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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8일 20시 51분 등록

<꼭지19. 친구를 떠나보내며…>

연말을 앞두고 회사에서 처음 쓰는 휴가를 맞아, 기분 전환을 위해 눈썹을 그리고 붉은색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오래간만에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마침 휴가날짜가 같은 친구와 동해로 놀러 가거나 헤이리에 있는 북카페에 가서 바람을 쐬고 올 생각에 기분이 좋다. 학교 앞 카페에서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무렵, 친구가 도착했다.

 

어디 갈까? 지금 동해 가면 차가 너무 막히겠지?”

연말이라 아마 차가 많겠지??”

그래, 그럼 헤이리에 가자. 북카페 괜찮아??”

, 좋아~!!!”

 

새해가 오기 전에 머리 속에 뒤엉켜 있는 생각들을 정리할 계획이다. 책에 대한 것도, 신년이 되면 많은 이들이 하는 새해 계획도 세우고, 새로운 환경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쓸 생각에 왠지 신이 난다. 가는 길에 왠 모르는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ㅇㅇ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경찰입니다. ㅇㅇㅇ씨 아시죠?”

? ,

ㅇㅇㅇ씨가 사고가 좀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최근에 언제 연락하셨나요?”

저희요? 화요일 저녁에 만났는데요.”

언제 헤어지셨어요?”

수요일 새벽에 헤어지고, 저는 집으로 가고 ㅇㅇ는 다른 친구랑 같이 친구네에 갔어요.”

ㅇㅇㅇ씨 수요일 저녁에 누굴 만나러 간다고 전화를 받으면서 나갔다는데, 혹시 누구 만났는지 아세요??”

아니오.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요? 혹시 ㅇㅇㅇ씨 최근에 무슨 힘든 일이 있었나요?”

 

친구의 사적인 부분을 물어보는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가 온 것도 당황스러운데, 다짜고짜 친구의 신상과 사생활에 대해 너무 무례하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진짜 경찰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으니 말이다.

 

아니, 지금 전화하신 분이 누구시라고요? 확실히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데 그런 걸 말씀드리기는 좀 곤란한데요.”

, 저 ㅇㅇㅇ에 있는 경찰 맞고요. ㅇㅇㅇ씨가 수요일 저녁부터 연락이 안되고 있다가, 사고가 나서 확인하려고 전화드린겁니다.”

아니, 무슨 사고가 났는데요?”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ㅇㅇㅇ씨가 사망했어요. 그래서 전화 드린겁니다. 최근 통화목록에 미나씨가 있어서요.”

 

순간 나는 숨은 멎는 줄만 알았고, 눈 앞이 하얘졌다. 그리고 그 순간만은 온 세상이 조용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망이라니? 엊그제 함께 영화보고 저녁에 술 한잔 하면서 잘 놀고 헤어진 친구인데 믿을 수가 없었다. 전화가 오기 전날인 목요일 저녁에 다른 친구에게 연말에 집에 모여 같이 놀자고 전화가 왔었다. 그리고 이 친구가 연락이 안된다길래, 전화를 끊자마자 전화를 했었다. 하지만, 내 전화 역시 받지 않았다. ‘바쁜가?’라고 생각하며 다시 전화를 걸진 않았다. 그리고 오늘 갑자기 그녀의 사망 소식이 내게 전해진 것이다.

 

최근에 무슨 힘든 일이 있었나요?”

 

길게 그리고 힘들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 쉰 뒤에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 힘든 일이요? 글쎄요최근에 교회에서 사람들이랑 좀 안 맞아서 힘들어 하긴 했는데요…”

교회 사람들이랑요? 남자친구는 없었어요? 최근에 남자친구랑 헤어졌다거나?”

아니오, 남자친구는 없었어요.”

그럼, 미나씨 수요일 저녁에 누구를 만나고 오겠다고 나갔다는데 누구랑 만나기로 했는지 알만한 친구가 있으면 통화해 보고 저한테 다시 전화 좀 주세요.”

