, 여기는 뭐하러 온거니?"
여자아이 한명이 쏘아붙인 말에 근석이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만해, 내가 근석이꺼 낼께"
어쩔수없이 근석이 몫을 내가 부담하기로 하자, 상황은 일단 정리되었습니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근석이가 나를 따라왔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근석이는 주눅 든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습니다.
"민규야, 고.... 고마워"
딱히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 나는 이렇게 대답해줬습니다.
"괜찮아, 친구잖아"
별뜻없이 한 말이었습니다. 같은 반 급우니까요. 그런데 다음 날부터 근석이가 자꾸 내 주위를 멤도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다른 친한 친구들이 근석이에게 면박을 주기도 했지만, 근석이는 항상 한 두 발짝 떨어져서 내가 가는 곳을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런 묘한 관계는 계속되었고, 서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근석이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사업에 부도가 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설상가상 어머니마저 말기 암으로 쓰러지셨습니다.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위태롭게 버티시던 아버지마저 뇌졸증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원룸에서 아버지를 모시며 병원비까지 벌기 위해 낮에는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속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 듯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취업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들과 나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이제 나는 혼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기댈 사람이 없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장례 마지막날 텅빈 아버지 빈소를 지키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얼굴 하나가 불쑥 나타났습니다.
근석이였습니다. 작업복 차림의 여전히 작고 엉성한 그는 아버지 영정에 절을 하고는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내게 내일었습니다.
"이게 뭐야?"
보따리를 풀자 술 담그는 큰 병 하나가 나왔습니다. 그 속에는 500원짜리 동전이 가득했습니다.
"나, 세차장에서 알바하면서 팁으로 받은 동전들 모아둔거야. 경황이 없어서, 지페로 못 바꿨네. 미안해"
툭.
근석이의 말을 듣고 한참을 마냥 서있던 내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떨어졌습니다.
"고맙다... 근석아..."
근석이는 코에 걸린 안경을 위로 치켜 올리며 씨익 웃었습니다.
"뭘, 친구잖아"
그로부터 9년이 흘렀습니다.
"어때, 예쁘지?"
아내가 술 담그는 병을 리본으로 장식해서 내게 내밀었습니다. 그 속에는 알록달록 가지가지 사탕과 초콜렛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오늘은 근석이의 카센터 개업식이 있는 날입니다. 부부동반으로 참석해서 친구의 성공과 행복을 기원해줄 것입니다. 근석이와 나는 지금 세상 둘도 없는 친구 사이입니다.
한설의 <오늘 나에게 약이 되는 말>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각색한 것입니다.
"우리는 받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고 주는 것으로 인생을 꾸린다"고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말한 바 있습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그 시작은 먼저 주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남은 한 주 베품과 배려로써 따뜻한 시간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넉넉한 설연휴 되시기를 기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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