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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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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4일 00시 04분 등록

산행

 

지난해 말부터 발생하고 있는 구제역은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의 중간 역학조사 결과 초동 방역조치가 늦어진데다 사람과 차량에 의해 전국으로 확산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의 중간 역학조사 결과에 따르면...... 특이하게 서울 경기 지역에서는 밀수입된 혈액이 구제역 확산의 원인 중 하나로 알려졌습니다. 밀수 용의자는 현재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사장님 저 얘기 들으셨어요?”

근무를 마치고 문을 나서던 김군이 TV뉴스를 보고 묻는다.

무슨 얘기.”

혈액을 밀수하다 걸린 사람. 우리 동네 산대요. 저번에 길 위에 쓰러져 있던 여자 기억나시죠.”

그래! 어떻게 알았는데?"

얼굴에 피가 쏠렸다.

삼촌이 형사거든요. 얘길 듣다 보니 인상착의가 꼭 닮았더라구요.”

혈액 수입이랑 구제역은 무슨 관계래?”

그게요. 구제역 때문에 세관방역조사가 강화되면서 혈액을 샘플 조사했대요. 근데 거기서 뭐가 나온 줄 아세요?”

김군은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A형과 B형 혈액이 한 팩에 섞여 있더래요.”

섞여 있었다고?”

사람과 소의 피가 섞여 있었다는 겁니다.”

갑갑증이 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경찰에서는 혈액의 용처를 추궁하고 있는데 여자가 입을 안 여나봐요. 그 동안은 수신인이 병원으로 돼 있어서 문제가 없었는데 구제역 때문에 딱 걸린 거죠. 의료기관도 아닌 개인이 피를 쓸 일이 어디 있겠어요. 경찰에서는 가닥을 못 잡다가 혈액성분을 추출해 사제 의약품을 만들어온 것으로 보고 밀수 혐의를 적용했답니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인데 그렇게 용의주도할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죠. 제 주변에도 애 어른들 많아요.”

글쎄…”

사람을 보는 눈이 흐려졌나. 밀수업자라니. 그녀와 탐욕은 당최 어울리지 않는다. 난다긴다하는 정치꾼들의 계략을 헤치고 최고에 올랐던 이가 나다. 상대의 눈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어림없는 일이다. 뽀얀 피부에 미혹됐다고 해도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지 못했다. 응축. 그녀의 아득한 눈빛을 프리즘에 비추면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질 것이다. 정체를 알 수 없게 뭉뚱그려진 그 빛에서 언젠가 슬픔의 대역이 분화된 적이 있다. 길거리에 쓰러진 그녀가 어머니의 간호로 눈을 떴을 때였다. 그 후로 슬픔은 야무진 입술의 궤적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그녀는 누구인가.

 

그런데 더 쇼킹한 게 뭔 줄 아세요. 여자의 혈액을 검사했는데 구제역 항체 양성반응이 나왔대요.”

사람이 구제역에 걸렸단 말야?”

감염됐는지 확실치는 않지만이론상으로 항체는 양성이고 항원은 음성으로 나왔으니 구제역이 몸을 한번 쓸고 간거죠.”

그렇다면 그녀가 쓰러진 이유가 혹시…’ 고개를 드는 순간 미혹에 빠진 눈이 김군의 눈과 마주쳤다.

사장님도 그 생각하시죠? 경찰이 그녀를 안 놔 주는 진짜 이유가 그거래요. 인간이 구제역에 감염된 보기 드문 사례라는 거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사장님, 그 여자 안양 구치소로 이송도중에 도주했대요.”

김군이 출근하자 마자 호들갑을 떨며 첫마디를 꺼냈다.

화장실이 급하다고 해서 휴게소에서 내렸는데 감시하던 경찰을 때려 눕히고 최루탄총을 빼앗아 사라졌대요.”

그게 언젠데?”

점심 때요. 삼촌이 오늘 비번인데 그 일 때문에 나가봐야 한다고 투덜대더라고요.”

