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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8일 23시 50분 등록

여러 가지 채소와 새우가 큰 접시에 둥글게 자리를 잡았고 접시 가운데에는 소스가 놓였다. 만두피처럼 둥근 것도 있었는데 마치 무를 얇게 썰어놓은 것 같았다. 월남쌈이다. 김치도 한자리를 차지했고 즐겨먹는 김도 한 귀퉁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언제 먹어도 구수하고 맛깔스런 된장찌개가 보기 좋게 김을 올리고 있었고, 그 외에도 몇 가지 음식이 더 식탁에 자리 잡았다. 따뜻한 미역국과 밥이 올려지면서 식사준비가 마무리 되었다. 아니 그보다 잠시 후 아내와 딸과 내가 자리에 앉으면서 식사 준비는 마무리 되었다.
며칠 전 나의 생일날 저녁이었다. 아내는 평소에 집에서 잘 먹지 않던 월남쌈으로 식탁을 꾸몄다. 마땅히 식탁을 차릴만한 게 생각나지 않아서 조금 특이한 것으로 선택을 했단다. 이미 3일전 저녁에 조촐한 파티를 했으니까 생일을 두 번째 우려먹는 셈이다.
아내는 몇 번이고 쌈을 싸서 나와 딸에게 건네주었고 딸도 엄마를 따라 어설프게 쌈을 싸서 건네주느라 정신이 없다. 웃음으로 받아먹으면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따뜻한 미역국이 고맙고, 따뜻한 밥이 고맙고, 평소와는 다르게 음식을 준비하느라 신경 썼을 아내의 마음이 고맙다.
당연한 듯이 나도 쌈을 싸서 건네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따뜻한 그림이 구멍 난 곳 없이 완성될 터인데 그 지점에서 따뜻한 그림은 조그만 구멍을 보인다. 그래도 저녁식사는 즐겁게 끝났다.
저녁을 먹고 상을 치우기도 전에 딸아이는 자기 방으로 달려가더니 커다란 선물상자를 들고 나온다. 정말 큰 상자다. 아내는 웃으면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다.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얇은 노트 한권과 토끼인형 한 마리가 들어있다. 아, 그리고 딸아이가 삐뚤빼뚤하게 쓴 카드 한 장. 노트는 딸아이가 용돈을 모아서 산 것이고 토끼인형은 아내가 주는 선물이다. 고마웠던 식탁만큼 선물도 고맙다. 많은 게 고마운 저녁이다. 노트는 일년 동안 공부를 하는데 유용할 것이고, 토끼인형은 만지면 참 부드러워서 마음에 든다. 누워서 책 보다가 베고 자기에 딱 좋아 보인다. 많은 게 고맙고 좋아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저녁을 먹고 또 작은 파티를 벌인다. 가족들이 케이크를 즐기지 않는지라 먹음직스러운 둥근 빵에 큼지막한 촛불 하나를 꽂아놓는다. 거실의 불을 끄고 노래와 함께 촛불을 끈 후 빵을 잘라 먹는다. 밖에서는 말이 없고 집에서는 시끄러운 딸아이는 나름대로 행사를 주관하느라 더 말이 많아졌다. 소박한 식사와 조촐한 파티를 마친 저녁은 푸근하게 깊어간다.