, . 알겠습니다.”

 

가슴은 에스프레소 10잔을 연거푸 마신 것처럼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고,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끊고 엊그제 함께 있었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 볼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옆에서 운전을 하고 있던 친구가 일단 진정을 좀 하고, 장례식장에 태워주겠다고 한다. ‘사실일리가 없다. 영화도 재미있게 봤고, 그날 우리의 수다도 즐거웠다. 한달 전쯤 친구가 많이 힘들어 하긴 했지만, 그 때에 비해서 얼굴표정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안심하고 헤어졌단 말이다.’

 

지하철을 타면 30분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장례식장이 있었다. 하지만 친구의 죽음을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꽉 막힌 도로와 빨간색으로 바뀌는 신호등을 보며,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실을 마주할 그 공간에 영원히 닿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결국 그곳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목요일에 연락이 안 된다고 했던 친구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분향소가 아직 차려지지 않아,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구들이 장례식장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기나긴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눈물도 나지 않고, 추위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 다리와 내 몸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떨림을 멈추기 위해 걸었다. 그리고 돌아온 장례식장에는 친구의 영정사진과 함께 분향소가 차려져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그녀에게 꽃을 건넸다. 향을 피우고, 그녀의 영정사진에서 몇 발짝 떨어져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재작년, 꿈너머 꿈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7명의 친구들이 모였고, 우리는 1년간 각자의 속에 있는 이야기를 마구 털어놓았다. 볼꼴 못 볼꼴 다 보며 우리는 그렇게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 모임을 하는 동안 우리 7명은 각자의 인생에서 다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힘든 시기에 서로를 토닥여주면서 우리는 그렇게 힘든 시기를 잘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든 시기들이 찾아왔고, 그때마다 서로를 찾게 되었다. 처음 만남 이후 3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3일간 그녀의 곁에 머물렀다. 장례식 둘째 날, 친구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가족들에게 부탁을 하고,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를 보고 나오는 순간 그 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숨을 죽이고, 계속 울었다. 친구의 얼굴을 보니 그제서야 이제 더 이상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음이 실감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외로웠을 친구를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지난 1년간, 숙제해야 한다고, 돈이 없다는 핑계로, 만나자고 했던 그녀를 외면했던 이기적인 내 자신이 너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화요일 저녁 헤어지면서 꼭 껴안아 주지 못했던 것이, 얼굴 좋아졌다는 내 말에 어제도 울었어라는 그녀의 말을 무심하게 넘겨 버린 것이, 무엇이 너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지, 그녀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지 못한 것도 지난 기억들 하나하나가 모두 후회로 다가왔다. 힘들고 외로워하는 친구 하나도 지켜주지 못하는 나는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인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그렇게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인지. 견디기 힘들었다. 분노와 후회, 그리고 미안함이 뜨거운 눈물이 되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다음 날, 늘 내 곁에 있던 내 친구가 한 줌의 재가 되어 자그마한 상자에 담기는 것을 보고, 차디찬 겨울 산의 흙 속에 그녀를 남겨둔 채 나와 친구들은 서울의 친구 집으로 향했다.

 

 

<꼭지20. 친구를 기억하며…>

친구와 내 친구들은 그녀가 생전에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삼겹살을 먹고 그녀를 추모하며 함께 밤을 보내기로 했다. 친구네 집 앞에 도착해 삼겹살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목살과 삼겹살을 2인분씩 주문했다. 떠난 그녀를 위한 자리도 만들었다. 따끈한 국물이 먹고 싶어 시킨 잔치국수를 덜어 친구의 자리에 두었다. 그리고 젓가락을 올렸다. 그녀를 위해 빈잔에 맥주를 채웠고, 우리는 술잔을 부딪혔다. 친구의 영혼이 우리 곁에 있다면, 그녀가 분명 좋아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삼겹살을 구웠다. 상추에 고기와 파겉절이를 싼 다음, 그녀의 또 다른 접시에 올려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불을 붙인 담배도 함께 놓았다. 그녀가 담배를 피고 있는 것마냥 담배가 금새 타 들어 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와의 추억을 끄집어내며 웃고 떠들었다. 친구의 집에서 밤을 새며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추억하고, 기억했다. 친구 역시 이런 우리를 보며 흐뭇하게 웃음 짓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울고만 있으면, 주님 곁으로 떠난 그녀의 마음도 편치 않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웃고 또 웃는다.

