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연주
  • 조회 수 1838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11년 4월 4일 23시 19분 등록

칼럼. 두 친구를 위한 부드러운 개입

학생들은 ‘정황 또는 맥락’의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러한 영향력은 더 나은 쪽으로도 혹은 더 나쁜 쪽으로도 행사될 수 있는 것이다. - <넛지> 中

 

새학기 첫날부터 사제 바지를 입었던 순종이가 결국 무단결석을 했다. 웬 사제바지냐는 내 말에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내일 교복을 입겠다고 하더니 다음날도 그대로, 왜 그냥 왔냐는 내 말에 이번엔 바지가 찢어졌단다. 그리곤 종례시간이 되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단짝인 성준이에게 행방을 물었으나 입에 지퍼가 제대로 잠겨있다. 역시 남자는 의리다.

다음날 두 녀석이 함께 학교에 오질 않는다. 개학 후 매일 30분 넘게 지각하던 녀석들이라 1교시가 지나기 전에 오겠지 했는데 보이질 않는다. 녀석들의 핸드폰에 전화를 해도 받질 않고 부모들에게 전화를 해도 통화가 불가능하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아이들은 물론 부모들에게서도 연락이 없다. 마지막이다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왜 학교에 안 오니? 전학 갈 예정이니?”

정확히 1분 뒤에 전화벨이 울린다. 다른 전화를 받다가 놓쳤는데 이내 문자가 온다. ‘전화 좀 주세요. 선생님!’ 순종이다. 전화를 거니 순종이의 첫마디 “죄송해요. 선생님” 이런 가식적인 예의상하는 말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다짐하며 “왜 학교에 안 왔니? 무슨 일있니?”라고 애써 냉정하게 물었다. 순종이는 아직 학교생활에 적응이 안 되고 수업 듣기가 힘들어서 오늘만 놀고 내일부터 학교에 잘 나가겠다고 말한다.

난 지금 어디냐고 묻고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학교에 와서 이야기 하자. 당장 학교로 와!”라고 말했다. 어라 순종이가 바로 “네, 지금 갈께요. 중앙시장이에요. 30분정도 걸려요.” 말해준다. 그래도 아예 째지 않고 학교에 나와준다는 말에 감격스럽다. 보통 심하게 막 나가면 전화 꺼놓고 통화도 안 되는 대답 없는 너이거나 연락이 되어도 다 귀찮으니 내버려두라고 투정을 부리기 일수 인데 이정도 상태면 무척 양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한 가지 더 물어본다는 것을 잊었다. 전화를 또 하면 녀석의 심기를 어지럽힐 까봐 조심스레 문자를 보내본다. ‘성준이도 같이 있으면 함께 와라.’

30분 만에 오겠다던 녀석들은 6교시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교무실에 들어섰다. 학교에 오지 않은 동안 무엇을 했는지 조사를 했다. 그들의 코스는 역시나 “노-당-PC”, 노래방-당구장-PC방이었다. 왜 학교 나오기가 싫었냐고 물으니 순종이는 과학샘이 자신을 귀찮게 했단다. 뭐라고 하셨는데 그러냐고 물으니 자기가 졸려서 엎드려있는데 깨우니까 귀찮았다는 것이다. ‘헉! 뭐냐고. 생각보다 센 놈이다. 뇌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렇게 저렇게 녀석들에게 질문을 하며 상태를 파악하며 슬쩍슬쩍 비위를 맞춰주면서 꿈이 뭐냐, 지금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냐는 질문을 했다. 순종이는 꿈이 없고 지금 생활에 너무나 만족한다며 자신 있게 말한다. 노-당-PC의 생활이 너무 좋고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놀면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너무나 확고하게 흔들림 하나 없이 이야기를 한다. 이 녀석은 자기 세계가 너무나 확실해서 지금 상황으로는 내 말이 먹히지 않겠다는 판단에 너그러이 일단 보내주었다. 순종이는 차차 관찰해 그 틈새를 잘 비집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혼자 남은 성준이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성준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크게 “아버지가 되는 거요.”라고 말한다. ‘오호~ 멋진데’라고 생각하는 찰나 성준이는 이내 토를 단다. “우리 아빠 같지 않은 아버지가 되는 거요.” 헉! 녀석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왠지 성준이에게는 순종이에게서 받은 느낌과는 다른 희망이 보였다. 지금 성준이에게 그런 목표라도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비록 지금은 아플지라도 언젠가는 자신이 원하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하다보면 아빠에 대한 미움대신 사랑의 씨앗이 싹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보았다. 성준이에게 일단 네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능력을 쌓아야 하니 이전과는 다른 성실한 태도로 학교생활을 해야만 가능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성준이는 똘똘한 아이이다. 다행히 잘 알아듣고 이해하는 눈치이다.

그리고 오늘 녀석들은 쉬는 시간에 학교의 운동부 숙소에 몰래 숨어들어가 구름과자를 먹다가 숙소를 관리하는 체육선생님께 딱 걸렸다. 포스가 남다른 선생님이라 녀석들은 한순간 완전히 쫄아서 모든 벌이라도 다 받을 것 같은 표정으로 생활인권부(예전의 학생부)로 끌려갔다. 아마도 조만간 부모님께서 학교에 오실 것이고 봉사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제대로 적절한 시기에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회에 확실하게 나쁜 버릇을 고치고 마음을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오늘 체육샘에게 걸리기 전에 나에게 한 번, 국어샘에게 또 한 번 걸렸었지만 녀석들이 통 사정하고 미안해하기에 봐주고 봐주었다. 그런데 녀석들에게 용서란 나쁜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지 못한 진통제 정도의 처방이었나 보다.

