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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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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9일 21시 34분 등록

 

#1.

흔하디 흔한 꽃 사진으로 첫 개인전을 연다는 편지가 왔다. 이름은 배기태. 정성들여 꼭꼭 눌러 쓴 듯, 글자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6년 전 양정수씨 소개로 사진을 들고 찾아뵙었던 배기태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그때 사진가 보다는 다른 직업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셨지만, 여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공연 사진으로 밥벌이도 하고 있구요. 저의 첫 개인전입니다. 꼭 찾아와 주십시오."

어렴풋이 기억이 날 듯도 했다. 내 작업실로 불쑥 찾아와 사진을 들이밀던 순진한 눈빛의 사내였다. 순간 그날 내가 했던 말이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천재적 재능이 있는 사람만이 예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누구라도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고 싶고, 그것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자신의 능력만큼 보여 줄 수 있는 거였다.
마침 장소를 보니 자주 들리던 인사동 거리의 갤러리였고, 시간도 괜찮았기에 전시장을 찾았다. 전시장은 진한 주홍빛 양귀비 꽃으로 가득했다. 초여름의 생기와 푸른 하늘의 청량함이 청춘을 상징하는 듯 했다. 더욱이 놀라왔던 것은 별 재능없어 보이던 그 청년의 사진들 속에서도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이 있었던 것이다. 난 5년 전 내뱉은 말들을 더욱 후회했다.

한참을 그 그림 앞에 서있는데, 그 친구가 어디선가 나타나 인사를 했다.

"선생님,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허허, 첫 개인전을 축하하네. 지금 나 엄청 후회하고 있다네. 그때 내가 했던 말을 주워담고 싶어." -- "괜한 말씀 마십시요. 이렇게 와주신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그래 그 동안 어떻게 지냈나?" -- "네, 먹고사는 것은 잡지사진도 찍고, 주로 공연사진을 많이 찍으면서 해결하고요. 이렇게 틈틈히 개인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 "저기 있잖나, 나 이 작품이 아주 좋아, 이거 나에게 팔게."

사진작가에게 가장 큰 찬사는 백마디 말보다는 그의 작품을 사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건 내 진심이었다. 그 사진은 주홍빛 양귀비로 가득한 어느 정원을 스쳐 지나가는 여인을 담은 것이었다. 내 말을 듯고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듯 반짝였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난 전시가 끝나는 날을 맞추어 작품을 가지고 가기 위해 다시 들렸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배송보다는 차로 직접 나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시장이 다 정리되고 우린 근처 카페에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그 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자네, 왜 하필 양귀비 꽃 사진으로 사진전을 열었나? 무엇이 자네 마음을 그 꽃에 가게 만든거지?"

부끄러운듯 홍조를 띤 얼굴로 그가 말했다.

"그냥 끌리는거 있잖아요. 알 수 없이 끌리는..." -- "그냥 끌렸다고? 그래도 있잖나, 뭐 계기 같은게 있을것 같은데."

그는 상념에 잠기 듯 눈을 지긋이 감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돈되는 사진일이라면 뭐든지 했었어요. 그냥 내 젊음을 일 속에서 불사르고 싶은 마음 뿐이었지요. 내 작업을 한다든지,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은 꼭꼭 눌렀었지요. 왜 그랬는지 몰라요. 그저 내 안의 예술적 열정은 드러내봐야 별볼일 없는 돌맹이처럼 하찮게 느껴졌었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꺼라는 생각이 컸어요. 그러던 어느날이었어요."


#2.

어느 뮤직페스티벌의 공연 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초여름 햇빛은 쨍했고, 한 낮의 대기는 후텁지근했다. 야외공연장은 젊은 열기로 달아올랐었고, 강렬한 비트에 몸이 흔들흔들 거렸다. 그러던 중 다니엘이라는 여가수가 기타를 들고 무대 위로 올랐다. 그녀는 커다란 눈과 약간 검은 피부의 아름다운 이국적인 외모에, 분홍빛 나시티를 입고 무대에 섰다.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었고, 후끈 달아올랐던 공연장은 영화 원스(Once)의 주인공처럼 기타 반주에 생목소리를 읍조리는 한 여가수에 조용히 집중되었다. 그날의 기억이 강렬했었나 보다. 그 분위기였던가, 아니면 그 여자의 목소리였던가... 하지만 난 별볼일 없고, 열정도 없는 가난한 프리랜서 사진가이었기에 뭔가 해봐야 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냥 내가 정해놓은 테두리 안에서 똑같은 일상을 살 뿐이었다. 그런데 아는 스튜디오를 통해 어느 가수의 앨범 사진 제의가 들어왔다. 그 다니엘이라는 여가수였다.

