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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6일 15시 48분 등록


1. 저자 소개
유홍준(兪弘濬)
1949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예술철학 전공)를 받음.
『공간』과 『계간 미술』 기자를 거쳐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으로 등단하여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와 제1회 광주 비엔날레 커미셔너(1995) 등을 역임.
1985년부터 매년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개설하였으며,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를 맡기도 함. 영남대학교 교수•박물관장을 거쳐 2002년부터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및 문화예술대학원장, 박수근미술관 무보수 명예관장으로 재직.
2004년 9월부터 현재까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 중임. 문화재청장으로서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음. 예컨대 우리 문화에 대한 강연을 수시로 하고 있으며, 신문이나 인터넷을 통해 각종 강좌를 꾸준히 게재하고 있음.

출판사상 유례가 드물게 인문서적으로 100만권을 넘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3』로 우리에게 친숙한 학자임. 이 책 덕분에 `박경리의 토지가 한국의 정신적 GNP를 올려놓았다면, 유홍준은 우리나라의 면적을 열 배는 넓혀놓았다'는 평을 얻기도 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는데, 출간 후 4년 만인 1997년에 중학교(3학년) 국어 교과서에 1권 서두인 「월출산과 남도」가 실리게 된 것임. 생존 작가의 작품이, 그것도 이처럼 빨리 교과서에 실린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라 할 수 있음.

작가 한마디
미술사를 전공으로 삼은 이후 내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떻게 하면 미술에 대한 안목을 갖출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막연한 물음에 대하여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의 묘책은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는 것이었다. 예술을 비롯한 문화미란 아무런 노력 없이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을 아는 비결은 따로 없을까? 이에 대하여 나는 조선시대 한 문인의 글 속에서 훌륭한 모범답안을 구해둔 것이 있다. “사랑하면 할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저서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열화당 1986),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창작과비평사 1996), 『정직한 관객』(학고재 1996) 『조선시대 화론 연구』(1998) 『화인열전』(전2권. 역사비평사 2001), 『완당평전』(전3권. 학고재 2002), 편역서로 『미학에세이』(1988 청년사), 번역서로 『회화의 역사』(잰슨, 1984 열화당) 등이 있으며, 「조선후기 문인들의 서화비평」 「단원 김홍도 연구노트」 등 한국회화사 관계 논문을 줄곧 발표해 옴.
역사기행문집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작과비평사)를 계속 집필하여 제1권 『남도답사 일번지』(1993), 제2권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1994), 제3권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1997),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상•하(1998)를 간행함.
『완당평전』으로 제18회 만해문학상(2003) 수상.


2. 화인열전을 읽고

가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다녀 오면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미술책이 생각나곤 한다. 그 미술책을 다시 한번 펴보면 내가 아는 작품이 얼마나 되는지, 또 어떤 느낌을 받을지 생각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마찬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미술책과 국사책을 다 펼쳐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학창 시절에 그림을 조금 더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면, 그 시대를 조금 더 차근차근 음미해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림이든 인물에 대한 이야기든 시험 위주로 과목을 공부하다 보니 어른이 된 내게 남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런 나에게 그나마 위안을 준 책이었다.

예술가로서의 삶도 다른 분야 사람들과의 삶과 그다지 다른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가장 큰 공통점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 이상의 어떤 것을 이루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해 빠진 사람은 ‘재능은 있으나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재능을 발휘하는데 미적거리는 사람보다는 인내와 끈기가 있는 사람이 무언가를 이룰 확률이 더 크다는 얘기이다. 책에서 천재 화인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런 천재는 그다지 많지 않다.
책에서는 단원과 같은 대가들은 40대까지는 수련과 연찬을 성실히 수행하다가, 50대에 와서라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냈다고 했다. 겸재 또한 다르지 않아 60대를 다 보내는 노년에 이르기까지도 중년의 치밀함과 성실성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만년의 원숙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고 얘기한다. 과연 이들은 일생 동안 성실함과 치밀함으로 무장했기에 대가의 경지에 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은 76세의 나이에도 최선을 다해 창작을 임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피터 드러커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드러커는 열여덟살 때 당시 최고의 작곡가로 꼽히는 베르디가 여든 살의 나이로 오페라 작곡에 힘쓰는 모습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드러커는 나이를 먹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정진하리라고 마음먹게 된다.
성실함과 치밀함, 인내와 끈기……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태도이지만 나는 이를 지키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게 된다.

