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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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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4일 03시 19분 등록
캠벨의 첫 책부터 내 관심의 중심에 자리잡은 문제의식 하나는 기독교의 교의에 관한 것이었다. 과연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기독교에만 있는 구원 안으로 사람들을 끌어 들여야 한다는 내 열심이 하릴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도권(기독교) 밖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평화로운 미소로 악수를 청해올 때, 그들의 손에서 행여 먼지라도 묻을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던 건, 내가 받은 훈련의 힘이다. 그런 내가 어느 날부터인가 그들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자꾸 뻗치고 있는 것이다.

큰 아이가 ‘엄마 왜 요즘 교회에 안 나가세요’ 하고 말할 때 나는 참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대답을 회피하기 일쑤다. 아이들이 신앙을 가지고 살 길 바라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건 나였다. 큰 애 모습이 과거의 나의 모습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내가 왜 교회에 가지 않는지 제대로 설명해 줄 수가 없다. 그 애가 못 알아들을까봐서가 아니라 내가 아직 확신이 없어서이다.

수십 년을 수행하며 진리를 찾아온 사람들이나 진리에 천착하여 높은 깨달음을 얻은 많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제도권 내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이유 만으로 경원시해 온 것, 훈련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제도권의 교의를 더 견고히 세우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구원의 도가 아닌 진리를 배우려고 바깥을 기웃거릴 필요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들이 떠들어대는 것은 기껏해야 이미 성경의 전도서나 잠언 같은 데에 나오는, 해 아래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인간 사는 이야기나 고민의 흔적들일 뿐이고, 아무리 심오한 철학이라 해도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미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구원은 정말 기독교에만 있는 것인가. 이 의심을 따라 나는 캠벨이 어떻게 신에 대해 설명하는지 유심히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캠벨은 내 고민을 잘 해결해 줄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내리는 결론은 아직 내가 받아들이기엔 역부족이다. 기독교를 역사적 사실이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아직 나의 가슴은익숙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내가 배운 것을 고집하기 위해 어떤 가설들을 늘어놓는 일보다 캠벨의 결론을 지지하기 위해 어떤 가설들을 늘어놓는 일이 더 쉽고 무리가 없다는 점이다. 캠벨 쪽으로 나의 믿음이 경도되어 갈 것이라는 감이 막연히 오지만 두 경계에서 나는 아직 몸을 떨고 있다. 나의 믿음의 근거였던 기독교를 바닥부터 뒤집어 새롭게 보아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교의가 지시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아무 의심 없이 달려가는 것도 이제는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캠벨에 의지해 어떤 답을 찾고 싶은 것이다.

신에 대한 문제는 인간의 인식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신을 해명한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지혜와 머리로는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신을 믿느냐 하는 것은, 아직 증명된 적이 없는 사실에 대해 어떤 가설을 지지하는냐 하는 문제와 같다. 기독교 주장처럼 오직 답이 하나라고 한다면 그와 관련된 가설(신앙의 내용도 일종의 가설이라고 한다면)을 선택한 사람은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증명이 불가한 구원의 문제를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다. 교조적인 기독교에 의해 터부시되는 타 문화권의 신들과, 그 신들의 자애 속에 삶을 유지하는 수 많은 인류들을 구원에서 제외하는 그런 유일신이라면 당연히 나는 그 치명적인 외골수의 자비 안에 머물고 싶지 않다. 오히려 모든 신들이 ‘동일한 한 신’의 다른 얼굴이라고 말하는 캠벨의 통찰에 더 많이 기대고 싶은 것이다.