김군과 교대하고 집에 들어와 TV를 켰다. 마감뉴스의 한 꼭지로 탈주범 소식이 전해졌다. 앵커를 잡은 화면 우측 상단에 왼쪽 입술이 말려 올라간 그녀의 사진이 소개되었다. 스캔 복사를 여러 번 거친 탓인지 우중충한 색감이 기괴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경찰은 용의자를 화물종착지인 해운산입구에 내려줬다는 트럭운전기사의 신고를 받고 현재 인근 지역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여자 앵커의 진지한 표정과 그녀의 사진이 묘한 부조화를 만들어냈다. 산입구에 그녀를 내려주고 10여분 만에 경찰이 출동했다면 그녀는 천생 산을 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책꽂이를 뒤져 한 귀퉁이에서 해운산 지도를 찾아냈다. 지도는 구입한 지 20년이 넘어 접힌 부분이 너덜거렸지만 등산로와 지명을 구별할 정도는 되었다. 손가락으로 등산로를 짚어가며 옛 기억을 되살렸다. 등산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간 집게손가락이 정상을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동심원 모양으로 펼쳐지던 등고선이 선 하나로 모였다. 절벽이었다. 그랬다. 해운산은 오던 길을 되밟아 내려올 수 밖에 없는 산이었다. 일이 꼬이는 게 사달이 나겠다.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배낭에 되는 대로 어머니의 등산복과 등신화를 쑤셔 넣었다. ‘지방에 다녀 오겠습니다. 가게 좀 부탁해요.’ 어머니의 머리맡에 쪽지를 남기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톨게이트를 벗어나자 하행선 차량들이 부쩍 줄었다. 창문틈으로 인입된 파찰음이 뇌관이 되어 그녀의 영상을 앞 유리창에 뱉어내었다. 바람소리인지 환청인지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엑셀을 밟았다. 그때마다 관성에 눌렸던 몸뚱이가 앞으로 튕겨 나갔다. 몇 차례 관성의 법칙을 겪고 나니 까라졌던 몸이 서서히 감각을 회복했다. 어둠의 바닥을 치고 부상하는 느낌이랄까. 산입구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다. 운전석 유리창 너머로 바리케이드와 경찰 서너 명이 눈에 들어왔다. 검문소를 멀리 돌아 초등학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10여분을 걸으니 주능선으로 통하는 샛길이 나왔다. 손으로 길을 더듬으며 조심조심 걸었다. 산 공기는 차갑고 습졌다. 몇 분 걷지 않아 땀이 얼굴에 송글송글 맺혔다. 날이 밝으면 산 입구에서부터 정상을 향해 토끼몰이가 시작될 것이다. 이렇게 승산 없는 게임을 해 본 적이 있던가. 입구는 차단되었고 퇴로는 막혀 있다. 그녀를 만난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그녀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스스로 침몰을 선택한 배였다. 서서히 존재를 놓아버릴 판이었다. 온몸의 힘을 빼고 목을 죄어오는 수압에 항복을 고하려는데 느닷없이 등장한 그녀가 생의 불씨를 싸질러놨다. 알아야겠다. 이 혼란스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스물 두 살 그녀 안에 깃든 모든 것을. 주능선에 접어들었다. 오늘만큼은 지구상 최고의 동물들로 오감을 대체하는 상상을 하며 걸었다. 단호한 걸음발로 목표를 향해 진격하는 파충류의 뭉툭한 다리를 본받기를. 달의 눈부처에서 탄식하는 미물을 놓치지 않는 부엉이가 되기를. 십 리 밖의 나뭇잎 밟는 소리에 하루를 시작하는 박쥐와 만원버스 안의 주인 냄새에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닮기를. 열여덟 살 동정이 떨어지던 그날처럼 그녀와 마주했을 때 세상이 쓰리고 아프게 옷을 벗기를.  

 

정상 쪽으로 난 오솔길을 느릿느릿 걸어나갔다. 길 양쪽으로 늘어 선 물푸레나무들이 실루엣으로 존재를 드러내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양새가 위압감을 주었다. 처음에는 배경처럼 다가왔던 나무들이 정신을 집중할수록 생명체처럼 미세하게 움직였다. 왼쪽의 나무 가지가 바람결에 흔들린다 싶더니 이번에는 오른쪽의 가지가 가늘게 떨었다. 백여 미터를 갔을까. 나무들의 움직임에는 패턴이 있었다. 이방인을 상대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있었다. 아니면 달갑지 않은 틈입자의 행보를 누군가에게 알리고 있거나. 물푸레나무 숲을 벗어나 갈대 군락지로 들어섰다. 곤두섰던 신경이 팽팽한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풀어졌다. 그것도 잠시였다. 갈대 사이를 오가는 서늘한 기운에 긴장의 근원이 숲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먹잇감을 노리는 살기였다. 동물인지 사람인지 적당한 때가 되면 놈은 정체를 드러낼 기세였다. 이왕이면 그녀였으면 좋겠다. 아침이 되면 경찰이 들이닥칠 테고 이대로 산행은 정리될 것이다. 멀리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정수리를 내밀었다.

