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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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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5일 12시 11분 등록

 아이가 백일이 지나 본격적으로 나들이를 다니고 있습니다. 어차피 생후 몇 개월 안 된 아이에게 이곳저곳 보여줘 봤자 당연히 기억은 못 하겠지만 바깥세상을 돌아다닐 때마다 아이가 흥미로운 눈동자로 두리번거리는 걸 보니 가급적 며칠에 한 번은 긴 외출을 하는 편입니다. (물론 엄마 아빠도 기분전환이 필요하고요!)


 아이와 나가면 미리 체크해야 할 사항이 몇 가지 있습니다. 수유실이 있어 기저귀를 갈거나 세면대가 따로 있으면 일단 괜찮습니다. 유모차를 대여해 주는지, 주차 공간이 넉넉한지, 엘리베이터가 잘 되어 있는지, 입장료는 합리적인지 같은 조건을 여럿 따지다 보니까 제일 만만하게 갈 수 있는 곳은 국립 기관, 즉 박물관입니다. 평일 낮 시간에 방문을 하면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장점입니다.


 가장 최근에 갔던 박물관은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이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야 여러 번 갔었지만 아이와 함께 가는 것은 처음이라 아이가 좋아할지 어떨지 궁금했습니다. 한가한 주차장에 널찍하게 주차를 하고 유모차를 정비해서 아이를 태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중앙박물관 홀에 올라갔습니다. 더운 초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에어컨이 필요 없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박물관 전시실에 들어가기 전에 아이의 상태도 살필 겸 박물관 기념품 숍을 둘러보았습니다. 온라인 상점에서는 예약을 받는 변색 선비 술잔(술이 담기면 잔에 그려진 선비 그림의 얼굴이 빨갛게 변합니다)을 오프라인 상점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었고, 마침 아이에게 부쳐주던 부채가 부러져서 하얀 부채에 분홍 꽃 민화가 그려진 새 부채를 샀습니다. 아직 아이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아서 본격적으로 전시실로 입장했습니다.


 최근 저는 한국사를 공부할 일이 있었는데, 역사를 배우고 박물관에 가니 모든 전시가 다 흥미로웠습니다. 오랜 시간 박물관에 잠들어있던 유물이 생생한 과거의 전달자가 되어 저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국립중앙박물관이면 우리나라의 모든 유물이 다 모이는 곳일 텐데, 그중에서도 상설 전시가 되어 있는 유물은 상당히 의미가 있거나 희귀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교과서로만 보던 유물들이 주먹도끼부터 시대에 따라 멋지게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뛰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기 띠로 안겨 있는 아기에게 아는 유물을 잔뜩 설명해 주었습니다. 유물이 어디서 발견되었고, 발견되기 전에는 어떤 학설이 있었는데 이 유물로 인해 파기되었고, 어떤 인물이 관련되어 있고, 시대별로 어떤 특징이 있어서 유물에서 그걸 찾아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줬습니다. 패총을 보여줄 때는 나중에 아이가 좀 크면 실제로 우리 집 쓰레기통을 보며 기록이 없었을 때의 조사는 쓰레기통을 뒤져서 뭘 먹었고, 뭘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거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조선 시대 전시실에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왕인 정조와 정약용의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아이가 열심히 설명하는 저를 열심히 쳐다보길래 저도 더 신나서 이야기했습니다. 박물관 중앙 홀에 전시되어 있는 경천사지10층석탑에 얽힌 이야기도 해주었더니 까르르 웃으면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혹시 다 알아듣는 건가? 우리 애 설마 천재인가’하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어린이집 선생님이었던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박물관을 좋아하는 엄마가 즐거워하는 걸 보고 재밌어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었습니다. 그전까진 음악가 부모에게서 음악을 잘 하는 아이가 태어나고, 운동선수 부모에게서 새로운 운동선수가 탄생하는 것을 유전자부터 다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고, 좋아하게 되고, 잘 하게 되는 것은 부모의 영향력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하얀 종이 같은 아이의 세상에 부모가 좋아하는 것들을 영업하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저나 언니의 경우를 돌이켜보면, 영업한 분야의 어떤 점을 좋아하게 되는지는 아이마다 달라서 100% 똑같은 취향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부모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것들이 아이 취향의 기원 중 하나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부모가 좋아하는 것이 아이가 세상을 보는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보면 취향이 생기는 경로는 다양합니다. 몇 가지 생각해 보면, 일단 시대가 권하는 것이 있습니다. 유년기에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핫한 것, 지금으로 치면 K 팝 같은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유행하지 않아도 내 마음에 꼭 들어맞는 것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이것이 애니메이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가족이 좋아해서 자연스레 알게 된 정보량이 늘어나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고전이나 클래식 음악 같은 것이 있습니다.


 마치 안톤 체호프의 단편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나의 취향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요.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취향에 참 줏대가 없다고 비웃었는데 지금 보니 이 소설은 우리가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한 가지 경로를 담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꼭 연인의 취향만을 흡수할 필요는 없겠죠. 사랑하는 부모님이 좋아하는 것, 그것이 아이의 취향이 된다니 부모 입장에서는 참 신선하고 가슴 뛰는 일입니다.


 여러 경로로 모인 여러 가지 취향이 제 마음의 선반에 가지런히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내가 살아오며 모은 것들이고, 결국 나의 마음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차게 되고, 그만큼 내가 사는 세상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이와 박물관을 다녀오며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마음도 이 세상에서 발견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영업을 할 만큼 좋아하는 것이 있으신지요. 좋아한다는 것은 강력한 힘입니다. 혹시 딱히 좋아하는 게 없으시다면 하나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무언가를 좋아해도 세상이 바뀌지는 않지만 무언가에 빠져사는 동안은 삶이 참 행복해집니다. 또한 나의 취향이 기원이 되어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재밌어하면 할수록 다른 누군가에게도 즐길 거리를 전할 수 있다니 참 남는 장사가 아닌가 합니다.

IP *.208.25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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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09:55:32 *.97.54.111

하나 밖에 없는 외손주는 현재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
아이는 이쁘지만 뒷바라지 하느라 딸과  아내는 
늘 힘들어했습니다.
어니언 님은 힘든 내색 안하고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니
따뜻한 영상이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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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8 12:38:22 *.166.87.118

아이를 키우는 일에는 기쁨과 힘듦이 함께 오는 것 같습니다.

아마 따님과 아내분의 마음속에도 두 가지가 한꺼번에 담겨 있을 것 같네요! 

마구마구 응원해주시고 맛있는 것도 사주시면 두 분이 아주 좋아하시면서 멋진 이야기를 꺼내실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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