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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6일 11시 54분 등록

저 횡포한, , 밥그릇

2015. 1.26

 

 

때를 거르면 나를 잡아먹겠다는 듯이

사지를 흔들어대는 허기진 밥의 주식은 그러니까 오래 전부터 사람이다

결국 사람은 모두 밥에게 먹힌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빈 밥통의 떨림

- 이덕규, <뚝딱, 한 그릇의 밥을 죽이다> 중에서

 

결국, 밥그릇이다.

이 모든 몸부림의 답을 이렇게 정해놓고 다시 길을 떠날 작정을 해본다. 아니, 아직 작정은 아니다. 고민 중이다. 선택이 가능하다 생각하지 않았던 길에 갈래길을 하나 더 만들었을 뿐이다. 이 길을 갈 것인지, 더욱더 미스터리하면서도 스펙타클할 수 있는 다른 길을 갈 것 인지, 의제를 하나 더 만들어 상정했을 뿐이다. 나는 이 길로 갈 수도 있고 저 길로 갈 수도 있단다. 어때, 나 잘났지? 거울을 보며 볼따구의 애꿎은 주근깨를 좀 숨어라, 이젠 좀 숨어라 꾸짖으며 수분 가득 품었다는 분가루를 날리며 투명파우더를 원수된 자의 면상을 치듯 팡팡 때려 바르며 내게는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있다고 우겨보는 중이다. 그러나 진정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는가? 다시 물어보자. 의미 있는 선택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그저 내 젊음의 증명과도 같았던 시절의 연장을 위해 의미 없는 발악을 하고 있는 것뿐인가.


그래도, 그래도 말이지! 밥은 벌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매우 중요했다. 밥그릇은 내 생명의 부름이었고, 밥벌이는 내 존재의 증명이었다. 가치, 유용성, 나는 나라는 인간의 존재의미를 밥벌이 말고 다른 데서도 찾을 수 있을까.  2년간 시험했는데도 참, 여전히 정답은 저 머나먼 우주 어딘가에, 서툰 전업주부와 어설픈 프리랜서의 현실 저 너머 어딘가에, 닿을 수 없는 안드로메다 성운 어딘가에서 저 혼자 헤메며 여태 내게 찾아오지 못하고 있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지 아니 내리는 지 그저 축축하고 어둡기만 하던 하늘이 잠깐,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민 태양 덕분에 천지가 빛으로 가득 차는 찬란한 순간을 목격한다! , 그렇다니까. 구름 없이 어디, 태양이 얼마나 황홀한 존재인지 알 수 있겠나 말이다. 어제도 밤잠을 설친 큰 아이는 엄마가 끓여준 만두칼국수 한 그릇을 간신히 비우고 엄마방 침대에서 고단한 잠에 빠져 들었다. 나는 잠든 아이 곁에서 밀린 숙제를 하던 중이었다. 이 잠시의 평화, 사춘기의 터널을 폭풍처럼 내달리는 고단한 아이가 내 곁에서 편히 잠들고, 나는 둘째 녀석이 끓여준 커피를 마시며 책상 앞에 앉아 노닥거릴 수 있고, 고양이는 편하게 아이 발치에서 몸을 쭉 펴고 잠들어 있다. , 이런 평화는 또 얼마나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수제비 빚기를 더 이상 놀이로 여겨주지 않는 아들들이 서운했던 시간도 벌써 지나갔다. 나는 표현에 인색한, 사실은 너무도 서툰 아이가 더 이상 엄마를 대화상대로 여겨주지도 않는 시절을 곧 맞닥뜨리게 될 지도 몰라. 그러니까 선택을 하라구! 근데 당신에겐 선택의 자유가 없어. 뭐가 더 중요한 지 알고 있잖아. 하여튼 이 잔인한 선생님은 내게 정답 같은데 정답이라 인정하기엔 너무도 고통스러운 그 길을 자꾸 돌아보게 해서 영, 안 되겠다. 아 뭐, 내가 엉망인 줄 말 안 해줘도 다 알거든요. 내 처지가 갑갑한 것, 그렇게 콕 집어서 말 안 해줘도 다 알거든요. 근데 그게 10년씩 지속될 거라고 하면, 그때까지 참으라고 하면 나 진짜 도망갈 궁리만 하게 된다고요 


그렇지, 밥그릇. 잊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나는 또 이 텅 빈 밥그릇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밥그릇 그거 하나 채우면 남는 것들이 쓰레기가 됨을 알면서도 봐, 나 이렇게 밥을 잘 벌어이런 말을 하기 위해 나의 시간을 몽땅 팔아 넘길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정신분열증이다. 정반합이 안되고 끊임없이 움직여도 결코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미친 듯 왔다갔다하는 진자의 운동을 십수년 째 무기력하게 반복하고 있는.


욕심이다. 그러나 그 욕심도 없으면 나는 어찌 되는 건가. 장자가 아니고 노자가 아닌 바에야 어찌 그 욕심을 다 무위로 돌릴까. 그저 포기하고 의연할 대인배가 내가 못 되는데. 아직 못 되는데, 이제 밥할 시간이다. 어김 없이 돌아오는 삼시 세 끼의 압박, 밥그릇이다! 저 무시무시하고 가차없는 녀석,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횡포의 갑, 밥그릇을 채울 시간이다. 새끼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밥을 그릇에 그득그득 채워 넣으러 나는 간다. 밥그릇으로 도 닦으러 간다. 그 밥그릇이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경전이 되는 그 순간까지, 닥닥 한번 닦아볼라고, 살아볼라고 간다.    

 


IP *.92.21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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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7 16:29:55 *.7.59.19
밥그릇, 뚝딱 밥먹듯 한 꼭지 해치운 솜씨가 역시 작가!

약간 무거운 뉘앙스가.... 밥그릇이 좀 심각한 주제이긴 하지만 종종답게 다소 밝고 가볍게 유쾌하게 가야 종종체가 살아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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