 

친구야 외롭고 힘들 때 곁에 있지 못해서 미안하고, 니 얘기를 더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히 살고 있으렴. 우리 다시 만날 그날까지. 사랑한다, 친구야.

 

<꼭지21.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내게 남긴 것>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하면서 그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학교 친구들, 음악을 같이 했던 친구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친구는 그녀의 일부분일 뿐이었구나.’

 

모임을 하는 1년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후 2년간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음악을 전공하고, 프로페셔널 드러머였던 친구가 드럼을 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방황하던 시기에 그녀를 만났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지내는 동안 그녀가 드럼을 치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최근 다시 드럼을 시작하게 되고, 그녀의 연주를 마침내 볼 수 있는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녀가 떠나버렸다. 모임 이후 만나는 자리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오롯이 들을 수 있는 만남은 단 한번 뿐이었다. 그 날 그녀는 많이 울었고, 속에 쌓고, 쌓고 또 쌓아두었던 힘든 이야기를 아주 조금 꺼내놓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꺼내놓아야 할 이야기가 훨씬 더 많았을 것 같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그녀 모습을 이해하고,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늘 친구를 만날 때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어야 만나곤 했다. 그리고 내게 만남이란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항상 우선이었다. 나의 필요가 충족되고 나면 그제서야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늘 우리에게 시간은 부족했다. 그런 내게 그녀가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기대고 싶은 이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연락을 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그런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나를 그런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이제는 덜 이기적으로 살아야겠다. 친구가 부르면 언제, 어디서든 만사를 다 제쳐두고 뛰쳐나갈 수 있는 그런 친구가 되고 싶다. 물론 모든 이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거나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최소한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가족들을 조금 더 챙길 수 있는 사람이고 싶고, 친구들이 힘들 때면 언제든 편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꼭지22. 나는 단세포 생물이다>

친구와의 이별의 슬픔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화요일.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일할 때 필요한 스마트폰이 안 된다는 것이다. 몇 분 후, 엄마는 내게 다시 전화해 화를 낸다.

엄마가 몇 달 전부터 이 핸드폰 요금 빠져나가는 통장 바꾸라고 했지? 넌 도대체 어떻게 된 애가 이러냐? 맨날 주변 사람들한테는 온갖 친절은 다 베푸면서 가족들한테는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엄마가 밖에서 고생하고 일하는데 니 눈에는 보이지도 않지? 도저히 안 되겠다. 엄마는 너 너 혼자 독립할 수 있는 자금이라도 모으라고, 생활비 달라는 얘기도 안했는데, 너 생활비 나눠서 내.”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한마디 하고, 엄마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내게 화를 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친구 발인하는 날, 화장터에 있을 때 엄마가 전화를 했었다. 언제 올거냐고 물었다. 수목장을 하기로 했는데, 친구 장지까지 갔다가 갈거라고 했더니 엄마는 니가 뭐하러 거기까지 가냐. 수목장이면 선산에서 할텐데 가족끼리만 가면 되지 니가 굳이 거기까지 가야되냐며 나르 다그쳤다. 이렇게 친구 일에는 발 벗고 나서서 하는 내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거의 5일만에 엄마와 처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엄마가 친구는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다.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와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엄마는 조금 놀란 모양이다.

 

저녁 퇴근 길.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퇴근했어? 오늘은 어디로 가?”

. 오늘은 학교 앞에서 공부할 거야.”

그래? 우리 딸, 고생해서 엄마가 용돈도 주고 맛있는 거 먹으려고 했는데.”

??”