저자가 이 책을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와 같은 화가들의 일상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거의 없다는 연유에서 썼다고 한다. 더구나 저자는 전기를 쓸 만한 화가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이 없었다는 생각에 미술평론가로서, 학자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에 인문학과 예술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가의 전기를 쓰게 된 것이다.
저자는 석사 학위 주제인 능호관 이인상을 포함하여 모두 아홉 명의 전기를 계간지 ‘역사비평’에 기고하였고, 이를 토대로 여덟 명의 화가를 다룬 ‘화인열전’과 추사 김정희 선생에 대한 ‘완당평전’을 펴내게 된 것이다. 책의 제목을 화가가 아닌 화인으로 한 것은 시인(詩人), 문인(文人)과 같이 사람 인(人)자를 붙이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에서라 한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눈이 즐거운 책이다. 작가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여러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조선시대에 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며, 또 그냥 흐뭇한 느낌이 든다. 화인 개개인의 성장 배경과 친우 관계 등 인생 역정, 그리고 역사적 사실 등이 그들의 대표작 300여점과 어우러진다.

대가들에게서 배우는 또 한 가지.
그것은 디테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얻을 수 있다.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에 겸재의 금강전도, 인왕제색도나 단원의 송호도와 같은 명작들이 나온 것이다. 저자는 위대한 장편소설은 어느 쪽을 펼쳐 읽어보아도 재미있고, 위대한 건축은 외형 못지않게 내부가 아름다우며, 위인의 삶은 선이 굵은 만큼 작은 일에도 따뜻한 마음씀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어떤 일을 거의 맞게 하는 것과 정확히 맞게 하는 것의 차이”라는 말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3. 내가 저자라면

화인열전은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가 8명의 예술적 성취를 그들의 인생 역정을 통해 살펴보고 있는 평전이다. 저자가 10여년간 거장들의 삶과 예술을 복원함으로써 전기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은 책으로 평가 받고 있다.
조선시대 8인 대가들의 가문과 삶, 예술세계와 그림 300여점,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이 잘 조화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인들에게 우리 화가들을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저자의 지식과 부지런함에 감사할 따름이며, 이 책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은 없다.
다만 책의 첫 장이나 마지막 장에 중국과 비교하여 조선시대 동양화의 발달 과정을 간단하게나마 포함했으면 어떠했을까 한다. 당시 유행했던 학문과 그림, 동양화의 발전 과정 등이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

저자가 밝혔듯이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표암 강세황 등과 같은 분들의 화인열전이 계속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4. 내 안에 들어온 글들

1권
연담 김명국 - 아무도 구속할 수 없던 어느 신필의 이야기
공재 윤두서 - 자화상 속에 어린 고뇌의 내력
관아재 조영석 - 선비정신과 사실정신의 만남
겸재 정선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2권
현재 심사정 - 고독의 나날 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능호관 이인상 -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
호생관 최북 - 붓으로 먹고살다 간 칠칠이의 이야기
단원 김홍도 -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

연담 김명국 - 아무도 구속할 수 없던 어느 신필의 이야기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다. 그 화법은 앞시대 사람의 자취를 밟으며 따른 것이 아니라 미친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주어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으니, 포치(布置)와 화법 어느 것 하나 천기(天機)가 아닌 것이 없었다.” (16)

문장가에는 삼품(三品)이 있는데 신품(神品), 법품(法品), 묘품(妙品)이 그것이다. 이것을 화가에 비유해서 말한다면 연담은 신품에 가깝고, 허주는 법품에 가깝고 공재는 묘품에 가깝다. 이것을 학문에 비유하자면 연담은 태어나면서 아는 자(生而知之), 공재는 배워서 아는 자(學而知之), 허주는 노력해서 아는 자(困而知之)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면 매한가지이다. (38)