한 종교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그 세계가 모든 것이라고 믿고 살아온 나의 눈에 우물 속으로 한 줄기 햇살이 비쳤고, 그 햇살은 내 마음의 평화를 깨고 처음으로 내가 속한 세계에 대한 의심을 심어주었다. 이제 더 이상 우물 속을 세상의 전부라고 믿을 수 없게 된 나는 빛의 존재를 따라 밖의 세상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비록 좁은 우물 안이었지만 그곳 역시 하나의 다른 세계였던 이상 내가 체험한 신은 절대적인 신이다. 그를 거부할 힘은 내게 없다. 그러나 세상 밖에서 만나는 신들도 그 신을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신이며, 그 신들이 사실 서로 다른 신이 아니라는, 그런 화해가 가능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각 문화권에서 발견한 그 방대하고도 다양한 신의 모습은 사실은 하나의 원형으로서의 절대적 신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현현한 것이라는 캠벨의 주장은 가장 탁월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편협적인 신의 관념을 내놓는 여러 학설들과 달리 캠벨의 결론은 인류가 피의 역사를 그치고 상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지향한다. 그는 적어도 이 세상에 존재했던 학자들 중에 가장 많이 다양하게 신들에 대해 연구했고, 그 신들이 사실은 다른 의상을 걸친 하나의 여러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방대한 그의 연구와 직관으로 멋지게 내린 결론이 사람들이 자신의 신을 배반하지 않고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까지 품을 수 있는 꽤나 훌륭한 대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결론이 자신의 소망대로 세계를 대통합으로 이끌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그의 심오한 통찰이 미욱한 나의 눈에서 비늘 하나 떼는 일에 일조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가 유대-기독교 전통의 상징들과 은유에 대해 고찰하며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심도있게 논한 ‘네가 바로 그것이다’ 라는 책을 다음 책으로 읽어보고 싶다.
IP *.248.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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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4.14 08:59:01 *.244.220.254
기독교 신자셨군요~
기존의 관념과 믿음을 다시 본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과정이셨을텐데요. 새로운 절대적 실재(實在) = 신(神)과의 만남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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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희
2008.04.14 12:05:32 *.41.62.236

책을 깊이 있게 읽고 있군요. 늘 부럽습니다.

자유책을 다 다르게 읽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네가 그것이다' 고대하겠습니다.

저는 신의 가면 중 동양을 볼께요.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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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8.04.14 13:29:06 *.67.52.205
저희 선원 개원식에 명동에서 목회 활동하시는 김진 목사님이 오신적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알지를 못하고 원장 스님이 개인적으로 아시고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저희에게 설교를 해주시고 저희는 목사님께 삼배를 드렸습니다.
김진 목사님을 검색해서 관련 기사와 글들을 읽어 보심이 어떠하신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으면 소개시켜 드리고 싶지만 저는 인연이 없으니 죄송합니다.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것이 제일 좋다고 여겨져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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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8.04.14 13:35:32 *.67.52.205
화엄경을 읽지는 않았지만
선재동자(동자의 의미 :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여러 사람을 만나고 배움을 청합니다.
거기에는 창녀도 있습니다.
우리 일반 대중이 배움을 구하는 것도 그와 같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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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4.14 13:37:39 *.117.68.202
'네가 그것이다' 저도 사놨는데 그런 책이었군요.ㅎㅎ

사실 전 무신론자인데요. 요즘 성당에 예비신자교리 다녀요.
아내와 큰 거래를 했어요. 서로의 소원 하나씩 들어주기로. 아내 소원이 제가 신자가 되는거였어요. 말을 꺼냈으니 들어줘야죠.
ㅎㅎ 아직 뭐가뭔지 전혀 감이 안온답니다. 제 안에 신께서 들오실 자리가 있는건지도 모르겠구요.
저는 신화같은건 사치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종교 또한 나 자신을 믿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했었구요.
이런 제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되어갈지... 제가 더 궁금합니다..ㅎㅎ

깊이있는 칼럼 또 기대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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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정
2008.04.14 13:55:28 *.84.240.105
저는 기독교인이 아닌 상태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기독교 학교로 다녔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사춘기인데다 제 믿음과는 다른 것을 강요하기에 성질 급한 제가 자주 그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로 인해 목사님과 여러 번 싸웠습니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고등학교 보다 상당히 수용적인 입장을 보이시는 목사님들을 많이 뵈었습니다. 거기서 마음이 많이 풀렸습니다. 저한테는 '유일신'이라는 관념이 너무 답답하고 이해하기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라는 수련 프로그램을 하고 나서 확신이 생겼습니다. 모든 종교가 하나의 진리라는 것이. 그 하나의 진리 안에서 서로 다른 상징의 양태를 띄고 있다는 것이. 이제 저는 예수님도, 하나님도, 부처님도, 알라신도 모두 살아 계시며 동행하시는 분들로 느껴집니다. 그리고 단지 문명을 통해 발달해 온 인간들의 해석이 들어가면서 그 원론적인 하나의 진리가 너무 상이한 것들로 바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캠벨의 책을 읽으면서 캠벨이 참 저랑 비슷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저 제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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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4.14 14:30:32 *.97.37.242
그동안 너무 열심히 믿으셔서 그에 대한 회의도 크게 나타나는 것 같군요. 하지만 깊은 회의는 한층 더 깊은 신앙으로 결론지워 진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한숙님의 신앙을 살찌우는 좋은 계절을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모쪼록 깊이 탐구하셔서 좋은 결실 맺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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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8.04.14 19:49:16 *.128.229.72

종교는 믿는 것이고 과학은 묻는 것이다.

