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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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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4일 18시 18분 등록
인생으로의 두번째 여행, 이 책은 이야기 자체의 비중보다 ‘이야기에 대한 해석’의 비중이 더욱 크다. 알렌은 노스롭 프라이나 로버트 펠톤 같은 민속학자의 규칙을 예로 들며 ‘이야기를 듣는 것’의 중요성을 이 책의 서문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야기를 들을 때는 해석하려고 들기 이전에 우선 귀를 활짝 열고 그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서문을 읽을 때 나는 그의 이 말에 강하게 끌렸다. 더구나 그는 ‘이야기의 힘’을 알고 그것을 자신의 환자 치료에 적극적으로 사용해온 심리학자가 아닌가. 그의 전문성에 대한 나의 신뢰가 이 책에 대한 내 기대를 더욱 부풀렸다.

더구나 나는 캠벨에게 지쳐 있었다, 그리고 그 지친 영혼을 알렌 치넨의 손 끝에 내려놓고 쉬게되길 염원했다.

캠벨의 책들은 일단의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를 지지할 사례들을 예시하는 형태로 이야기를 소개하기 때문에 하나의 완벽한 스토리로 이야기 자체에 빠질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다. 읽고 나서 느끼는 모호함과 허탈은 신화 그 자체 보다는 신화에 대한 주장(論)들만 머리 아프게 배워야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세계의 온갖 신화들을 다 만났지만 정작 신화 속으로는 빠져들지 못했다. 신화의 바다에 푹 빠져 신화의 기운을 흠뻑 받고, 신화가 주는 신비 체험과 황홀을 맛볼 수만 있다면! 그런 바램이 클수록 오히려 갈증은 더 심했다. 그러다 만난 알랜 치넨의 이 책, 이 책은 그런 갈증을 해소해주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에 들떴다. 적어도 알랜 식의 명쾌한 글을 통해 이야기 자체에 한 번 빠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너무 친절한 저자이다. 이야기가 끝나는 즉시 달려들어 이야기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너무 친절한 나머지, 무시를 당하는 기분 마저 든다. 독자가 이야기 자체에 푹 빠져주길 기대한다고 서문에 쓴 그의 진심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야기가 주는 여운을 즐길 틈도 없이 이어지는 그의 유려한 해설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그의 해설이라는 것도 편안히 읽을 만큼 평이한 수준이 아니다. 이해하려면 머리를 써야 한다. 물론 그의 통찰 때문에 이야기를 다시 깊이 읽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한 이야기 속에서 그토록 많은 통찰과 메시지를 건져 올리는 그의 학자적 능력에 놀라면서도 ‘그런 설명이 다 필요한 걸까’ 하는 의심은 거둘 수가 없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의 바램과는 달리 나는 소개된 이야기에 대한 ‘나 만의 해석’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내가 아쉬운 것을 달리 표현하면 이렇다.

나는 각박한 도시의 삶에 지쳤다. 온갖 미디어가 강요하는 메시지에 지치고, 과도한 일에 지치고, 거래하는 사람들에 지쳤다. 그래서 하루 휴가를 내고 자연으로 도망친다. 각종 수목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숲 속에 들어 상쾌한 기분을 맛보고 막힌 가슴에 숨통도 트고 싶은 것이다. 드디어 숲에 들었다. 나무가 드리우는 좋은 기운에 이끌려 나는 어느 한 나무 아래로 간다. 그 그늘 밑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양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눈을 지그시 감는다. 새 소리가 들리고, 바람에 사각이는 나뭇잎 소리가 들리고, 멀리 계곡에서 흐르는 물 소리가 들린다. 나는 없어지고 내 안에 우주가 가득 찬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나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나는 장소 이동을 해 숲 속에 마련된 강의장에 와 있다. 그곳에서는 숲의 일인자라고 꼽히는 유명한 강사가 숲 강의를 열고 있다. ‘숲은 이렇고, 숲은 저렇고, 숲은 이래서 좋고, 숲은 저래서 좋다, 숲은 이래서 필요하다, 숲은 저래서 잘 보존되어야 한다. 숲은..숲은..숲은…..’. 물처럼 미려한 강의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강의 내용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오랫 만에 숲에서 몸을 쉬고 싶었던 나는 어느새 머리를 싸매며 강의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갑자기 머리에 지진이 난다.

“아,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내가 숲에 온 것은 강의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그런데 어디선가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당신, 이 숲은 강의를 들으려고 오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야. 몰랐어?"

그러나 난 포기하고 싶지 않다. 다시 숲으로 갈테다. 나는 숲 속에서 주옥 같은 이야기들과 만날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내게 마법으로 통하는 비밀의 문을 알려줄 것이며, 나의 내부에 숨어있는 ‘작은 아이’를 꺼내줄 것이며, 끝없는 책임와 격무로 지쳐있을 때,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시원한 샘물을 마시게 할 것이다. 신비의 동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어느 날 내가 버린 감성을 되찾게 해 줄 것이고, 사막 같이 삭막한 이 세상에서도 맘만 먹으면 언제든 휴-하고 단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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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2008.05.04 21:01:02 *.52.236.185
심각하게 읽다가......

"갑자기 머리에 지진이 난다." 여기서....... ㅎㅎㅎ



화이팅이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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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5.05 16:31:34 *.5.98.140
소은님 글에서 숲이 느껴지네요.

기대하지 않은 순간 시원한 샘물을 마시고
신비의 동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어느 날 내가 버린 감성을 되찾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숲속...

그런 숲에 나도 가보고 싶은데, 나도 데불구 가요~

근데 가부좌 틀고서 장소이동 하는 걸 보니 득도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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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5.06 11:57:07 *.51.218.151
정산, 언제든 환영이오.
일단 유체 이탈을 하듯 세상 이탈을 먼저 하셔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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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5.07 07:26:29 *.244.220.254
솔직하면서도, 역시 한 칼(!) 하시네요. 예리하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이 아닌, 이야기.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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