앞으로 나와라. 네가 무엇이든.”

갈대무리를 향해 외쳤다. 대답 대신 정적이 메아리로 돌아왔다.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이 당신이 아니라는 것 압니다. 나도 내가 아닙니다.”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이 무력하고 낯선 느낌은 뭐지. 긴 한숨인 줄 알았는데 굵은 슬픔이 목구멍을 눌렀다. “나는 김봉남입니다. 김봉남... 당신이 그걸 알게 해 주었습니다.” 눈물이 발갛게 상기된 뺨을 타고 흘렀다. 밀물이 걷히고 나니 상황이 명료해졌다. 군인은 전장터에 있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 비루한 생애에 처음으로 빛이 찾아왔다. 지금이 내 생의 최후라 해도 무명용사의 죽음이 아니라 다행이다. 나는 김봉남이니까.

 

앞쪽의 갈대 숲에서 서걱서걱 소리가 났다. 갈대를 헤치는 소리가 멈추고 이윽고 물체가 형체를 드러내었다. 그녀였다.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질 때 모습과는 달리 푸른색 수의에 하얀 고무신 차림이었다. 수의 여기저기에 지푸라기가 달라붙은데다 무르팍 부위가 어디에 부딪힌 듯 붉게 물들여져 남루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에서 섬광처럼 빛났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는 완고한 침묵이 배어나왔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돌아가세요.”

 

IP *.201.237.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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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1.04.04 09:22:46 *.30.254.21
갈수록...
흥미진진..
뭔가 달라진 느낌?
그 정체는 뭐지? 묙에게 물어봐야 겠다..

글고, 상현아.
큰 형님 왈, 유끼는 화요일날 올리라 하셨어..
앞으로 1년간 화끈한 화요일을 사랑하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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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1.04.04 14:14:02 *.236.3.241
역사는 사례를 들어 가르치는 철학이고,
신화는 은유로 알게하는 철학이니,

사부님이 말씀하신 역사에서 신화로 들어가는 단계라 그런가 봅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역사와 제도가 퇴색한 그 지점에서
원초적 욕망을 좀더 실감나게 그리려 했는데...
하여간 그런 의도가 좀 있었습니다.ㅎㅎㅎ

북페어 전에 완성을 봐야하기에 화요일 전에 올리더라도
양해 좀 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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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4 13:12:31 *.98.16.15
휴..하는 한숨을 토해내게 만드시는군요. 맨 끝 문장 말입니다.
이야기가 흡입력이 있어요.

근데.. 연재소설이란게 정말 감질나게 하는데요~
다음회가 올라올때까지 지난번 스토리를 꽁꽁 붙잡고 있어야하고.. 끙! 입니다요^^:::
어쩌면 이래서 책이 나오면 이 감질남을 해결하고 싶어 젤 먼저 책을 사는건지도 ㅋㅋ

잼나게 읽고 있는, 그래서 뒷 야그가 무척이나 궁금한 독자 1인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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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1.04.04 13:51:21 *.236.3.241
연구원 동기가 아닌 일반 독자의 첫 코멘트, 무지 감사합니다 ㅎㅎ
산으로 가는 부분에 애를 먹어 시간이 지체되었네요. 기승전결로
보면 결을 향해 치닫는 단계입니다. 앞으로 뜸들일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부족한 글 애독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두 사람 모두 의미있는 결말을 맺을 수
있도록 성원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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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1.04.04 21:07:47 *.42.252.67
"돌아가긴 어딜 돌아가"
빨리 엄니 옷으로 갈아입혀 같이 탈출해야해. 경찰망을 피해
둘은 떨리는 손을 꼭 잡고  그 산에서 나가게 해줘~~ 아 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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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1.04.05 21:35:06 *.236.3.225
기둘려 보삼~~ 생각 좀 해 보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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