믿어라. 그러면 종교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믿으면 묻지 않기 때문이다.

물어라. 그러면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것이다. 그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물으면 믿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어쩔 것인가 ?
몇 달 후 캠벨과 다르지만 역시 종교적 관점에서 또 하나의 문제아를 다루게 될 것이다. 재미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유하고 군형을 잡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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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가
2008.04.14 20:37:51 *.235.8.34
나는 나다.

그것은 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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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4.15 11:38:14 *.248.75.5
사부님,과학과 종교를 이렇게 멋진 두 줄로 요약해 주시다니.
제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소리 들리시나요.

한 때 밤새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때 내게 중요한 건 교리가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위로였지요.
현실이 힘들수록 그분의 위로는 더욱 달콤했습니다.
그분에 대한 제 사랑도 매우 진실했구요.
그런 그분이 교리에서는 자신이 창조한 자식을
지옥에 보내는 분이시라니
그것이 저에게 의문을 주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 분의 정의와 사랑이 만난다는 것,
무척 심오한 통찰에 이르렀지만,
로마서에서 말하는 의의 옷, 그것을 믿음으로 입지 않는 사람은 그분의 정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천국(구원)에드는 사람은 믿음으로
오직 유일한 구원의 길인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4영리를 달달 외워서 전도한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맹목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제 스스로 깨달음의 바다에 던져져서
캠벨이 말한 근원적 자아(신과 나의 경계가 없는)에 이르러 보고 싶습니다.
그게 힌두교 명상의 지향이지요.
기독교는 신과 인간의 이원성에 기초한 종교고
뉴에이지를 동조하는 이런 나의 생각은 불경스러운 것입니다.
제 마음이 갈구하는 것은 종교라는 형식에 갇히지 않은 신의 존재입니다.
그 누구에게나 빛을 주시는 분...
앞으로 니체까지 다루고 나면 좀 더 생각들이 정리되겠지요.
아니면 더 혼돈에 빠지려나..

김지현씨, 여기저기, 그리고 내 글들에 달아주는 님의 댓글을 보며
님이 궁금해집니다. 김진 목사님에 대한 소개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미 같이 고민하고 웃고 즐거워하게된 우리 4기 동지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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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
2008.04.21 10:23:29 *.246.146.170
캠벨, 니체 그리고 여러 책들.

사부님이 권하는 책들은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 많이 곤란(?)한 책입니다. 오래 혹은 깊이 들어가 있었던 분들일 수록 더 할 것 같다는게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사부님은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런 책들을 읽게 하실 것이고, 그 책을읽고 난 다음에는 오래도록 고민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사악 사부가 달리 사악 사부이겠습니까?

저는 리뷰에 올라오는 책들 중에서 맘에 드는 것만 골라서 읽고 있습니다만 가끔 사부님의 진의(?)에 대해서 궁금할 때가 많았습니다. 더불어 연구원들의 주름살도 염려스럽구요.ㅋㅋ

사족) "근원없는 친밀감" 그게 소은님의 첫인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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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4.21 12:28:48 *.36.210.11
형산에게

나는 사부를 교회밖의 참 신앙인(그냥 우리와 같은 사람) 이라고 생각합니다. 절 안에 갇힌 수도승이 아니라 거리를 돌며 삶을 향해 애타게 부르짓는 이들을 향해 삶의 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시대가 요청하고 우리가 찾아낸 미륵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쓰는 한낱 단어만을 보지 마세요. 이 만큼 오픈된 사이트가 있나요? 연구원의 모든 과정을 이렇게 진솔하게 털어놓은 곳은 없어요. 연구원으로서 때로 속이 상할 지경이기도 해요. 이 실천이 간단하게 여겨지십니까? 거져 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선뜻 내 놓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나는 나의 어처구니 없는 신앙의 자비가 형산을 가두어두지 않을 것임을 믿어요. 우리가 내세우는 교회의 공동체라는 것, 불교의 교리 따위가 다 무엇입니까? 행하지 않으면 말짱 도로묵이 아닌가요? 아침 일찍 새벽 기도에 참여하였으니 오늘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부적과 무엇이 달라요? 용돈을 아껴서 헌금했으니 언제까지나 만수무강 영생을 누려야 한다고 하는 터무니 없는 교리가 바로 스스로의 안위에 안착한 헛개비 같은 논리는 아닐까요? 그것이 보장 되지 않을 거라면 왜 그 많은 돈을 헌금했고 잠을 줄여 기도했겠느냐는 심보에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그동안에 그렇게 살아온 것에 대한 응답일 뿐 앞으로까지 보장된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그것을 바라며 그것을 미끼로 요구를 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교회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단지 세치 혀에서 나온 말에 불과하다고.

