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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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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18일 18시 34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켐벨.
1904년 미국 뉴욕에서 출생.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리는 비교 신화 종교학자.
전 세계의 신화와 전설들이 접촉이 없었음에도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콜롬비아 대학과 파리대학, 뮌헨대학 등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연구함. 모든 문화권의 신화를 두루 꿰는 신화의 원형을 찾는데 평생을 바침.
“베다의 한 구절인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486쪽)에 이성적으로 도달한 분.


소감.
“신화는 힘이 있다. 그것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다. 하지만 신화를 읽고 그 코드를 읽고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그 숨겨진 힘을 찾아낸다.” 이것이 조셉 켐벨이 신화를 잃어버린 현대문명사회에 던지는 화두이다.
신화나 전설들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있는 사실 그대로를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을 때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눈이 볼 수 있게 되기 전까지, 귀가 들을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진리를 숨겨 놓는 한 방편으로 동원한 지혜이다.
사람들은 신화나 전설을 왜 비과학적인 이야기나 미신쯤으로 여기는 것일까?
영웅들의 삶과 그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을 이해하게 되었으나 아직 도달하지는 못한 현자들에 의해 영웅들의 삶은 온갖 이야기들로 만들어진다. 이야기들은 시간과 함께 구전되며 온갖 색깔들로 채색되어 간다. 색이 한꺼풀씩 입혀질 때마다 알맹이는 점점 더 깊숙이 숨겨지고 구라꾼들의 상상력은 이리 저리 이야기를 비비꼬아 놓는다. 시간이 더욱 더 흐름에 따라 알맹이는 잊혀지고 구라들만 남아 구라들에 온갖 색칠하기가 진행된다. 이렇게 해서 신화는 진리의 사실로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
왜 전혀 접촉이 없는 곳의 신화가 놀랍도록 유사한가?
인간에게 우주의 생명의 기원은 유사 이전 태고시대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우리가 모든 것의 처음은 아니다.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시대들의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 책에서 조셉 켐벨은 아틀란티스 대륙시대를 한 문장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도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조셉 켐벨이 신화를 통해 말하고 있는 진리의 희미한 모습에 비하면 우주의 기원 등은 아주 사소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대부분 잊혀졌다고 해서 또한 사람들에게서 믿음의 문제로 전락해 버렸다고 해서 ‘유일한 진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또한 신화가 아닌 직접적인 유형으로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신화는 단지 ‘유일 절대 불변의 궁극의 진리’에 대한 구라이며 매트릭스일 뿐이다.
모든 신화와 전설의 실체는 구라나 매트릭스가 아니다. 비과학과 미신이 아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 인간은 구라와 매트릭스인 신화나 전설에 의지해야 할 만큼 많은 것들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15년 넘게 안개 속을 헤메고 다니며 많은 시도와 접촉, 경험을 쌓았지만 도달이라는 거대한 산의 입구조차 찾지 못한 상태이다.
'Light on the Path'의 시작 내용으로 마친다.

“여기에 있는 규칙들은 모든 제자들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제자들은 이 규칙들을 마음에 담아서 잘 유의해야 한다.

눈이 볼 수 있게 되기 전까지 눈은 눈물을 흘릴 수 없어야 한다. 귀가 들을 수 있게 되기 전까지 귀는 귀의 민감함을 잃어버려야 한다.

목소리가 대사(大師)들 앞에서 말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그 목소리는 상처를 입힐 수 있
는 힘을 잃어버려야 한다.

혼이 대사들 앞에 설 수 있게 되기 전까지 혼의 다리는 ‘마음의 피’ 속에서 씻겨져야 한다.”


내가 저자라면.
'Light on the Path'는 “동양의 지혜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과 그 지혜의 감화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혼자 사용할 수 있도록 쓰여진 소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평생 비교 신화학을 연구한 조셉 켐벨이 도달한 곳은 위의 부제가 잘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 책이 다분히 서양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으며 동양에 비해 진리의 전통(傳統)이 찾기 힘들 정도로 희미해진 서양인의 진리탐구의 과정의 도달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양인들에게 이 책은 보물과 같은 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조셉 켐벨은 결국 존재론적인 서구과학문명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구라와 매트릭스로 둘러싸인 신화의 ‘정치한 핵심’을 설명하는 데는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다. 그것이 너무 종교적이거나 비과학적으로 보일까봐 염려되어서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이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사실들이 비과학적이거나 믿음의 문제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을 볼 수 있었던 많은 위대한 분들에 의해서 가르쳐진 정치한 핵심만큼 과학적인 설명은 없으며 비종교적인 진리는 없다.
(마음이 너무 앞서갔다. 내 마음대로 가정하고 내 마음대로 결론을 내렸으니. 글쓰기의 좋은 사례가 될 것 같다. 이건 글쓰기의 아주 전형적인 치명적 오점의 서술방식이다. 남을 흠집내거나 베고 싶을 때 아주 유용한 서술방식이다. 조선일보가 애용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창피하지만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 지우지 않는다.)
조셉 켐벨이 신화를 통해 이왕 인간의 눈꺼풀을 한 풀 벗겨주거나 그 자신의 말처럼 ‘신화의 숨겨진 힘’을 알려주고 싶었다면 자신이 발견한 그 ‘정치한 핵심인 유일절대불변의 진리’를 인간에게 귀환시켜야 하지 않았을까.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속에서.