싱어송라이터, 아버지는 이스라엘인이었고 어머니는 한국인. 미국에서 살다가 음반제작사의 제의로 우리나라로 돌아와 음악활동을 시작한다고 프로필에 써있다.

앨범 사진을 찍는 날, 우린 교외의 조용한 분교에서 만났다. 음반 PD와 관계자 몇명이 같이 왔다. 여름날의 햇빛은 너무 강렬했다. 난 뜨거운 태양 아래서 연신 셔터를 눌렀고, 그녀는 사람들이 쳐준 그늘막 아래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의 가사 "...Good bye, Good bye~" 가 묘하게 들렸다.

업뜨리기도 하고 사다리에 올라기기도 하면서 사진을 찍고, 관계자들에게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하면서 작업을 했다. 멀리서 마주친 그녀의 눈빛에 나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 서로의 일에 열중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관심의 눈빛이었다.

사진을 찍던 중 누군가 가꾸어 놓은 양귀비 꽃밭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불연듯 그 꽃 하나를 꺽어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전했다.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꽃을 받아 귀에 꽂았다. 내 마음이 환해졌다. 그녀는 한국말이 서툴렀다. 나도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고, 그냥 나오는대로 이렇게 말해 버렸다.

"You are so beautiful!" 어색한 웃음과 함께...

그날 난 미친듯이 사진을 찍었고, 땀범벅으로 녹초가 되어 하루를 마쳤다. 다음날 새벽, 꿈 속에서 양귀비 꽃 밭에서 춤을 추는 그녀를 보았다. 나도 따라 춤을 추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세상이 떠나갈 듯한 함성 소리도 들렸고, 태양 빛이 너무나 강해 노출이 오바된 사진같은 분위기를 띠었다.

그 뒤로 난 초여름만 되면 양귀비 꽃을 찾아 다녔다. 내 안의 열정이 살아나는 것 같았고, 내 안의 숨겨졌던 예술적 감성이 표현되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사람들도 나의 작업들을 좋아해 주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평론가들이 '삶의 권태에 대한 저항' 이라는 수식어를 내 사진에 붙여 주었다. 내 이름을 단 사진집이 나왔고, 첫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3.

다니엘은 첫 앨범을 내고 몇 번의 공연 소식이 들리더니, 여느 수많은 가수들이 그렇듯이 조용히 사라졌다. 아니 그녀가 사라진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이 없어졌다고 말하는게 옳겠다. 홍대근처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고, 다시 미국에 나가서 음악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그녀의 소식엔 언제나 눈과 귀를 크게 열고 관심을 가졌다. 그나마 몇년이 지나자 그런 소식조차 끊기고 아예 잊고 살게 되었다. 난 유명하진 않지만 개인 작업실을 가진 작가가 되었다. 여전히 잡지일도 하고 공연사진도 찍는다. 가끔은 사진전도 열고 사진책도 발간하고 있다.

십년 가까이 지난 어느날, 화창한 초여름이었다. 아주 우연히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호텔에서 노래부르는 그녀를 보았던 듯 하다. 아니 확실히 보았는데, 클라이언트들의 질문이 계속되어 몇가지 대답을 하고나니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꿈을 꾼 듯 멍한 나를 보고 스텝 한 명이 말했다.

"누구 찾어? 왜그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니, 누군가를 본 것 같아서..."

