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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6일 15시 50분 등록
1965년 봄 우리는 당시 대전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선화동의 도로 안쪽 비가 새고 시꺼멓게 곰팡이가 피곤하던 허름한 함석지붕의 집에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대방동492번지(지금은 동작구 신대방동 707번지) 기와집으로 이사를 했다. 충청남도에서 서울특별시로 이사를 와서 우리도 서울 시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엄마는 우리들 교육을 부르짖으셨다. 당시에 큰오빠가 고등학생이었고 어려서부터 신동처럼 공부를 잘한 작은오빠가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라고 지칭했었음)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진학해야 할 때였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 작은오빠와 보통인 막내오빠가 함께 남대문 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었다. 엄마는 늘 큰오빠가 기초가 부실해서 공부를 놓쳤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큰오빠는 어쩌면 우리 집 어려운 형편의 희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빠는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인하여 초등학교를 무려 13번이나 옮겨 가며 다녔다고 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여러 번 옮겨 다녀야만 했다. 늘 바쁘신 아버지와 삶에 허덕이는 엄마는 미처 큰오빠를 챙겨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큰오빠는 자기도 모르게 되는 대로 살아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또 얼마나 용해 빠지고 순박한 사람이던가. 오빠는 심성이 고와서 어려운 일은 늘 자신이 다 짊어지고 동생들을 위해 양보하고는 했다. 미처 자기 것을 확보하거나 하고 싶은 어떤 계획을 세워볼 겨를도 없이 말이다.

서울로 이사 와서는 당시에 대학 시험에 한 번 떨어졌다하여 더 공부를 시킬 생각도 못해보고 있다가 군 입대 영장이 나오자 그대로 군대에 가서 3년 이상 나라에 헌신하는 군 생활을 했고 제대해서도 공부할 꿈을 가져보지 못하고 곧바로 취직하였었다. 그리고 그것은 큰오빠의 인생에서 못내 씻을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게 된 것 같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에는 그렇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리라. 큰오빠와 작은 오빠는 터울이 7년이나 난다. 어머니께서는 중간에 무지 똘똘해 보이고 가장 잘 생긴 하나를 백일 무렵에 경기驚氣로 잃었다고 하신다. 그러한 이유로 큰오빠는 가족 중에서 가장 일찍 철이 들고 부모님의 고생하심과 힘겨운 삶의 여정들과 함께하면서 가장 심중을 헤아렸던 것 같다. 자기가 얼른 부모님을 도와 자식 된 도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나는 이런 대목에서 늘 엄마보다는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갈증을 느낀다. 아버지는 사회생활도 하시고 낮지 않은 직급까지 다 올라가셨지만 집안 살림에는 너무도 무심하시고 자식들에게 무언가 길을 터주고 생각하고 대처할 무엇도 가르쳐주지 못하신 점이 늘 안타깝다. 하기 싫어서라기보다 모르고 경험의 부족으로 자신감이 없어서 늘 주변인으로 머물게 되는 인생으로나 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고 쉽게들 말은 하지만 그 적절한 때를 유용하고 그야말로 합목적성을 지니고 적절하게 보내는 사람은 많지 않고 그렇게 이끌어 주는 사람 또한 많지 않은 것 같다. 학창 시절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다. 꼭 지금 당장에 공부를 잘해야만 대학을 가고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기회를 한 번 더 가지거나 다른 방법들을 모색해 볼 여지를 가져보지 못하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작은 것으로 인해 큰 흐름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어른들이 할 일이란 잘 먹이고 호강시켜주는 것 못지않게 삶을 개척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해 나갈 수 있도록 방법을 일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천만금을 쥐어주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고 귀중한 자산이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내 유년에는 부모님으로부터 그러한 교육을 받지 못한 감이 있다. ‘공부해라’라는 소리를 수없이 많이 들었지만 왜 해야 하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를 모른 채 그저 하고 듣는 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내 경우에는 참으로 오래 동안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다. 뒤늦게 깨달아 한다지만 그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일테면 시간이나 비용, 기회 등에서 자신의 연령대에 누려야 할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덜컹거리는 불협화음을 맞추어나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나도 바로 그러한 경험들을 아이들과 함께 헤쳐 나가 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복이 째져서 그런지 마음대로 되지 않아 이제 누구를 원망하고 자시고 할 처지도 못되긴 하지만 말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내가 중년 홀로서기 10년을 결산하는 한 측면에서 연구원을 하면서 책을 읽고 글쓰기에 돌입한 이유가 바로 나이가 든다고 해결되거나 약간의 먹고사는 일에서 다소 놓여났다고 해서 상쇄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큰오빠야 고등학교 이후로 키가 자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 큰 어른처럼 우선 체격이 갖추어 졌었지만 작은 오빠들은 초등학생 둘이서 그때에 신대방동에서 시경 부근의 남대문 초등학교까지 그 만원의 터질 것 같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니 참으로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때엔 다 그렇게 살기도 했다. 그나마 작은 오빠는 어려서부터 키가 크고 남달리 총명하였지만 막내 오빠는 우리 식구 가운데 가장 체격이 작고 비실비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막내오빠는 학교에 한 번 다녀오면 파김치가 되고는 했던 것 같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우리는 전혀 그 신대방동 492번지로 이사 갈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숙명여자대학교가 있는 후암동인가 청파동 부근에 집을 얻었었는데, 우리 큰 집이 먼저 그 신대방동에 와서 살게 된 관계로 도시의 객지생활을 약간 걱정하셨던 것인지 아버지께서 엄마도 모르게 해약을 해버리고 신대방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 거라고 푸념과 원망을 쏟아내시고는 하셨다. 우리가 철이 났을 때 오빠들과 나는 왜 이런 동네로 와서 살았느냐고 반문하여 묻고는 하였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가슴을 치면서 하시는 말씀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여간 그래서 우리는 신대방동 492번지 18호에서 무려 20년 이상 살았었다. 만약 그 동네가 아파트를 짓는다고 없어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여태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살았을 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것이 한 번 터전을 잡으면 쉽사리 옮겨가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 빠듯한 살림살이를 하면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는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들이 크는 동안 엄마는 절대 그 동네에서 살고 싶지 않았음을 몇 번이고 말씀하시며 힘들어 하시고는 했다. 왜냐하면 그 동네는 민간인이 살만한 동네는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부적합한 곳이기도 했다.

