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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4일 08시 25분 등록
 

글쓰기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아홉 번째 책 <걷는 자의 꿈, 실크로드>을 냈을 때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은 여행도 많이 했고 글을 쓸 소재가 너무 많은데 글을 쓸 수 없다’는 하소연을 해왔다. ‘어떻게 꾸준하게 글을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작가들도 원고 청탁과 마감날짜가  없으면 글을 쓰기가 힘들거라’고 답했다. 그리고 ‘글 한 편을 쓸 때마다 머리에 산을 하나 이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해주었다. 상대방도 나의 답을 듣고는 아마 ‘작가들도 글을 쓴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임’을 알았을 것이다. 문인들끼리 모이면 우스갯소리처럼 ‘우린 마감날짜가 글을 써준다’고 말한다. 데드라인을 앞두고 있으면 떠오르지 않는 생각도 불쑥 떠오르는 것을 보면 글쓰기에도 뭔가 긴박하고 절박함이 필요한 것 같다. 

  누군가가 당신은 왜 글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까?

  “뭔가 쓰지 않으면 이 무료한 인생을 견딜 수도 없고 참을 수도 없기에 쓴다”고 답할까. 아니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이며,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하고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할까. 또 다른 답은 “은둔자처럼 살고 있는 내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답할까. 이러한 답이 내 글쓰기에 대한 이유가 될 것 같다.     글쓰기가 고달프고 배고픈 일임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내 인생의 빛이요 환희이며 나의 전부이다. 글을 쓰면서 ‘돈을 벌어보겠다, 이름을 얻어보겠다’는 꿈을 품어본 적이 없다. 단지 내가 글을 쓴다는 것, 쓰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대견스럽고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때로는 자신이 보잘 것 없이 느껴질 때면 내 안에서 ‘그래도 글을 써서 책을 낸다는 것이 어디냐’고 위로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자문자답하고 있다. 먼저 누군가가 니체에게 “그렇다면 대관절 당신은 왜 쓰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니체인 A가 답한다.

    “나는 잉크 묻은 펜을 손에 들고 생각하는 인간에 속해 있지 않다. 더군다나 의자에 앉아 종이를 응시하면서 열린 잉크병 앞에서 열정에 빠져 있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은 더욱 아니다. 나는 쓰는 것이 개탄스럽고 수치스럽다. 쓴다는 것은 내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유해서 그것을 말하는 것조차 혐오스럽다.”

 니체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개탄스럽고 수치스럽다’고 아주 극단적으로 말한다. 시인이요 철인(哲人)인 니체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왜 이렇게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을까? 그러면서 니체는 ‘쓴다는 것은 내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고 답한다. 글쓰기는 내면의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자 질문자인 B는 “그러나 그렇다면 당신은 왜 쓰는가?”라고 묻는다.

 니체는 “그런데 나의 친구여 솔직히 말한다면 여태까지 나는 나의 생각들을 제거시키는  다른 어떤 방식도 발견해 내지 못하고 있다.”고 답한다. 생각을 제거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이다. 생각을 제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는 의미일까 아님 단어 그대로 솟아오르는 생각을 어딘가에 배설해버리고 싶기 때문일까?

  그러자 질문자 B는 끈질기게 묻는다.  “그리고 왜 당신은 생각들을 제거하고자 하는가?”

니체는 “왜 나는 그렇게 하고자 원하느냐고?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아아, 나는 어쩔 수 없기에.”라고 답한다.  ‘생각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 글을 쓰는 방법만큼 좋은 것이 없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글을 쓰지 않으면 자신을 견디어 낼 수 없고 미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글을 쓴다’는 니체의 말에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생각을 제거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하지만, 내면의 또 다른 자아는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이 정도쯤 되면 글쓰기는 일종의 광기가 되어버린다.  

 질문자인 B는 글을 써야만 하는 니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그것으로 충분하다! 충분하다!’고 말한다. 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기 전에는 다작(多作)하는 작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그런데 내가 작가가 되고 보니 조금 거창하게 말한다면 ‘내 안에서 쓰고 싶은 욕망을 제어하기 힘든 그런 것’도 있다. 또 다른 이유는 글을 쓰고 한 권의 책이 나올 때만이 존재가치를 느끼게 되니 그 순간의 짜릿함을 맛보기 위해서라도 쓰는 행위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그래도 밥값은 하고 사네’라고 자신을 위로해주는 그 기쁨은 나만이 느끼는 행복이다.

  이 천지 험악한 곳에서 나의 답답한 가슴을 마음껏 풀어놓을 때가 어디 있는가? 고작 해야 나의 일기장이고 컴퓨터 모니터이다. 하지만 모니터 위에서 글을 쓸 때면 나도 모르게 언어는 정제되어지고 거친 마음과는 달리 언어는 순해지고 맑아진다.

  글을 쓰는 행위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가져오지만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도구’를 마음껏 사용할 수 없다. 연주자가 악기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그 법칙에 맞추어 연주하듯이, 글 쓰는 과정 또한 언어를 최대한 존중하는 과정을 통해서 출판언어에 맞는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절제되고 정제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태어나는 것을 두고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사물이 아름답지 않고 매력적이지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을 때, 어떻게 그것을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바람직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이럴 때는 예를 들면 쓴맛을 희석시키거나 포도주와 설탕을 더해 혼합물을 만드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원근법적인 시각만으로 사물을 보든지, 또는 햇빛에 비추거나 색유리를 통해서 보는 것’이 그 사물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방법이라 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사실 그대로를 늘어놓는 능력이 아니라,  때로는 미운 것을 아름답게 때로는 아름다운 것을 밉게 자신의 주제에 맞게 변주해서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왜 글을 쓰느냐는 물음에 다시 답한다면 ‘하나의 사소한 사건과 소박 일상이 언어에 의해 풍요로워지고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그 무엇으로 탄생하기’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그런 광기가 내 몸을 휘감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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