그는 시류 속에 편안히 안주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낭만적 반항의 표정일지언정 자기 자신을 지켰다. 그 점에 연담의 큰 매력과 미덕이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연담은 훗날 17세기 조선시대 화단에서 가장 개성적인 작가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것이 김명국의 영광이다. 세상이 바뀌고 반세기도 안 되어 숱한 찬사 속에 그는 다시 태어난 셈이다. (51)


공재 윤두서 - 자화상 속에 어린 고뇌의 내력
그는 시대의 흐름을 명확히 인식하면서 대담한 자기 결단과 자기 갱신으로 종래의 화가들은 생각지도 못한 ‘속화(俗畵)’까지 그리면서 18세기 사실주의 회화의 길을 열었다. (57)

세월이 지난 다음에는 그 때의 현실적 과제가 무엇이었고, 그 상황에 대한 올바른 처신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실수 없이 집어낼 수 있겠지만, 바로 그 때 그 순간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매우 적은 법이다. 이런 이를 일컬어 선구라 부르는 것이며 그렇기에 선구자에게는 남다른 외로움이 있고, 망설임 또는 기다림의 고뇌가 따르곤 하는 것이다. (57)

본래 자화상이라는 것은 작가의 자의식 없이 그려지지 않는 장르이다. (58)

회화에서 그림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반드시 그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이제까지 조선시대 회화에 나오는 인물의 주인공은 선비와 신선 아니면 고작해야 미인 정도였다. 공재가 그린 낮잠 자는 선비, 담소하는 선비, 거문고를 타는 선비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서민의 모습이란 동자와 마부, 뱃사공 또는 일하는 농부와 어부 등이 배경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물 캐는 아낙네와 짚신 삼는 농부가 선비의 자리, 신선의 자리를 밀어내 당당히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것은 회화의 혁명이다. (95~96)

그래서 나는 공재의 속화는 현실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현실을 집어넣은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점은 그의 후배들과 매우 다른 것이다. 관아재, 단원, 혜원은 분명 현실의 한 장면을 잡아낸 것이지만, 공재는 기존의 그림 속에 현실을 삽입시켜 한편으로는 전통 회화의 틀을 지키면서 동시에 현실성을 구현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98)

“여기서 든 몇몇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드문 발군의 재능과 오랜 세월 노력을 쌓아왔으므로 정교하고 치밀한 경지에 깊이 이르렀어야 마땅함에도 끝내 정법(正法)을 얻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불행하게도 정진해나아가야 할 때에 세속적 익힘에 물들어 고질병이 되었기 때문이다. 간혹 한둘 세속적 익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도 있었으나 이단(異端)으로 흐른데다가 또 이를 추종하여 혹하고 있으니, 어느 누가 우뚝 솟아나와 올바름을 회복시킬 수 있겠는가?” (110)


관아재 조영석 - 선비정신과 사실정신의 만남
관아재 조영석은 속화와 인물화에 뛰어났는데, 항상 겸재에게 말하기를 “만약 만리강산을 그리게 하여 일필휘지로 필력이 웅혼하고 기세가 흐르는 듯하는 데서는 제가 그대에게 미치지 못하겠지만, 터럭 하나 머리카락 하나까지 핍진하고 정교하게 그리는 데서는 그대가 반드시 조금은 저에게 양보하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119)

그림은 시로서 다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담아내는 독자적 기능이 있으며, 또 산수화는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거기에 화가(인간)의 마음이 더해지기 때문에 그림이 더 위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관아재는 그림 속에서 인문정신을 찾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40)

… 공자님 말씀에 빈둥빈둥 노는 것보다는 장기나 바둑을 두는 것이 더 현명하다 … (154)

관아재는 자신에 매우 철저하고 정확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평생토록 지키고자 했던 한 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지수재 유척기가 그의 묘지명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그의 ‘4욕론(四慾論)’이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욕망이 있으니 생욕(生慾), 식욕(食慾), 관욕(官慾), 재욕(財慾)이다. 이 4욕은 사람마다 모두 마땅히 힘써 경계해야 할 바이며 특히나 관직에 있는 사람은 더욱 빠지기 쉬운 것이다. ……
고로 나는 20년 가까이 관직 생활을 하면서 항시 스스로 조심하고 조심하여 감히 이 네 가지를 잃지 않으려고 했고, 혹은 지금까지고 잃을까 걱정해왔다. 그리고 늙으면서 의지가 점점 약해지고 감정이 여려지니 늙도록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 글로써 스스로를 살핀다.” (161~162)