점심시간에 두 녀석이 풀이 죽어 밥먹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불편하다. 더 이상 나에게 잘 하겠다는 말을 하며 한 번만 봐주세요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조차 민망한 듯 내 눈을 피한다. 녀석들은 제일 먼저 점심을 먹고 교실을 나선다. 생활인권부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게 될 테니 오늘은 따로 불러 말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종례시간에 교실을 둘러보니 순종이 자리가 깨끗하다. 구름과자 섭취 건으로 귀찮게 불려다닐 것이 싫어서 도망을 친 모양이다. 다행히 절친인 성준이는 자리를 지켜주었다. 지난번 꿈을 물어보던 날 순종이가 즐겨하는 무단지각, 무단외출, 무단결석 등을 따라 하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을 했었는데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순종이가 학교를 나간 것이 걱정되기 보다는 성준이가 교실에 앉아있는 것에 고마움이 더해진다.

친한 친구이지만 걸어갈 길이 다를 두 녀석에게 나는 과연 어떤 개입을 해주는 것이 녀석들을 자연의 섭리대로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 더 좋은 상태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두 친구 모두 억압이라는 기제가 지금의 녀석들은 비뚤어지게 만든 큰 요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에게 억압으로 느껴지지 않으면서 절제의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부드러운 개입이 필요하다.

IP *.203.200.146

프로필 이미지
상현
2011.04.05 05:27:46 *.201.237.122
오랜만에 글로 연주를 만나니 반갑기 그지 없다 ㅎㅎ

순종이와 성준이, 10년 후에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이겠지
포장마차에서 만난 20대 후반의
두 친구가 그려지네
흔들리되 뒤돌아보지 않는
청춘이 되었으면 좋겠다
프로필 이미지
은주
2011.04.05 14:38:11 *.42.252.67
완전 젊은 샘 티가 팍팍 나는 글이다.

읽으며 그 말썽꾸러기들 보다  연주샘이 더 걱정된다.

연주야~ 그 안에서도 아이들의 가능성과 꿈을 보는 너는  진정한 선생님이다.

그리고 순종이 이름부터 바꾸라고 해. 순종도 안하는 것이 순종은 무슨....
프로필 이미지
우성
2011.04.06 08:56:20 *.30.254.21
연주야..
너, 글쓰는 스타일이 좀 바뀌었네..
약간..날라리 분위기가 나는 걸? ㅎㅎㅎ
아예, 대 놓고 화~악 날라리가 되는 건 어때?
'이런 싸가지 없는 넘덜' 뭐 이러면서...
암튼 재미있다.. ㅎㅎ
프로필 이미지
2011.04.06 11:26:56 *.10.44.47
노-당-PC의 생활이 너무 좋고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놀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연주야. 순종이야말로 제대로 야무진 꿈을 꾸는 거 아니냐?
단, 순종이가 잘 모르는 게 하나 있는 것 같다. 10년후에도 20년후에도 '자유'롭게 노-당-PC하려면 공부든 뭐든 하나라도 열심히 해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연주샘의 경쾌한 화법으로 실감나게 전해주는 게 좋겠다.

만약 그걸 깨닫고도 내내 그대로람 아마도 순종이에겐 더 근본적인 상처가 있을지도 모르니 더욱 관심을 기울여 관찰을 해봐야할 것 같구나..

나도 우성오빠말에 동감이야. 요즘애들 말도 팍팍 써감서 이야기를 풀어가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아이들은 친근감을 느낄테고, 어른들도 읽으면서 애들이랑 소통하는데 필요한 '어휘공부'가 될테니까 말야.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292 단상(斷想) 59 - 겨울의 속내를 털어내고 세상 기지개의 하품을 켜는 나무 file 書元 2011.04.09 2857
2291 나, 질문을 던지는 여자 구라현정 2011.04.07 1684
2290 밥벌이의 지겨움 [5] 자산 오병곤 2011.04.07 2398
2289 [호랑이] chapter 2 들어가는 글 crepio 2011.04.07 1643
2288 [컬럼] 반지의 여인 [5] 최우성 2011.04.05 2386
2287 [호랑이] 13가지의 개인 마케팅 도구 (2) [6] 이희석 2011.04.05 2081
2286 깊은 견생 file [14] 이은주 2011.04.04 1868
» 칼럼. 두 친구를 위한 부드러운 개입 [4] 연주 2011.04.04 1838
2284 범인-모험의 시작이다!!! [9] 루미 2011.04.04 1655
2283 [신화와 인생을 읽고] 춤추는 부활 [14] 사샤 2011.04.04 2276
2282 <소설> 우리 동네 담배가게 아저씨 나폴레옹(13) [6] 박상현 2011.04.04 1852
2281 [늑대1] 신화는 무엇인가. file [11] 강훈 2011.04.03 2632
2280 1. 나의 한계를 넘어서서 [9] 미선 2011.04.03 1958
2279 [양갱칼럼1] 아름다움에 속을지라도 file [17] 양경수 2011.04.03 2495
2278 나비 No. 1 나만의 희열 따르기 5단계 [10] 유재경 2011.04.03 3700
2277 [평범한 영웅 001] 자발적 빈곤과 의례의 힘 [12] 김경인 2011.04.03 4143
2276 라뽀(rapport) 46 - 세상의 끝을 잡고 書元 2011.04.03 1707
2275 단상(斷想) 58 - 천안함 1주기 file 書元 2011.04.03 1678
2274 1. Follow my bliss? 나만의 희열을 따르고 있는가? [12] 미나 2011.04.03 1852
2273 무덤 하나를 만났다 [1] 신진철 2011.04.02 1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