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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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장례식.
언제가 이곳을 떠날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다들 영원히 살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어느 순간 죽음을 맞닥뜨리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왔다.
구본형 변화 경영 연구소의 연구원 프로그램 중 하나로 ‘나의 장례식’이라는 것이 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참석한 나의 장례식장. 죽음 앞에 남겨진 시간은 10분. 마지막으로 이들에게 내 인생 이야기를 10분 동안 하는 것이다.
장례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겠다는 선언이고 다시 태어나기 위한 절차인 것이다.
그래서 나의 유언장을 처음으로 작성하기로 했다.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가져서 밤에 아이들이며 남편이 잠든 시간에 적어보려고 했는데 그들이 자기 전에 내가 먼저 잠이 와서 도저히 저녁에는 안 되어서 날을 잡아 주변의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에서 한 자리를 잡고 그동안의 나의 시간을 돌아보았다. 40년 넘게 보내온 시간들. 나의 소중한 가족들, 그리고 그동안 나와 함께 인연을 맺은 소중한 분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남편, 아이들, 부모님, 시부모님, 형제들, 친구들, 그동안 알고 지냈던 분들…….
유언장을 쓰기 시작하니, 그동안 그들이 나를 힘들게 했던 일들보다 그들이 나에게 잘해주었거나 내가 그들에게 해주지 못한 많은 것들이 밀려오게 된다. 죽음 앞에 서니 그동안 중요시 했던 삶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아야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우선순위에는 늘 밀리다 보니 마지막에는 후회하는 것이다. 죽음을 앞 둔 그때는 이미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후회만 안고 가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제는 없기에…….
막상 그렇게 살아온 나를 다시 한 번 보게 되었다. 그때 작성한 유언장 중의 일부이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지금까지 건강히 잘 살아온 것에 내 자신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재미있게 살아오지는 못한 것 같다.
주어진 역할 및 주어진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주어진 역할 및 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주어진 것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다른 시도를 해볼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못해서 아쉬움이 크다.
현재는 미래의 행복을 담보로 늘 바쁘게 움직이기만 했다. 지금 무언가 열심히 준비하지 않으면 미래는 불안하고 불행해질 것이라 배우고,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면서 지냈다. 바쁘면 행복해지는지 알았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았다. 바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었고, 무언가 하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라도 알게 되었지만 뒤늦은 후회만 남는다.
주어진 역할을 조금은 가볍게 생각해도 되는 것을 마치 마음의 십자가처럼 늘 지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재미나 즐거움보다는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는데 바삐 보냈던 것이다.
왜 그렇게 바쁘게 아등바등 거리면서 살아왔을까? 열심히 살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고, 일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성공하면 돈도 많이 벌고 가족도 다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십오 년 넘게 해왔지만 성공도 돈도 가족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만큼의 부를 원하는지도 모른 채 늘 ‘현재보다는 더 많이’였고, ‘남보다 더 많이 ’였다. 하지만 돈이라는 것이 한도 끝도 없는 것이고 늘 부족한 것이 돈이고, 늘 아쉬운 것이 돈이었다. 남들 것은 다 커 보이고 잘나 보이고, 나는 늘 뭔가 부족하고 왜소하게 생각되었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를 보는 기분이었다. 신기루를 보고 물 인줄 알고 달려갔는데 물은 없고, 모래뿐이었다. 그러면 다시 또 물을 찾아 떠나는 것이었다.
행복한 미래를 담보로 현재는 늘 달려야 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 속에 그들에 대한 감정이 이리도 깊은지 몰랐다.
하지만 남편과 아이들과 세계여행을 한 것, 늦게나마 아이들하고 육아휴직을 해서 아이들과 잠깐이라도 함께 했던 시간들이 제일 기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육아휴직을 안했다면 평생 마음의 짐으로 가지고 갈 뻔 했다. 유언장중의 일부 내용이다.
엄마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회사 다니면서 너희들과 함께하지 못해서 늘 가슴속에 한이 되었는데 올해 육아휴직을 해서 짧게나마 너희들과 함께하면서 너희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동안은 엄마로서 제대로 너희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는데 며칠 전 “그동안 살아오면서 엄마한테 섭섭한 것이나 아쉬웠던 적 없었어?”하고 물었더니, “없었어. 다른 친구 엄마들에 비해서 엄마가 이해해주고 잘해주고 있어.” 하면서 “엄마의 모든 죄를 사하노라” 라는 얘기를 해주어서 엄마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죽기 전에 모든 죄를 사하게 되니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어서 고맙구나.
이제 과거의 나하고는 결별을 선언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통해서 새로운 나를 탄생시켰다. 이제 나머지 삶의 시간은 ‘덤’인 것이다. 덤으로 주어진 인생을 이제는 제대로 잘살아봐야겠다. 무엇이 ‘제대로’일까?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40년 넘게 길들어진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남다른 노력들이 필요하리라.
유언장을 정리하면서 다이아나 루먼스의 <만일 내가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시가 떠올랐다. 시 구절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 닿는다.
<만일 내가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
-다이아나 루먼스
만일 내가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지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을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 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데 관심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도토리속의 떡갈나무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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