이제까지 우리나라 산수화에 나타난 인물은 모두 중국 화본에서 제시한 인물묘사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그저 막연히 선비.신선.나그네를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설중방우도>에는 조선의 선비가 당당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겸재 정선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나라의 자연이 그림의 소재로 승격되고, 거기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의 선비가 등장하게 되는 것과 똑 같은 한국회화사상의 일대 사건이며 쾌거이다. (168)

스님은 이를 잡아도 스님인지라 죽이는 살생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털어낸다는 표현에서는 웃음조차 나온다<이 잡는 노승>. (170)


겸재 정선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그런데 겸재의 금강산 그림을 보면 대부분 현장 사생이면서도 주관적 재해석이 아주 강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그린 금강산 그림들은 <금강전도>에서 역력히 볼 수 있듯이, 그 시점이 대개 부감법(bird’s-eye-view)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겸재가 보여준 진경산수의 사실정신이란 우리가 현대미술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주의, 리얼리즘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이 점을 면밀히 분석하자면, 금강산이 어떻게 생긴 것인데 그는 그렇게 그려냈느냐는 문제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금강산을 가보지 못한 상태에서는 무어라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 힘든 것이다. (185)

독창성이란 남이 하지 않은 그 무엇을 혼자 제시했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이룩하지 못한 또는 생각하지 못한 예술 세계를 창출해냈다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기법적으로 여러 선례를 원용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대가에게나 있는 일이다. (192)

“공은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었고 나 역시 그림을 좋아하는 병이 있어 대략 그 삼매경(三昧境)을 이해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매달리려 하지 않았고 공은 날마다 정진하고 익혀서 (남북조시대 사혁이 주장한) 화6법(畵六法)과 (오대.북송시대 형호가 주장한) 화6요(畵六要)를 정밀하게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다. 대개 우리나라의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는 이것을 아는 이가 없었는데, 공에 이르러서 옛 그림을 널리 보고 공부 또한 독실히 하여 앞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내놓게 되었다.” (204~205)

그림 속에 개미만한 크기의 인물을 그렇게 효과적으로 몸 동작까지 표현한다는 것은 보통 솜씨가 아닌 것이다. ……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적당한 몸 동작을, 그것도 여지없는 조선의 선비로 표현해냈다는 것은 겸재가 진경산수 양식을 확립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숙제를 풀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215)

벼랑끝 모퉁이를 돌아가는 길에는 까만 점선 세 가닥이 아주 작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막 고갯길을 돌아선 나귀의 뒷다리와 꼬랑지가 허리춤 뒤로만 보이는 모습이다. 산수화 속에 이런 유머를 구사한 이는 겸재 말고는 찾기 힘들다. (216)

그러나 겸재가 섣불리 자기 개성을 드러내지 않고 이처럼 고전을 차근차근 방직하는 중년의 겸손과 성실성을 거쳤기 때문에 훗날 자신의 개성에 힘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옛 사람의 업적을 생각할 때 보통 그 결과만을 갖고 평가하게 된다. 그것이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역사적 평가란 대단히 준엄한 것이다. 이 역사적 평가에만 의존하다 보면 우리는 한 인간이, 한 화가가 어떤 노력 속에서 그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낳게 되었는가 라는 그 과정과 예술적 고뇌와 인간적 성실성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 점에서 역사적 평가란 너무 잔인하고 때론 경박한 면도 없지 않다.
……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은, 겸재는 그 위대한 민족적 화풍인 진경산수를 창출하기 위해 ‘기해년화첩’ 같은 남종문인화풍에도 열중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진경산수는 고루한 국수주의적 색채나 지방적 낙후성에 빠지지 않고 국제적 시각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초가 되어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국제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고전을 통과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 같은 것이다. 나이 40대 때 ‘기해년화첩’ 정도밖에 그리지 못했던 겸재가 20년 뒤인 59세 때는 <금강전도>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낳을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런 역량의 축적이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겸재는 대기만성형의 대가였다. (230)

