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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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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23일 08시 51분 등록
#1
그날도 어김없이 제 시간에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눈은 뜨지도 않은 채, 아주 능숙한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잡아채 울어대는 알람을 잠재운다. 그러고는 5분 간격으로 그런 짓을 세 번 정도 더 반복한 후에야 겨우 눈을 뜬다. 머릿속엔 매일같이 드는 한 가지 생각이 뿐이다. "아! 젠장. 오늘 또 그곳에 가야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육체도 그런 생각에 맞춰 반응한다. 몸은 무거워지고, 더 자고 싶고, 눈도 뜨기 싫다. 그냥 움직이는 것조차도 싫었다. 그날도 괴롭기만 한 하루가 시작된 것이었다.

억지로 세수를 하고, 억지로 이를 닦고, 억지로 아침밥을 먹는다. 억지로 옷을 입고, 억지로 넥타이를 매고, 억지로 양말을 신는다. 난 양복 입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넥타이를 매는 것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목에 딱 맞는 무언가가 내 목에 걸려있을 때는,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무겁고, 때때도 질식할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모든 과정을 억지로 끝내고, 억지로 구두를 신고,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집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매일 이 짓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날씨가 좋은 날은 날씨가 좋아서, 날씨가 흐린 날은 날씨가 흐려서 기분이 안 좋다. 그러니깐 출근을 해야 하는 날 아침엔 언제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지하철역 입구에 놓인 무료신문을 하나 집어 든다. 내가 보는 '포커스 FOCUS' 라는 신문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지 신문이 다 떨어져 없는 날이 많다.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데 그것마저도 없으면 기분이 더 안 좋아진다. 지하철을 타면 복잡한 그곳 안에서도 최대한 사람의 방해를 덜 받을 것 같은 곳을 찾아 자리 잡는다. 대게는 노약자석 바로 앞의 벽 쪽이거나 출입문의 양옆이다. 그러고는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전철을 타거나, 내 차를 몰고 출근을 하거나 우리나라의 출퇴근 전쟁은 역시 내 숨통을 조이는 것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한다.

30분 가량 전철을 타고 내려 이제는 버스로 갈아탄다. 버스를 타고 한강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간 후 하차하여 사무실까지 10분 정도를 걸어간다. 버스 정류장에서 사무실까지 가는 10분 동안 운이 좋으면 혼자가거나 친한 선배를 만나 같이 간다. 그렇지만, 전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동행하게 되는 경우도 굉장히 많았다. 그런 날이면 아 오늘 하루는 몸 사리고 조심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드디어 사무실 앞이다. 벌써 다른 사람들은 출근을 했는지, 눈에 익은 차들이 건물 앞에 세워져 있다. 마음속에서는 다른 곳으로 튀고 싶은 생각이 떠오르고, 가슴속에서는 한숨이 나며, 몸에서는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억지로 억지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러고는 전혀 반갑지 않은 마음과 표정과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몇 번 외치고는 자리에 앉아 하루를 시작한다.

#2
그날도 어김없이 핸드폰에선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아직 알람이 울리기 5분전이다. 이상하게도 이 시간이 되면 눈이 떠진다. 알람은 얼마 전까지보다 1시간 이상이 앞당겨져 있었다. 하지만, 핸드폰에서 울리는 알람보다도 나의 생체에너지시스템에 맞춰놓은 알람은 놀라우리만치 정확했다. 이른 시간이지만 눈을 뜨는데 힘들지 않았다. 숙면을 했는지 몸은 날아갈듯이 가볍다. 하루의 피로를 풀어버리는데, 반드시 많은 수면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벌떡 일어나 잠시 후에 울릴 알람을 취소한다. 그러고는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한다. 세수를 하고 개기름이 말끔히 제거된 깨끗한 내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다. 거울을 보고 씨익하고 한번 웃어준다. 예전엔 잘 몰랐는데, 나도 웃는 모습이 꽤 괜찮아 보인다는 자화자찬을 해본다. 이젠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좀 더 멋지게 웃는 연습도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짜 웃음이라도 웃으면, 진짜 웃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다는 소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거울 속에서 웃는 내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진짜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힘이 났다.

욕실에서 나와 간단히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남이 보면 꽤나 우스울 것 같은 스트레칭을 한다. 그러고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다. 사실 아침에 일어나도 마땅히 할 일이 없을 때는 일찍 일어나기가 참 힘들다. 뭐든지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을 때는 평소 마음속에 품고만 있었던 책을 읽는 것이 좋다. 그래서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던 책을 읽는다. 책을 어느 정도 읽고 나니, 시장기가 몰려온다. 배고파 아침식사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다. 그저 그냥 자동차에 기름 넣듯이 까칠한 입안으로 연료를 채워 넣는 것이었다. 하지만, 뭔가 괜찮을 일을 하고 난 후에 먹는 아침식사는 더욱 맛있고, 내 몸에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전에 먹던 양의 두 배는 거뜬히 먹어치우고 일어선다.