그곳은 월남전이나 군대에 갔다가 상해를 입은 사람들이 자활을 하며 모여 사는 집성촌인 까닭이다. 나중에 우리는 그곳에서 삶의 기반을 나름 탄탄히 세워가며 살아갈 형편이 되었을 때는 일처리와 법에 미숙하고 고지식한 아버지의 실수와 그곳 몇 몇 사람들의 부당한 한 탕 우려먹는 처사로 말미암아 그 너른 평수의 땅과 집을 다 빼앗기고 말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 얼마나 원통하고 절통한 일인지 엄마는 불안한 노후를 생각할 때면 그곳의 사무침을 잊을 수 없어하시며 뼈저리게 안타까워하시곤 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법이 없어도 사는 분이라며 젊어서부터 고진이라는 평판을 들으며 살아오셨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 영악하고, 아버지의 처세로는 형평이 맞지 않아 늘 눈뜨고도 당하기 일 수이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배워야 한다는 것을 한평생 엄마는 목숨처럼 깨달으신 것 같다. 당신이 글이라도 제대로 알고 그랬더라면 법도 두렵지 않았겠지만 딴엔 열심히 살아도 무법천지같이 덤벼드는 사람들에게는 도리가 없더라는 것을 평생의 한으로 답답해 하셨다. 얼마나 사는 것이 숨 가쁘고 힘들었으면 우리를 다 분가시키고는 거의 칠순이 다 되어서도 이를 악물고 다시 국문을 완전히 깨우치셨던 것이겠나.