그때 누군가 음료수 잔을 넘어뜨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호텔 가든에는 아무도 없었고, 진한 양귀비 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다니엘9.JPG
2011 Daniel in Korea, Dangjin.  사진/양경수





IP *.166.20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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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13:28:27 *.124.233.1
형 ^^
괴테가 되어보셨군요.
멈추지 않고 한달음에 읽었어요.
소설(?) 좋은 소설이 뭔지 저는 잘 모르지만,
형 글 읽고 울림이 있었어요.
그럼 좋은 거 맞죠? ^^

제목도 좋고, 다니엘도 귀엽고 사랑스럽구요~
좋아요 형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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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23:29:58 *.166.205.132
너무 좋게 봐주는거 아녀~~^^
땡큐 경인~
괴테처럼 시와 진실을 섞어보고 싶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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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13:30:53 *.45.10.22
오빠의 사진집이 나올 그 날을 꿈꾸어 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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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23:31:14 *.166.205.132
그 날이 올까? 사진도 배워야 하는데 언제 배우나~
꿈만 꾸다 날 새는거 아닌가 싶다~ ;;
그래도 사샤의 지지에 조급한 마음 떨치고 버텨봐야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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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6.20 15:07:19 *.35.19.58
경수야, 그런데 이 글에 대한 해제 좀 적어줘라.
미래의 네 모습에 대해서 쓴거냐?
네가 배기태인것이야?
다니엘이 소녀가수였어?
난 너무 머리로 이해하려 해서 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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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23:27:21 *.166.205.132
괴테를 읽으면서 나도 픽션을 써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어요.
'소나기'같은 분위기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이런 저런 들은 얘기를 섞어놓은 듯, 아직 많이 부족하네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좀 꽈서 제목을 지었구요.
젊은 사진가가 열정을 찾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분위기만 전하고자 했어요.
사진가의 열정을 깨어나게 한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술가란 어떤 사람일까요?

다니엘은 5년전 인도 오로빌에서 만난 실제 인물인데,
지난주에 엄마와 저희 집에 왔었어요. 
실제로 엄마는 한국인이고 아빠는 이스라엘사람이죠.
지금 12살인데 기타를 들고 와서
저희집 거실에서 자작곡으로 공연을 했답니다.
다음날 운동장에서 뛰어놀았는데, 6살 민호가 다니엘을 너무 좋아해서
양귀비 꽃을 귀에 꽂아주더라구요.
그 때 저 사진을 찍었고, 픽션 속 여가수의 모델이 되었죠.

배기태는 저의 일부를 담은 인물이기도 하고,
열정을 잊었지만 마음속에 소망을 간직한 젊은이를 대표하기도 하죠.

어쨋든 픽션은 하고 싶은 얘기를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걸 느꼈네요.
전달은 하더라도 그게 읽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기는 더 어렵구요.
그래도 쓰면서 상상하는 재미가 있더군요.
상현선배나 미옥선배가 소설 쓰는 이유도 좀 알겠구요~
근데 픽션을 길게 소설로 끌고 나간다는게 대단한 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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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6.21 09:17:28 *.219.84.74
글을 읽고 있으니
지금의 양갱인 '양정수'가 한때 몽롱하게 생각했던 모습의 하나인 '배기태'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배기태를 지금의 삶에 녹이고 있구나 라는 생각도 더불어.

내 속에도 양갱의 배기태처럼,
꿈꿨으나 잊혀진 모습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해본다.
무림의 고수와 같은..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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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
2011.06.21 23:48:00 *.166.205.131
매일 쓰다보면,
매일 떠올려보면
언젠가는 잊혀진 그 모습이
떠오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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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동
2011.06.21 09:44:19 *.128.203.197
이 글에 담긴 메시지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진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음은 분명해 보이네요.

그 열정 꾸준히 키워가길 바래 봅니다. 너무 조급하지도 너무 느슨하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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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
2011.06.23 21:36:40 *.111.51.110
그러게요.
글쓰기처럼 사진찍기도 즐거운 표현도구가 되어주는것 같아요.
사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언제 대화의 안주로 삼아 씹어 보아요~ㅎㅎ^^
즐거운 댖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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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동
2011.06.23 10:48:04 *.128.203.197
그냥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괜찮아 보이는 풍광 찍을 때면 찍는 행위자체가 즐겁지요.
그리고 사진의 본질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즐거움도 있고 보는 사람들이 좋아해줄 때도 즐겁고..
가끔은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즐거움도 있고.. 등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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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
2011.06.21 23:50:00 *.166.205.131
평범한 직장인이
사진으로 뭔가 해보려는
열정이 있음이 분명한데~ 그건 음, 멋지게 살고 싶은거에요^^
다들 그렇지 않나요!
선배님은 어떻게 사진을 즐기시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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