이제 출근 준비를 한다. 왠지 들뜬 기분에 오늘은 좀 더 화려한 셔츠에 넥타이를 골라본다. 넥타이 매는 것은 여전히 답답하지만, 셔츠의 목 단추를 풀고 약간의 공간을 주니 한결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화려한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한껏 미소를 지은 내 얼굴이 괜찮아 보여 기분이 좋다. 일어나서 읽던 책을 가방에 챙겨 출근을 한다. 이제는 매일같이 보던 무료신문대신 책을 읽는다. 전철을 타면 한없이 우울한 표정의 살아있는 시체들같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눈에 뜨인다. 얼마 전까지 나도 저랬을까 라는 생각이 스치며, 다시 책 속으로 빠져든다.

전철에 내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걸어가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철만 타거나 버스만 탔으면 조금 편하긴 하겠지만, 참 지루하고 답답했을 텐데 중간에 이렇게 가벼운 산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한강다리를 건널 때면, 날마다 멋진 한강을 볼 수도 있고 말이다. 언제나 아침이면 반대편 차선은 막히면서도 내가 가는 차선은 뻥 뚫려있다. 참 다행이다. 내려서는 또 10분가량 산책을 한다. 그것도 줄곧 오르막길이다. 가뜩이나 운동할 시간이 없는데, 아침마다 저절로 하게 되는 운동이다. 그 오르막을 다 오르고 나면 정면에서는 언제나 불끈 솟아오른 태양이 날 맞이한다. 언덕을 오르면 날 기다리고 있던 태양이 나에게 하루를 살 수 있는 에너지를 듬뿍 불어넣어주는 듯하다. 태양의 에너지를 한껏 받은 나는 마음속으로 "오늘도 파이팅"을 외치며 사무실 문을 연다. 내 꿈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신나는 하루의 시작이다.

#3
기억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닌, 사건에 대해 느꼈던 감정의 기록이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을 읽었다. 그의 기억은 섬세했다. 시인이라 그런지 아름다웠고 낭만적이었다. 자서전 속에 남긴 그의 기억처럼 그의 과거는 모두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한 경험들은 아름답거나 낭만적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단지, 당시 그것을 바라봤던 그의 시선과 그것에 대해 느꼈던 그의 감정이 그것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은 단순히 내가 했던 경험에 대한 기록이 아닌, 그 경험에 대해 느꼈던 나의 감정의 기록일 것이다. 같은 경험도 누군가에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누군가에게는 괜찮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지 않는가? 또 나 자신조차도 같은 과거의 경험이 다르게 기억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기억은 한없이 괴로운 것으로도, 한없이 아름다운 것으로도 남을 수 있다. 나의 기억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내가 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다운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시인의 눈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나의 과거, 나의 기억들은 나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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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8.06.23 13:22:59 *.117.68.202
몇개의 기억들이 겹쳐져 어울린다..^^
지환아 담에 기회되면 보여줄께..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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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6.23 16:03:38 *.84.242.254
맞아..기억이라는 것은 어쩌면 객관적인 진실보다는 주관적인 감정에 가까울 지도 몰라..그러니까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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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6.23 17:27:42 *.127.99.16
맞아 짱 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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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양이야
2008.06.23 20:31:42 *.122.143.151

기억? 감정? 솔직? 경험? 기록? 추억?

알듯 모를 듯, 모를 듯 알듯 허이..

난 이렇듯 찌푸른 날에는 감정을 찜쪄먹고 싶다...

새빨간 초장에 청양고추 미세조각을 얹어 혀로 살살 핥으며

거울 속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다.

그것이 나의 진실된 모습일까?

지금 내가 쓴 글 알듯 모를듯, 모를 듯 정말 모르겠다..

미안하다, 지환아.. 내 감정이 오늘따라 길을 잃고 헤맨다..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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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6.24 12:54:03 *.244.220.254
좋은데~ 지환이다운 글이구나~

"기억은 단순히 내가 했던 경험에 대한 기록이 아닌, 그 경험에 대해 느꼈던 나의 감정의 기록일 것이다." 메모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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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6.24 17:28:57 *.97.37.242
"기억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내가 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다운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 공감 가는 글이네...
감정에 따라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두 상황을 비교한 것도 참신하고...

헌데, 글을 쓸때 사실이나 사건(fact)도 감정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 같군. 글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특히 자서전 같은 경우엔 말이지... 내 생각이 그렇단 야그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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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환
2008.06.24 21:32:55 *.34.17.28
현웅형님은 뭔지모르지만 빨리 보여주시고~~

재우형님은 기분이 울적하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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