나는 겸재의 <금강전도>를 볼 때마다 위인의 크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금강전도>의 세부 묘사는 대단히 치밀하다. 흔히 선이 굵고 스케일이 큰 화가는 디테일을 가볍게 처리하는 것이 상례인줄 알고 있지만, 대가의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257)

위대한 장편소설은 어느 쪽을 펼쳐 읽어보아도 재미있고, 위대한 건축은 외형 못지않게 내부가 아름다우며, 위인의 삶은 선이 굵은 만큼 작은 일에도 따뜻한 마음씀이 있다는 것을 이 <금강전도>에서도 그대로 느끼게 된다. 겸재는 그림에 관한 한 그런 위인이었다. (259)

“이는 겸재 팔십 노인의 그림으로 박대원의 소장품이다. 박대원은 그림을 알지 못하나 이 그림을 아주 사랑하여 보배로 여기며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그 사랑하는 바가 그림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
박대원은 홀로 필법의 기교를 뛰어넘어 신회(神會)가 통하듯 겸재의 마음을 얻고 팔뚝 아래에 두며 마음으로 그것을 사랑하니, 박대원은 이른바 그림을 아는 자가 아니지만 그림 보는 법은 아는 자가 아니겠는가. ……” (260)

확실히 그림이란 도해(圖解)의 성격이 있어서 그 어려운 내용을 한 폭의 화면으로 이렇게 선명히 나타내는 힘이 있다. 주자의 글 내용이 절묘한 만큼 그림의 화면 구성과 필법 또한 절묘하다. (장주묘암도, 288)

디테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치밀한 화면 경영이 있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하나의 작품이 명작으로 칭송됨에는 그만한 노력과 완결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그림이 76세 노화가의 필치라는 사실이니 만년에도 최선을 다했던 겸재의 창작 태도에 우리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인왕제색도, 313)

인생과 예술에는 준엄함이 있어 만년의 원숙한 경지란 반드시 중년의 치밀함과 성실성을 경험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중년 시절에 만년의 작업을 시도했다면 그것은 불성실이고 일시 성공한다고 해도 조로(早老)하고 마는 법이다. 겸재로 말할 것 같으면 60대를 다 보내는 노년에 이르기까지도 그런 중년의 치밀함과 성실성을 버리지 않았다. 때문에 겸재의 만년은 더욱 원숙했고, 남들은 노년의 경지에 머물고 만 것을 만년에 이르러 한번 더 높이 끌어올렸던 것이다. (316)


현재 심사정 - 고독의 나날 속에도 붓을 놓지 않고
오늘날 우리는 그림을 평가할 때 그 예술적 입장과 관계없이 거론하는 첫번째 덕목으로 작가의 개성, 독창성을 든다. 또 진보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예술관에 입각한다면 현실적 리얼리티가 문제로 대두되는데, 이 두 측면에서 심사정의 예술은 결정타를 입는다. (18)

심사정은 다행히도 그림 솜씨가 있어 그것을 통해 자기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마련했다. …… 나아가서 현재는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쓰라림과 고독의 감정을 붓끝에 실어 동시대 누구보다도 화가의 감정이 깊이 개입된 명상적이며 때로는 애수의 시정이 들어 있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삶이 불우했던 만큼 그의 예술은 정서의 심화를 일으킬 수 있는 회화적 환경으로 전환해 갔던 것이다. (25)

현대미술에서 대부분의 화가들이 국제적 유행 양식을 추종하는 것에 급급하여 자기 예술을 만들어내지 못했음에 비해, 수화 김환기와 고암 이응로가 보여준 예술 세계는 우리 현대미술사의 가장 빛나는 부분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듯이, 심사정은 중국 그림을 모방하면서 그것을 단순히 수평적으로 이동하거나 물리학적으로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반응에 의한 재창출이라고 할 만큼 자기화하였다는 데 중요한 미덕이 있는 것이다. (53~54)

심사정은 “그림에서 정신을 숭상[畵尙精神]”한 화가였다. (54)