친한 친구 떠나보내고, 힘들었을텐데 엄마가 맛있는 거 해주려고 했지.”

 

전화를 끊고, 나를 이해해 주는 엄마의 말에 눈물이 났다. 엄마는 아침에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내게 그렇게 화를 냈던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하루 종일 마음이 안 좋았을 것이다.

 

화를 냈던 엄마의 전화를 받고,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속에 분노가 또 다시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엄마의 말 한마디에 모든 분노와 화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에 잘 챙기지도 못하고, 가족 안에서도 이기적인 딸로 살고 있는 나와 마주하니 애써 괴로운 마음이 앞선다. 2012. 새해에는 엄마와 대화하는 시간, 함께하는 시간을 좀 더 가져야겠다.

 

<꼭지23. 내가 행복한 순간을 찾아서-1>

금요일 오후. 주말이라 퇴근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오늘은 어디 가서 놀지?’라는 생각으로 한창 설레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온 몸에 있던 기가 쭉 빠져나가 모든 것이 귀찮고, 일하기도 싫고, 땅으로 꺼질 듯 몸도 마음도 축축 쳐지기만 한다. 게다가 무기력증까지 더해져 전혀 기대되지도, 설레지도 않는 우스운 금요일 오후다. 겨우 오늘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아직도 오후 5. 퇴근시간까지 1시간이나 남았다. 저녁에는 기분전환과 에너지 충전을 할 겸 홍대에 있는 나만의 아지트로 갈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혼자 있기가 싫다. 친구를 만나서 술을 만나고 싶지도, 수다를 떨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였으면 좋겠다. 애인이 있었다면, 애인에게 같이 있자고 했을까? 그랬을 것 같지도 않다. 술안주가 아닌 무언가 맛있는 게 먹고 싶다. 핸드폰을 열어 엄마에게 문자를 보낸다.

엄마,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사줘~~~”

이제 서른 살된 딸래미가 엄마에게 보내는 문자치고는 좀 유치하고 철없다 싶지만, 어쩔 수가 없다. 엄마에게는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쭉 어린애일 테니까. 곧이어 엄마에게 온 답장.

그려, 뭐 먹고 싶어?”

고기도 먹고 싶고, 회도 먹고 싶고, 아무거나~”

그럼 수산시장 회 떠갈까? 소고기 사가서 집에서 맛있게 먹을까?”

 

저녁에 엄마와 함께 와인을 곁들인 맛있는 저녁식사를 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그리고 퇴근시간까지 남은 1시간동안 무얼할까 잠깐 고민을 하다가. 얼마 전에 관심을 가졌던 팟캐스트 관련 자료를 출력했다.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책과 연결해서 생각나는 대로 하나둘씩 포스트잇에 쓰고 또 쓰기 시작했다. 진짜 1인 미디어가 되어 방송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쓰는 내내 왠지 설렌다. 활자와 독자와의 관계가 아닌 목소리와 청취자의 관계에서 책을 생각해 봤다. 그리고 나를 어떻게 소개할 것인지, 내가 왜 이 방송을 하려고 하는지, 어떤 순서로 읽어 내려갈 것인지를 하나둘 생각하다 보니 그 동안 고민하고 풀리지 않던 숙제들이 조금씩 해결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실제로 방송을 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가 물고, 책상에 코가 닿을 정도로 집중해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들을 포스트잇에 적어 내려갔다. 어느 정도 쓸 거리들이 떨어질 때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봤더니, 퇴근 시간 5분 전이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1시간 전의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에너지가 고갈되기 직전의 컨디션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갑자기 펄펄 날아다닐 수도 있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순간, 내가 왜 이러지?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변화라는 키워드인가?란 생각이 불현듯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조셉 캠벨의 <신화와 인생>이란 책에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았던 방법으로 내 인생에서 과연 어떤 것이 중요한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와 펜을 꺼내 들고, 평생 이것만큼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의 삶을 진정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키워드 7가지를 적어 내려갔다.

