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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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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4일 08시 50분 등록
그 가을, 나는 29살이었습니다. 내게는 그 29살이라는 나이가 너무 무거웠습니다.
30살, 그 고지가 항상 대단히 멀게만 느껴졌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앞에 서 있었습
니다.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넋을 잃고 앉아서 30살의 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30살이 되기엔 너무 이른 것 같았습니다. 애써 ‘만 나이’를 들먹거리
면서 30살이 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입문한 석사과정을 한 학기 남겨두고 있었고, 졸업 후엔 어디에 취직을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고, 미치도록 독립이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벌써 오래 전에 고향의 부모님으로
부터는 떠나 왔지만, 아직도 부모님이 얻어 주신 아파트에 사는 것, 부모님의 잔소리에 움
찔 거리는 내 자신이 너무 지겨웠습니다. 과 내의 산학 프로그램 프로젝트며, 교내 조교일,
교수님 조교일 등을 해 가면서 열심히 돈을 벌어 댔지만, 내가 돈을 내어 만든 내 공간을
얻는 것은 나에겐 요원해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갑자기 내 소원을 들어준 듯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운 좋게도 나는 기숙사에 행정 조교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한 학기 학비가 해결이 되는데다가 내 방도 하나 공짜로 얻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국제 기숙사라서 영어 공부를 하고 싶던 나에게 외국인 학생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도 제공이 될 것이랍니다. 살다 보면 이런 행운이 제 발로 찾아오는 때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덥석 그 일을 시작하기로 했고, 나는 동생과 함께 살던 학교 앞 아파트에서 떠나 기숙사 방으로 독립을 감행했습니다. 그저 내 손으로 마련한 내 공간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상한 독립-학교 정문 앞 아파트에서 학교 안 기숙사로의 독립-에 대해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매우 비웃었습니다.

내가 맡은 일은 기숙사 사감이 하는 일과 비슷했습니다. 방에 머물면서 밤 동안에 기숙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살피고, 기숙사비나 전화비를 처리하는 재정적인 행정일을 하고, 기숙사 내의 게스트 하우스에 들어오는 손님을 호텔의 리셉셔니스트 처럼 상대하는 일이었습니다.

석사 과정 마지막 학기라서 졸업 시험도 봐야 하고 논문도 써야 하는 입장이었는지라. 낮에 공부하고 밤에 일을 할 수 있는 이 일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고, 국제 기숙사라서 다양한 종류의 인간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괜한 모험심이 발동을 해서 가슴이 다 벅차 올랐습니다.

그 동안 살았던 아파트를 지척에 두고 그 기숙사로 들어가던 날. 어쩌면 그렇게 29살의 가을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고 나는 그들과 생활하면서 29살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K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K는 체격이 제법 좋아 보였습니다. 언뜻 보아도 미국 교포 분위
기가 나는 건강한 몸집이 그를 그렇게 보이게 했습니다. 그는 교환학생도 아니었고, 학교에
서 공식적으로 듣는 수업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교내의 어학당에서 진행하는 한국어 강
의만을 듣고 있었고 그 외에 외부에서 파트 타임으로 영어를 가르치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어슬렁 어슬렁 기숙사 로비를 걸어 다니고 있
는 것이 보였으니까요. 전임 조교는 저한테 그를 조심하라고 일러 두었습니다. 무엇 때문이
냐고 되물었더니,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고만 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일을 시작한 지 이틀 후 쯤부터 그의 정체가 서서히 밝혀 지기 시작했습니
다. 그는 누군가에게 싸움을 걸었습니다. 발단은 매우 사소한 일 때문이었고 그 싸움은 주
먹질로 까지 번졌습니다. 한밤 중에 큰 소리와 주먹질이 나는 바람에 내가 직접 가서 살펴
야 했었고 겨우겨우 달래서 둘 간의 싸움을 말렸습니다. 숙제를 하다가 달려간 그 자리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잠을 잘 시간에는 좀 조용히 해 주었음 한다고 말을 했었습니다. 그 때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던 그를 보면서 나는“겁에 질린 커다란 곰”을 연상했습니다. 그의 폭
력적인 성향에는 분명히 무슨 사연이 있어 보였습니다만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이
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로도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비슷한 장면을 자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매번 다른 사
람과 싸움을 하고 있었고 나는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해서 그를 말려야 했습니다. 싸움하던
그를 말릴 때마다 나는 그에게서 “겁에 질린 커다란 곰”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에게서 나
는 왜 “겁에 질린 커다란 곰”을 발견했던 걸까요? 그는 소리를 치고 주먹질을 하면서도 상
대방한테 매우 기가 눌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빛에선 무언지 모를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
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중이었는데 벌써 몇 년 째 휴학을 하고 있었고 미국
도 한국도 아닌 그 기숙사 안에서 세상을 피하고 있다는 생각만이 들었습니다.