나는 나와 다른 형산도 구원에 이르기를 바래요. 내가 떠밀리는 것 나를 밀어내는 것은 하느님이나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바로 교회 안의 무리를 지은 사람들이더라고요. 그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자신들이 그만큼 희생했다는 것을 내세우고는 하는 데 그것은 그들이 이제껏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이면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요? 은연중 비교하여 남의 우위에 서고 말려는 경쟁논리가 더이상 21세기형 영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고 죽음은 아름답고 기쁘기보다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여 통치를 한 것이 교회가 아닙니까? 조건을 달아 매달렸건 부활한 예수와, 조건을 달아 나를 내쫓은 한 남자와 다른 차이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나 역시도 죽음은 두려워요. 하지만 지금 잘 살지 못하고 지금 열심히 살아내지 못하고 교회의 순종으로만 구원되리라는 그리고 그것이 아니고는 길이 없다고 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옹졸함에는 언제든지 답답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에요. 우리는 죽어 잘 살기 위해 그리고 영생을 위해 이 땅에 나왔던 것일까요? 형산은 그래서 이 땅에 온 것입니까? 내 생명을 다 드릴 테니 천 년 만 년 살아보시구랴.

그토록 전지 전능한 분께서 쓸어버리지 않고 이대로 존속시키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안에서 울고 웃으며 부대껴라 하는...

마음에 드는 리뷰처럼 마음에 드는 신앙만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신앙도 있음을 가릍쳐준 사람 중에 사람은 교회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려는 무리들이 아니라 바로 교회 자체가 지닌 하느님도 모르는 비로소 신앙인이 찾아내는 비밀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을 통해 구체화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형산의 목소리에 이끌려 달려들어 봤습니당. 사악제자로서. ㅋ

형산, 저이가 교회에 가지 않았다면 영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을까? 나무 관세움 보살. 저이는 교회를 혁명할 의지를 가진 부처중에 부처 미륵이로고. ㅎㅎㅎ

질투의 아버지 딸, 써니!(아버지는 니들만 만들지 않고 왜 나까지 만드셨을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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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촌
2008.04.21 14:32:15 *.235.8.34
우리는 길거리에서 "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라는 팻말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교 신자들은 이 해인 수녀님의 글을 좋아하고

천주교 신자들은 법정 스님의 글을 좋아합니다.


한 종교에 깊이 들어가 본 사람은 다른 종교를 존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종교의 심연에서 자신의 신을 흘낏 보게 되므로...

문제는 깊이 들어가지 않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에도 깊이 들어가 보지 못하고 다른 종교를

깍아내립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다른 종교를 깍아 내립니다.

나는 단무지한 사람입니다.

복잡한 교리보다 하나의 교리가 좋고

고가보다 염가의 종교가 좋습니다.

그래서 매주 천원씩 내는 천주교에 다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늘에 계신 분 것인데

돈많이 내는 사람만 좋아할 리 없고

무우심어 놓고 산삼 나오기를 기도하는 사람을 총애할 리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천국간다면

아브라함이나 모세에게 예수님이 자신을 알렸듯

이순신이나 대왕세종, 불교나 이슬람교 신자에게도

공평하게

죽은 뒤에 자신을 알려주실 지도 모릅니다.(교리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힘껏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이들의 구원을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결국 자신의 삶은 자신이 심판하는 것.



저는 예수님의 다음말을 사랑합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요.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당신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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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
2008.04.21 15:38:10 *.246.146.170
어?

저는 종교얘기를 한 것이 아닌데, 의외로 댓글의 방향이 치열해집니다.

사부님이 권한 책들이 생각을 깊게 한다는 의미로 쓴 것이고, 더군다나 기존에 종교를 갖고 있던 분이면 분명 부대끼는 구석이 있을 꺼라 여겨서 간단히 적었습니다. 제가 권장도서(?) 몇 권의 책을 읽다가 그랬던 경험이 있는지라.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조금 지난 이 칼럼에 댓글을 달게 된 연유는 그저 소은님을 한번 만난 이후 칼럼을 다시 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 표현력의 부족으로 인해 오해가 없었길 바랍니다.

누님~ 이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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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4.23 09:28:06 *.127.99.39
형산 고맙습니다.
부산에서 형산을 만나기 전에는
형산이란 이름이 내게 그저 글자로 읽히다가,
지금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확실하게 읽히는 것,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런 것인가 봅니다.

'함성'을 마음 속에 간직하며
할 수 있는 한 치열하게 사는 그대의 삶에 응원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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