처음 이사 왔을 때 집 구조는 큰 방 하나, 작은 방 하나에 작은 방만한 길다란 나무 조각의 마루가 실내에 깔려 있는 집이었다. 마루의 미닫이 유리창살을 열고 나가면 신발을 벗어놓을 만한 주춧돌이 놓여 있고 그 앞은 앞마당이 있었으며, 우리 앞집의 17호와 경계를 구분하는 블록으로 쌓은 담이 있었다. 그 앞에 작은 방과 마루까지의 공간보다도 넓은 꽃밭을 나중에 큰 오빠가 만들었다. 그리고 뒤 쪽으로 돌아가기 전 집 오른 편에는 널따란 밭이 있었다. 완전히 뒤로 돌아가면 우리 집 안방과 붙어서 이어지는 작은 슬라브가 한 테 딸려 지어져 있었다. 그곳은 우리 안방과 벽으로 붙어서 창고 하나, 방과 부엌이 딸린 살림집 하나 그리고 화장실이 두 개가 붙어있었다. 창고와 우리 안방 벽 사이에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첫 계단을 오르면 안방의 창문으로 햇볕이 들 수 있게 아래의 창고 너비 만하게 공간이 펼쳐졌다. 그리고 한쪽 귀퉁이로 또 몇 개단 올라가면 방과 두 개의 화장실을 이어놓은 널따란 옥상이 펼쳐지고 그곳에서 장독들이 모두 뚜껑을 열어젖히고 따가운 햇볕에 고추장과 된장들을 맛있게 익히느라 짭조름한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그 낮은 옥상에서 나는 주로 소꿉놀이를 하며 놀고는 하다가 그곳을 경계로 바로 19호가 내려다 보여서 다른 집들의 일상을 흘깃거리며 놀았던 것이다.

작은 방은 전에 살던 집의 안방만하고 안방은 마치 넓은 운동장이나 되듯 무지하게 컸다. 안방 아랫목 쪽에는 부엌하고 똑같은 크기의 다락이 있었고 부엌도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몇 배로 큰데다가 바닥에 시멘트가 발라져 있어서 그곳에서 우리는 목욕도 할 수 있었다.
우리 집 부엌은 부엌 바깥쪽에서 보면 안방으로 향하는 아궁이와 오빠들 방으로 향하는 아궁이가 ‘ㄱ’ 자 모양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주변은 도끼다시(?)로 깔려 있었다. 왼쪽에는 수도꼭지가 달려있고 물이 귀한 때라 항시 물을 받아 놓고 쓸 수 있도록 시멘트로 커다랗게 물통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물을 퍼서 쓰고는 하였다. 나머지 공간에는 제법 커다란 찬장이 달려있었다. 네모난 시멘트 물통에 물을 받아놓고 실컷 쓰고 양쪽의 아궁이에서 물이 펄펄 끓으니 대전의 흙바닥에서 물도 없이 살 때와는 달리 부엌 안에서 머리도 감고 목욕을 하거나 빨래 등을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무엇보다 겨울에 춥지 않아서 얼마나 좋던지.

우리가 서울로 이사 오고 얼마 안 있어서 외할머니께서 시골에서 다니러 오셨었는데 아빠와 지금의 서울 타워가 있는 남산 팔각정에 가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는 그때 그 부엌에서 목욕하시며 피로를 푼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이만 해도 우리는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 같았다. 그때에 내가 본 광경으로는 우리 집 보다도 작은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대전의 주인집 정미네보다는 훨씬 못했지만 아주 대궐 같은 집에서 사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집 안방만한 크기의 집은 좀처럼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었다. 게다가 부엌 앞에는 넓은 공터가 밭으로 사용되어 있었다. 엄마는 그곳에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 가지와 오이 등을 심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감자 등을 캐서 꽤 자주 쩌 먹었던 기억인 난다. 보라색 가지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게 익어 가면 그 이쁜 가지를 따서 반으로 뚝 잘라 날로 맛을 보곤 하였다. 그러면 알싸하니 혀가 아리기도 했지만 옥수수나 감자와는 달리 금세 따서 먹을 수 있으니 자주 손이 가곤 했다. 잘 익으면 달달한 맛이 나기도 하니까.