P는 파키스탄인이었습니다. 의대에서 중요한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님 이었습니다.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러 왔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임
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약간의 광기가 어린 번득이는 눈빛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
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몸에서 나는 너무 특별한 “냄새”였습니다. 카레 냄새와 십 년
이상 혹은 이십 년 이상 몸에 찌들었던 것 같은 담배 냄새, 그리고 그만의 특별한 암내가
모두 합쳐져서 나는 그 만의 냄새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가 오는 것
을 20 미터 전방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국과 독일에서도 꽤 오랫동안 공부를 했다는
그는 누군가와 무척이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눈치였습니다. 사무실에 누군가가 있으면 언제
나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사를 좀
해달라던가, 내일 새롭게 가게 되는 지역의 위치를 가르쳐 달라던가. 그의 이러한 행동들이
외로움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에게는 함께 대화를 나누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를
비롯한 조교들이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오만한 태도는 우리로부터 그에 대한
연민을 모두 거두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공손하지 않았습니다. 영
어를 사용하면서 항상 동사 원형 – 즉, 명령형-을 사용을 했고 조교들의 개인적인 일까지
간섭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와 친해지기가 싫었었고 그가 오면 하나같이 퉁명스럽게 대접을
했습니다.

S는 시를 쓰는 시인이자, 시를 공부하는 학자였습니다. 미국에서 교환 학생의 자격으로 학
교에 와 있었는데, 까만 피부와 이국적인 이목구비로 보아서는 아무도 그녀가 생물학적으로
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녀에게는 ‘무당의 기운’이 있었습
니다. 그녀 앞에서는 아무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보였습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
면 쳐다보는 서늘한 그녀의 눈빛에는 마음을 뚫어다 보는 이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사십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왔다는 어머니, 아버지의 고향에서 그녀는 한국말을 너무도 정확
하게 구사를 했습니다. 심지어 존대말 까지도 꼬박꼬박 챙겼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내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고
여기저기 신문을 뒤져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상한 사회인가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녀의 예민한 레이더 망에는 세상이 모두 아프고 힘들게만 보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찾아낸
한글로 된 시들을 내게 낭송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시에 가장 적절한 언어
(한국어)를 찾아 내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했습니다. “세상이 너무 아프다.”는 그녀의
우울이 나에게 서서히 전해져 왔습니다.

특별히 우울한 이들에 둘러싸여서 나는 점점 슬픈 감정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솟아 오르
는 화를 누르고 밤마다 K의 싸움을 말리기가 힘들어졌고, P의 예의 없는 요구들을 들어 주
기가 피곤해졌으며, S와 함께 있으면 느껴야 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들을 겪기도 무척 힘들었
습니다.

밤마다 그 기숙사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상한 기운들이 내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나는 병이 들었습니다. 새벽 5시면 벌떡 일어나서 ‘할머니’라는 별명을 가졌던 내가 어느
새 해가 중천에 뜨도록 식은 땀을 내며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고, 밤을 세워가며 재미있어
하면서 잘 해내던 공부도 심드렁해졌습니다. 무기력증이 온 몸과 마음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병원을 찾았지만 뚜렷한 병명을 알아낼 수도 없었습니다.

나의 ‘작은 독립’에 기뻐하며 행운이라 여기던 생각은 벌써 온데 간데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고들이,더 많은 우울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부에서 계속>
IP *.56.8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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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5.04 08:53:05 *.72.227.114
소설 쓰는 사람을 만나면 소재로 제공을 해 주고 싶던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으로의 두 번째 여행'을 읽다가 갑자기 제가 쓰게 됐네요.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시면 계속 씁니다..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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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5.04 10:42:33 *.178.33.220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는 땅바닥에 물로 그어 놓은 선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현실과 상상의 구별이 어렵다는 얘기겠지요. 현정씨의 얘기를 읽다보니 현실인지 상상인지 구별이 어렵네~ 하지만 매우 재밌어. 계속 써줘. 세상의 여러 군상들의 모습은 언제 읽어도 재밌는 주제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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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환
2008.05.04 12:35:50 *.34.17.93
궁금해 하겠습니다. 계속 써주세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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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2008.05.04 21:25:29 *.52.236.185
소설같아요.
다음편 기대 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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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8.05.04 22:52:48 *.120.66.197
아님 말고라니요...
계속 쓰실거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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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스
2008.05.05 07:03:37 *.39.173.162
정말 궁금하내....
다음편 안올리면 처들어갑니다..ㅋㅋ
궁금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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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5.05 13:03:21 *.5.98.140
호기심을 자극하네요
팬들이 많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기다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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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5.05 22:25:34 *.72.227.114
성원에 감사..갑자기 2편을 잘써야 한다는 부담이 팍~ 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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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5.07 07:18:37 *.244.220.254
재미있게 읽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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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희
2008.05.07 12:41:26 *.41.62.236

쓰사와요. 속도감있게 잘 읽히고 내용도 좋고 기대 만발 됩니다.
칼럼을 매주 두편씩 올리는 거에요. 이거따로 메인 칼럼 따로. ㅎㅎㅎ
우리 이번주 만나나? 도망가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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