자유, 변화, 실험, 사람, 사랑, 깨달음, 여유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민은 된다. 왜냐하면, 내 삶을 진정 살만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서일까? 없는 경험 안에서 찾으려니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어두운 숲길을 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그 동굴 안에는 나무로 된 문이 있고, 그 나무문은 지옥문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가 서 있다. 그리고 내게 말한다. “당신이 그 중 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 내 놓으시오.” 나는 고민한다. ‘무엇을 내 놓아야 할까?’ 케르베로스에게 사랑이라 적힌 쪽지를 건네 주고, 문을 들어서서 다시 동굴 속을 걷는다. 그리고 두 번째 문에 도달했다.   번째 문에서 만난 케르베로스 역시 같은 질문을 한다. 고민하던 나는 사람을 내어 놓았다. 세번째 문에서는 실험을, 네 번째 문에서는 변화를, 그리고 다섯 번째 문에서는 여유를 내 놓았다. 그리고 여섯번째 문앞에서 나는 자유를 내 놓았다. 결국 내 손에는 하나의 키워드만 남아 있다. ‘깨달음이것을 가지고 나는 지옥문을 나선다. 내 삶을 진정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깨달음이라

 

퇴근 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사무실에 울려퍼진다. 그리고 짐을 챙기고 집으로 향한다. 버스 안에서 나는 생각을 이어간다. 첫 번째 버렸던 사랑이란 단어. 나는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잘 살고 있다. 문득 진한 외로움이 나를 찾아올 때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없어도 지금껏 잘 살아오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사람’.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주변에 친구나 가족 등 누군가가 있어야 하긴 하지만, 나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에너지를 얻기 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다. 그래서 큰 고민 없이 사람을 두번째로 버렸다. 꿈너머 꿈이란 모임을 만드는 실험으로, 평생 함께 할 친구를 얻었고, 지금도 가끔 이런 걸 한번 해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하지만, 지속성이 오래 가지는 않는다. 그림을 그리려고 책을 샀던 것도 하나의 실험이었고,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서 내 인생의 활력소가 되어 주기는 하지만, 지속되지 않으므로 실험을 버릴 수 있었다. 첫 회사에서 오랜 시간 있을 때, 주어진 공간 안에서 변화를 시도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 큰 힘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회사를 나와 잦은 변화를 겪다보니, 변화 자체가 내게 주는 영향력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지속성이 좀 떨어진다. 일상이 반복되는 속에서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네 번째는 변화를 버렸다. 여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가? 아마 이 키워드는 경제적인 것과 심적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경제적인 여유를 누려 본지 너무 오래 됐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의 여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가지고 왔던 것 같다. 하지만, 여유만으로는 삶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자유. 나는 늘 자유로웠다. 엄마가 언젠가 내게 얘기했던 것처럼, 나는 조선에서 제일 지멋대로 사는 놈이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유만으로도 뭔가 부족하다. 그래서 결국 내 손에 남은 것은 깨달음이다. 변화나 실험처럼 지속성이 떨어지지 않고, 나의 활력소가 되어주는 것. 이 깨달음이란 지금까지는 책을 통해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지난 한해 힘들었던 나를 버티게 해 준 힘이기도 하다. 지금도 나는 조셉 캠벨이 우드스탁에서 돈도 벌지 않고 5년 내내 책만 봤던 그 시간이 내게도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이 이미 그런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깨달으며 살아갈 수 있다면, 내 삶은 진정 살만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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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9 18:11:34 *.143.156.74

미나가 아주 힘든 경험을 했구나.

가까운 사람이 떠나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들지.

'있을때 잘할껄. 그리고 순간을 즐기며 살아야겠구나. 참고 아껴두었다 나중에 하려했던 일들이 뭐였더라?'

나도 그랬지. 마시멜로는 아껴둘 필요가 없어.

필요할 때 한 개씩 먹어야 다음 길을 갈 힘이 생기지.

미나야, 밥 잘 챙겨먹고 몸을 잘 돌보도록 하여라.

언니처럼 곯지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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