아이가 잠든 후 토끼인형을 안아들고 책상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무언가 달라지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생일은 대단한 날이 아니었다. 그저 태어난 날이었고 미역국을 먹으면 지나가는 날이었다.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었고 대부분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알고 자랐다. 생일을 챙긴다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었고 생일이란 게 챙길만한 날도 아니었다. 젊어서는 오랜 시간을 혼자 살아 온 탓에 생일을 챙겨주는 사람도 챙겨먹을 일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결혼을 하고 애가 태어나고도 생일을 챙기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아내 생일은 2~3년에 한 번씩은 잊고 지나가기 일쑤였고 내 생일도 아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잊어버리고는 했다. 그래도 아내가 꼬박꼬박 생일상을 차려주었지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생일을 챙기지 않았던 습관의 탓도 있었지만 사실 감정의 표현에 익숙하지 않았던 게 더 크게 작용했다.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거지 그걸 꼭 입으로 내어 표현한다는 게 영 어색했던 것이다. 해보지 않았던 일이었으니 나이 들어 갑자기 그런 표현을 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감정적으로도 그런 것들이 고맙고 즐거운 것이라는 느낌을 갖지 못했다. 연습되지 않았고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의 느낌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고맙다 즐거웠다 같은 표현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강산도 10년이면 변한다고 하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해가는 게 스스로 느껴진 것은 그 즈음이었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까 하는 생각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즈음 부여잡은 화두는 그렇다면 행복은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답을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책에 매달렸다. 이것이 행복이라고 외치는 스님의 책도 읽고 행복을 연구해보니 이러하더라고 말하는 대학교수들의 책도 읽어보았다. 답은 간단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내 안에 있었고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조금 조금씩 노력을 시작한 게 그 즈음 이었다. 감정의 높낮이를 줄이려했고 사소한 것들에 달려들지 않고 흘려버렸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을 조금씩 버리는 연습을 했고 마음을 담담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입안에서만 굴러다니던 말이 하나 둘씩 밖으로 나온 것도 그 즈음 이었다. 먼저 고맙다는 말로 연습을 시작했다. 작은 일에도 고맙다고 의식적으로 말을 했고 농담으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한번 두 번 입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말들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의식적으로 골라서 했던 부드러운 말과 감사의 말들은 마음을 부드럽고 감사하게 만드는 결과도 가져왔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별것 아닌 것들에, 당연한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난 것은 뜻밖이었다. 뜻밖의 결과는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만드는 선순환을 불러왔다. 재미있고 즐거웠고 생활 속에서 되풀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생일을 맞아 차린 저녁상에 별다른 감흥을 못 느꼈을지 모른다. 생일이니 그냥 색다른 음식을 먹는 것이겠지 생각했을 것이다. 쑥스러운 웃음을 한 번 흘리고 묵묵히 저녁을 먹었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 변한 것 같다. 많은 것이 고맙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식탁에서 기쁨이 가득한 식사를 했고, 그 영양분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살아나가기에 충분한 힘을 얻는다. 예전 같으면 토끼인형 선물에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을 했겠지만 이제는 생뚱맞은 토끼인형 선물이 고맙다. 100원짜리 볼펜 하나를 선물 받았다고 해도 충분히 고마웠을 것이다. 생일상이 고맙고 선물이 고맙다고 소리 내어 말하는 것도 변화라면 변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변하고 있다는 말이 아직은 이른 것 같아 보인다. 사실 대단히 변하고 있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지금 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의 걸음마를 이제야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나만 모르고 있던 방법을 이 늦은 나이에 배우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걸음마는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더 많이 익히게 된다. 나의 걸음마도 더 많이 쓰러지고 넘어지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그 때 무언가를 잡고 스스로 일어서던지 누군가 내밀어준 손을 잡고 일어서던지 하면서 또 한번의 걸음마는 완성될 것이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답게 나는 토끼인형을 안고 잠이 든다. 토끼인형은 선물을 준 아내와 딸아이의 마음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다. 꿈속에서 토끼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비법을 가르쳐 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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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5.19 06:11:29 *.248.75.5
창이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네.
따뜻한 글 좋아.
그대와 사는 한 여자는 그런 그대의 변화를 잘 감지할 거고
그대 보다 더 많이 감사할거야.
비법은 이미 그대 손 안에 있네...토끼는 그것을 즐기라고 말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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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8.05.19 06:45:03 *.254.17.78

뇌졸중으로 왼쪽 눈꺼풀을 빼고는 전신마비에 빠진
'잠수복과 나비'의 주인공이
흘러내리는 침을 닦을 수만 있어도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떠오르네요.
늘씬한 갈색머리 미인과 잠을 자고 나서도 행복한 줄을 몰랐던
지난 날을 한탄하면서요.

우리 모두는 이미 행복의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님의 행복의 조건이 낯선 사람의 눈에도 보이는 것 처럼요.^^
조만간 가족에게 쌈을 싸서 건넴으로써 그림의 구멍을 메꾸시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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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환
2008.05.19 09:24:13 *.34.17.93
이제는 까칠함으로 그만 위장하시고,
그냥 있는 그대로 따뜻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ㅎㅎ
암만 위장하셔도 우리는 다 알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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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5.19 10:04:21 *.244.220.254
저도 며칠전 10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답니다.
오랜만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외식을 했습니다. 간만에 칼질하는 곳에 갔는데, 아이들이 자주 와보지 못해서 그런지 서민(?)티를 팍팍 내더군요. 아무튼 저도 월남쌈은 아니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가장 오랜 시간 함께 우산을 쓰기도 하고, 함께 비를 맞기도 한 사람.
그 이름은 '아내'더군요. 형님의 걸음마에 저도 함께 걷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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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5.19 10:24:38 *.84.240.105
창 오라버니가 드디어 마음을 내 놓기 시작했네요..ㅎㅎㅎ
개인적으로다 오라버니 처럼 안 내 놓으려다 속을 내 놓는 사람들을 보는 게 너무 재미있다는 ....

오라버니의 생각이 깊은 글도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도 모두 너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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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9 12:32:33 *.41.62.236

그리하여 두 사람은 나처럼 아흔까지 해로하며 행복하게 살았네라.
월 듀란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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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5.19 15:33:40 *.97.37.242
참 따뜻하네...
가족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군.
지금 겪고있는 변화는 절대 작지 않은 변화 같아.
이런 변화를 느끼고, 말로 글로 표현 할 수 있다는건... 정말 축하할 일!

나도 한번 창님을 따라 해 보고 싶은데...
그럼 이번 생일엔 나도 월남쌈 해 달라고 해야하는 건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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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5.19 18:40:32 *.122.143.151

매력이 줄줄줄...

형~! 따스한 글이 넘 맛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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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5.19 22:05:23 *.36.210.11
金으로 안 되니까 애교로 때우려 드누만. 쉰도 되기 전에 포기 해 뻔진 겨?

하루 종일 잠만 잘 수 있는? 일요일이 좋다는 둥

월남쌈이 무지하게 맛있다는 둥

벨 벨 눈꼴이 셔서리 원... (참으려다 말고 불끈!)

여보슈, 미리미터님! 생긴대로 그냥 살어. ㅋ

누가 믿겠어?

우리에게도 보여주시던가? 앙???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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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05.22 06:36:28 *.72.153.57
겁나게 좋아보이네.
웃은 모습 좋던데... 더 많이 보여주셔요.
고마워 하면서 씩- 웃는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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