우리 동네는 언덕이 진 경사로였는데 굉장히 깨끗했다. 아침마다 배씨라고 불리는 깡마르고 머리카락이 별로 없는 깡다구가 있고 깔끔하게 생긴 소사 아저씨가 마을 전체의 도로를 커다란 싸리 빗자루로 깨끗이 쓸고 다녔다. 마을 입구에는 ‘재활용사촌’이라고 크게 아취모양으로 쓰여진 입간판을 달고 사는 동네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용촌에 살아요.’라고 하곤 했었다. 하루는 밖에 나가서 놀다보니 모두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을 타는 사람들은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가는 척추가 손상된 사람들이었다. 더러는 스텐으로 만들어진 크러치를 집고 다니거나 나무 목발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리고 가끔은 갈퀴손을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대전에 살 때에는 상의용사가 돌아다니며 동냥을 할 때면 무서워서 도망을 치고는 했는데 이제는 아주 그보다 더 심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와서 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도망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공동체 속에서 같이 어울려 살게 된 것이다. 아마도 내 기억에는 100호 미만의 동네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곳곳에 세를 들어 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으니 나중에 가구 수는 훨씬 더 컸지만 처음에 집성촌을 이루면서는 땅과 집을 그 정도의 호수로 나누어 가졌던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언젠가 가슴을 쓰러 내리시며 하시는 말씀이 있었는데 처음에 이사를 와서 얼마 안 되어 내가 노는 것을 보니 아주 가관이더라고 하셨다. 세숫대야를 엎어놓고 그것을 마루에서 빙빙 굴려가며 타고 노는 것이 아닌가. 딴엔 그것이 나의 휠체어였던 것이다. 매일 보는 것이 그런 것이니 나도 아무생각 없이 그 사람들을 흉내내어 그들처럼 앉아서 다니고 다리를 질질 끌고 놀면서 세숫대야를 엎어놓고 움직이더라는 것이지 뭔가. 엄마는 그때 너무나 크게 한숨을 내쉬며 기겁을 하시고 아버지를 원망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말씀해 주실 때 에그~하며 예의 그 체념과 상심으로 땅이 꺼져라 내려앉는 한숨과 가슴팍의 시퍼런 멍 자국을 꺼내 보이기라도 하듯 애끓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으니 말이다. 서울까지 와서 살 때에는 자식들 공부 가르치겠다고 온 것이었는데, 교육환경에도 그리 좋지도 않고 텃세도 무지하게 심하며 민간인들도 별로 없는 그곳에 와서 살게 된 것이 너무도 속이 상한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노는 것을 보시고 기가 막혀서 넘어갈 뻔 했다고 하신다. 결국에 사임당 신씨같이 현숙하게 열심히 부모노릇을 하고자 했던 어머니의 꿈과 기대의 ‘맹모삼천지교’가 ‘엎어진 세숫대야’를 타고 노는 것을 보는 순간 아연실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으리라. 어머니는 우리를 그러한 자신의 생활 속의 한계를 애달아하며 키우셨던 것이다.

그나마 그 집도 완전히 우리 집이 아니라 세를 들어 입주했던 것이었으니 살림에 쪼들려 금세 어디로 이사를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끙끙 알면서 우리를 키워내셨다. 그러다가 하루는 그 집을 주인이 팔겠다고 하는 바람에 더욱 당황하여 갑자기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 결국에 재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덜컥 친정에 손을 내밀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그래서 큰외삼촌에 대해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시며 남달리 애틋해 하고 무한한 신뢰 속에 감사를 보내곤 하였었다. 마침 그 무렵 경부고속도로가 추진되면서 추풍령이라는 곳에 휴게소가 들어서고 하는 등 토지가 국가에 수용이 되는 바람에 엄마가 외가로부터 물려받은 얼마간의 땅과 돈을 급조해서 빌리어 별안간 그 집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기보다 엎어진 세숫대야를 껴안아 품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 동네에 정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살다보니 익숙해지기도 하고 더군다나 그만한 돈을 가지고는 더 나은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아서였던 것이리라. 하지만 엄마가 조금만 더 살림살이에만 억척스럽기보다 눈을 크게 돌리고 다른 동네를 잘 살펴보았더라면 더 나은 환경에서 살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 동네 밖을 나가보지 않았고 고작해야 시장이나 왕래하며 주어진 월급에 맞추어 빠듯하게 살림을 하다 보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쉽지 않은데다가 기고 날뛰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더 잘살아야겠다는 야심도 적어서였던 것 같다. 보고 듣는 것이 그만큼 적고 폐쇄되어 있다 보니 고작의 행동반경이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으리라. 똑같은 비용을 들여서 더 나은 창출을 할 수 있다는 전략과 합리적 모색보다는 현실의 테두리 안에서 입고 먹는 것만 검소하게 하여 살아가는 빠듯한 생활로밖에는 더 헤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러한 자신의 무지와 부족한 점들을 스스로 늘 안타까워 하셨다. 깜냥이라는 것은 타고난 원래의 크기라기보다 그릇에 담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한 거라는 것을 경험과 체험을 통해 알게 되셨던 가보다. 위치에 따라 사람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 것이던가 말이다.