모든 대비는 대비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혼연히 소통되는, 그리하여 서로의 약점을 보강할 수 있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현실적 사고에 얽매이다 보면 보편성을 잃기 십상이고, 존재론에 집착하다 보면 인식론의 지평을 망각하게 마련이다. 겸재의 진경산수가 박진감을 표현한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실경의 개별적 성격을 조선 산수의 보편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할 때 반드시 보완했어야 했던 그 무엇이 있었다. 현재가 보여준 보편성.관념성이라는 것도 당대적 정서와 조선적 서정에 뿌리 두지 않으면 공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55)


능호관 이인상 - 오직 아는 자만은 알리라
”군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곧아서 남과 마음이 잘 맞지 않았으며, 아첨해서 세상에 출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과 말할 때는 씩씩하고 굳세며 엄하고 곧아서 법도를 바로 지키니 사람들마다 경복(敬服)했다.” (73)

“고래로 산수를 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으니, 하나는 그 즐거움을 아는 것이요 하나는 그 품격(品格)을 아는 것이다.” (85)

노자의 말씀 중에 “큰 재주는 졸해 보인다”라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구절을 연상케 하는 이 대목은 곧 이인상 예술의 특징인 동시에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 내지는 진실에 그 근거를 둔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능호관은 그런 담담한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산수를 그리면서도 기암괴봉의 장관을 그리거나 농담과 필묵이 다양하게 구사되는 산수화보다는 평범한 강변 풍경을 담백하게 그리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가 즐겨 그린 소재는 대개 문인적.아회적 분위기가 서린 그림이었다. (89)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런 높은 격조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였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능호관에게 있어서 삶과 예술이 결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일체를 이루었다는 점일 것이다. 모든 문인화가들은 기본적으로 시.서.화가 분리되지 않는 경지를 지향하지만 능호관처럼 그것이 일치된 예는 아주 드물다.
능호관 그림에서 시.서.화는 이처럼 외형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시가 곧 그림이고 그림이 곧 글씨인 경지였다. (123)

서양미학, 서양미술사에서는 하나의 작품 세계에서 그 작가의 인품을 말하는 일이 절대로 없다. 화가의 성격이 작품에 나타난다는 것은 개성을 말할 때 곧잘 거론하면서 인품을 작품과 연결시키는 일은 없다. 이것은 동양미술사와 동양미학의 독특한 미적가치론이다. 서양미학의 입장에서는 비과학적인 설명이라고 외면할지 모르지만 동양미학에서는 모두가 심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지고(至高)의 미적 덕목인 것이다.
그림이 인격의 표현일 수 있다는 사실은 문인화라는 독특한 영역에서 생겨난 것이다. 서양미술사에서 말하는 아머추어리즘과는 달리 직업화가가 아닌 교양있는 문인들이 프로다운 기량으로 그림을 그릴 때는 직업화가와는 전혀 다른 미적 가치를 나타낼 수 있으니, 그것이 곧 문기(文氣)이고, 문기는 곧 인격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격조라고 했다. (124)

“…… 이인상의 묘처(妙處)는 기름진[濃]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담담한[淡] 데 있으며, 익은[熟] 맛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生] 맛에 있다.
오직 아는 자만은 이를 알리라.” (126)


호생관 최북 - 붓으로 먹고살다 간 칠칠이의 이야기
”그렇다! 나는 붓으로 그림이나 그려 먹고 사는 칠칠이다. 그렇다고 나를 어쩔 것이냐!” (130)

“그림이 잘되어 득의작인데 주는 값이 적으면 문득 화를 내며 욕하고는 그 그림을 찢어 없앴다. 반대로 그림이 잘못되었는데도 그림값을 많이 주면 껄걸 웃으면서 주먹으로 그 사람을 밀며 그림값을 도로 주어 문 밖으로 내보내고는 다시 손가락질하며 ‘저 녀석은 그림값도 모르네’라고 하였다.” (139)

최북의 유작을 보면 이처럼 뛰어난 작품은 아주 드물고 대부분 최북의 성품과 달리 얌전하고 기백이 적고 게다가 지루한 느낌까지 드는 평범한 작품들이 많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최북을 둘러싼 또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156)

고귀한 것,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흔한 것을 소재로 하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더 고귀한 기품으로 돌아오니, 현실적인 것의 회화적 승화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함이리라. (소채도, 161)