이럴 때 엄마는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고사를 자주 떠올리시면서 급하게 일이 터진 김에 밀어붙여 가며 하니까 그나마 이렇게 된 것이지 돈을 모으면 모으기도 전에 돈 쓸 구멍이 더 먼저 알고 찾아들기 때문에 도무지 틈이 없더라는 말씀도 결코 빼놓지 않으셨다.

우리 집주인 아저씨는 화자네라고 나와 같은 또래 아이의 아빠로서 척추손상 환자였는데 언제라도 나를 보면 반겨하시며 아주 귀여워해주시곤 하였으며 우리 가족 모두에게 친절하셨다. 물론 척추손상 환자이니 그 아이를 아저씨가 낳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 동네에 떠돌고는 했다. 그 동네에는 그런 집이 제법 있었다. 그래도 대부분 보통의 가정처럼 아내와 가족이 있고는 하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흔하게 주어다가 기르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그 아저씨는 무척 친절하였기 때문에 생각이 많이 나는데 그 시절 대단한 주가를 날렸던 영화배우 최무룡아저씨와 닮았고 목소리도 비슷하였다. 그러니 얼마나 아까운 인재들이요 사연들이 많았겠는가.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그 집 아주머니가 한때 정신을 놓치고는 하여 동네에 소문이 파다하고는 했다. 나는 그때에 미치면 힘이 세진다고 하는 소리를 처음 들어 알게 되었다. 아무도 그 아주머니가 발작을 일으켰을 때 말릴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 후로 정신과에 입원을 하고 그랬었다. 당시 유명했던 청량리 정신 병원에 갔다더라 하는 소문이 나고는 했다. 나중에 그 유명한 병원은 안양인가로 이사를 했지만 청량리 정신 병원은 정신병원의 대명사로 유명했었다. 그 동네는 마치 요즘 우리가 TV에서나 보는 전원일기같이 한동네에서 무슨 조그만 일이 있어도 온 동네가 술렁이고 숟가락이 몇 개인지 젓가락이 몇 개인지를 다 알고 파악하고도 남을 만큼 허물이 없기도 한 못 말리는 공동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민간인이 그 곳에 들어와서 사는 예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집주인이 된 사람은 그 당시에는 아마도 보기에 드문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소유권이 넘어가도 좋다는 것이 법으로 확정되고 나서 그 집주인 아저씨가 우리에게 사라고 무척이나 간곡히 도와주셨지만 한편으로 동네에서는 그 아저씨의 행위를 저지하려고도 하고 하여튼 방해 공작이 많았다고 한다. 엄마는 집주인 아저씨가 너무 좋아서 그 집을 사게 되기도 하였다고 회상하신다. 하기야 세입자와 주인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면 그 집을 사고 팔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나중에 엄마가 그곳에서 기를 펴고 살기에는 너무나 속박되는 방해공작도 많았다. 서로의 이해 상관이 있어서 이기도 했거니와 한 사람의 민간인 대 공동체 전체의 대항이기도 했으니 자기 것을 지키고 열심히 살아보려는 엄마의 외로움은 저항에 부딪히며 너무나도 괴로운 시련과 난관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냥 보통의 경우처럼 세나 들어 산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을까 만은 이왕에 자기 집이요 땅이 되었으니 엄마의 권리는 당연했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아니꼬운 면이 있기도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엄마는 새로 산 집에 급기야 집을 짓는 용감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외로움은 오래 동안 고립되기도 한 것 같다. 처지와 상황이 다른 이웃에게 속내를 터놓고 이웃사촌처럼 지내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사람은 다 저마다의 한계란 것이 있어서 어떤 이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나 문제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유유상종끼리 더불어 사는 것도 마음편이 사는 방법 중에 하나이기도 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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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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