최북은 화가로서 성공과 실패 두 면을 갖춘 기이한 화가인 셈이다. 역사는 참으로 냉혹하게도 그것을 반드시 가려내고야 만다. …… 역사는 참으로 현명하게도 한 인간의 위대한 면을 놓치지 않는다. (161~163)

한 인간의 굽힐 줄 모르는 기개는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창조적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풍설야귀인>과 <공산무인도>는 그런 기개의 소산이다. 그러나 최북의 기개라는 것이 세상도, 대중도, 역사적 평가도 의식하는 일없이 자포자기의 폭력에 빠질 때면 그것은 대책 없는 오만이었고 그는 한낱 기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인 것이었다. (163)

호생관은 부정적 사유와 반항적 기질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였다. 그것은 낭만적 반항이기도 한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흔히 예리한 감성은 이성의 힘을 능가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데 호생관에겐 그런 호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예리한 감성이란 이성적 사유와 도덕적 행위에 기반을 두지 않을 때는 사실상 객기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 낭만적 반항의 허점이다. 호생관에게는 그런 허점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 면에서 최북은 인생을 너무 쉽게 살았고, 예술 세계의 준엄한 규율은 더 더욱 몰랐다. (164)


단원 김홍도 -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불세출의 화가
단원 김홍도의 예술적 성취 속에는 그 자신의 예술의지가 작용했든 시대적 요청에 의해 촉발된 것이든, 어느 것이나 인문정신의 표상이었다. 정조 시대 문예 부흥을 상징하는 인물로 사상에서 다산 정약용이 있고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이 있다면, 예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있는 것이다. (169)

특히 이 그림에서 놀라운 것은 호랑이 몸에 있는 털의 표현이다. 얼핏 보기에 호랑이 몸의 줄무늬를 검정과 갈색으로 번갈아 칠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터럭 하나하나를 일일이 헤아리듯 그렸다. 그 붓질이 몇 만 번일지 몇 십만 번일지 모르는 끔찍스런 정성과 섬세함이 베어 있다. 바로 이런 치밀함 때문에 이 호랑이는 더욱 사실감과 생동감을 얻게 된 것이니, 이 그림을 위해 단원이 지불한 공력과 참을성은 가히 영웅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송호도, 176)

임금이 “그림을 보는 순간 내가 껄껄 웃을 수 있는 그림을 그려라”라는 문제가 출제되기도 했던 것이다. (197)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단원은 이 금강산 사생을 계기로 하여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혼신의 힘으로 탐구하고 시험하는 치열한 장인적 수련과 연찬의 과정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쌓은 노력을 바탕으로 50대에는 대담하게 자기 변신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니,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여타의 화가들과는 그 공력이 다른 것이다. (243)

40대까지는 수련과 연찬을 성실히 수행하다가, 50대에 와서라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내는 대가들의 이런 모습은 이 시대 우리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272)

“…… 단원은 원래 성격이 뇌락불기(磊落不羈)하여 속된 세사를 귀찮게 생각하는 터에 더욱 김한태와 좋은 벗을 갖게 된 것은 그의 행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근래까지도 단원 작품 중에서도 특히 우수한 것은 김한태 구장품이었다는 것이 한묵계의 정평이다.” (278)

“사람 사는 것이 어찌 부귀함만을 쫓을 것이며, 높은 벼슬인들 어찌 마음이 즐겁고 정신이 기쁜 것이리요. 한때 뜻에 맞음을 얻어 마음과 눈이 상쾌해지며 작은 족자 하나에 천리의 생각을 둘 수 있는 것이니, 만종(萬鐘)의 녹야가 가을 털끝보다 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것이 반드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즐기는 바로써 보건대, 비록 삼공(三公)의 높은 벼슬자리를 주어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 오히려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288)

나는 여기서 단원의 남다른 천재성을 생각해본다. 흔히 예술가들의 천재성이란 남들은 도저히 쳐다볼 수 없는 높은 경지를 저 혼자만이 도달하는 기량을 의미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단원은 그런 유의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남들과 나누어 쓸 수 있는 폭 넓은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317)

대중과 그처럼 교감할 수 있는 자세였기에 그의 예술은 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것이었고, 또 조선적인 가장 조선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 단원이라는 화인의 위대한 예술가상이다.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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