프롤로그 - 원질신화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23)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37)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38)
시공의 제약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하찮은 논리와 정서적 집착으로 찾아드는 죽음, 우리들이 흙으로 돌아가려 할 때 비로소 온몸을 흔들면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보편적 생명에 대한 이러한 재인식, 이 생명을 향한 우리의 가파른 중심이동, 그리고 운명에의 사랑, 즉 필멸의 운명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이 비극적 예술의 체험을 구성한다. 그 기쁨, 구원의 황홀은 그 안에 있다.(41)
비극이란 형체의 파편이며 형체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다. 희극은 정복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거칠고 방만하고 꺼질 줄 모르는 환희다. 따라서 이 양자를 서로 보듬고 서로를 엮는 단일한 신화적 주제와 경험을 나누는 용어다.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속에 와 계시는 실체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43)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44)
영웅의 모험은 세계로부터의 분리,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황홀한 귀향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동양 전체는 고타마 부처가 깨친 은총(참법의 놀라운 가르침)의 축복을 받았듯이 서양은 모세의 십계명의 축복을 받아왔다.(50)

제 1부 영웅의 모험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82)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112)
태양문을 통하여 번제의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영웅은 자아에서 해방되어 세계의 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자아는 끈끈이 터럭에다 붙여두고 영웅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120)
갖가지 시련을 다 치른 자를 집안으로 용납하는 아버지 입장이 얼마나 어려우며 얼마나 주의를 요하는가는 그리스의 유명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에톤의 불행한 행적이 잘 그려내 보이고 있다.(173)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206)
신은 각기 다른 신도 시대, 국가에 맞추느라고 서로 다른 종교를 만들었다. 그 교리에는 여러 가지의 길이 있다. 그러나 길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심전력으로 어느 길이든 따라가면 누구든 신에 이를 수 있다. 얼음과자를 가로로 먹든 모로 먹든 무슨 상관인가! 어떻게 먹든 달콤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208)
종교는 욕망, 에로스와 적의, 즉 죽음을 바로 잡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이렇게 되면 새로운 미망의 상태가 만들어질 뿐이다) 저 유명한 불교의 팔정도의 가르침에 따라 충동을 뿌리째 꺼버리는 방법을 통해서 그 목적을 달성한다.(215)
근원을 투시함으로써 혹은 남성이나 여성, 인간이나 동물로 화신한 자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영웅의 임무가 수행되었다고 하더라도 모험 당사자인 영웅은 아직 생을 역전시키는 전리품을 가지고 귀환하는 모험을 치러야 한다. 원질신화의 규준인 완전한 순환체계는 영웅에게 지혜의 시문, 황금양털, 혹은 잠자는 미녀를 인간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또 한 번의 수고를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이 은혜가 사회, 국가, 그 천체, 아니면 일만 세계를 재생시키는데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253)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저 역시 당신의 희롱에 말리어 이 세상의 제물이 되고 허물의 미로를 방황하고 자아의식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렸습니다. 이제 원하옵건대 당신의 실재를 피난처로 삼아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소서.(256)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대바타(수련자의 수준에 알맞은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는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263)
영웅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280)
정상 상태로 깨어 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281)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 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왜 그런 세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282)
상징이란 의미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의미를 실어 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를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305)
항상 나를 위해 일하고 오직 나만의 목적으로 알고 진실로 나를 정성으로 믿으며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악의를 품지 않는 자, 그런 자가 내게 오느니라. 개인적인 야망을 무력화 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 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해적 존재의 궁극적인 상태를 표상하는 것이야말로 신화적 존재의 대종을 이룬다.(306)
무대의상을 입고 있던 벗고 있던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307)
애착을 떠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내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308)
제 2부 우주발생적 순환

남녀간의 사랑의 신비에 따르면 애정의 궁극적인 경험은 곧 이원성이라는 환상의 배후에 둘은 곧 하나라는 등식의 깨달음이 있다.(357)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431)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아니라 눈을 다시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가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432)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영웅은 대우주의, 완벽한 소우주적 거울이다. 이제 그에게서 은총이 만방으로 퍼져나간다. 그의 언어는 생명의 바람이다.(435)
아버지의 집에서는 두 단계의 이니시에이션이 구분된다. 첫 번째 단계에서 아들은 사자가 되어 귀환하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결국 하나라는 통찰과 함께 귀환한다.(437)
크리슈나는 애곡하는 그들을 보고 존재의 뿌리되는 지혜로 그들을 위로했다.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440)
놀랄 만한 권능을 가진 막강한 영웅은 바로 우리들 개개인이다. 거울에 비춰볼 수 있는 육체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리들에 내재하는 왕으로서다. 크리슈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458)

에필로그

베다의 말씀처럼,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엄표한다.’ 즉 하나의 노래가 인간이라는 합창대의 갖가지 음색으로 들리는 것이다. 인간이 되려면,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인간의 얼굴로 바뀌어 있는 신의 얼굴을 알아보아야 한다.(486)
인간은 아득한 존재와 더불어 끝나야 하고, 이 아득한 존재를 통해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해야 한다. 인간은 그러나 ‘내’가 아닌 ‘너’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족, 민족, 대륙, 사회적인 지위, 혹은 세계의 이상과 세속적 관습도 우리 모두의 내부에 살아있는 불멸의, 놀라운 신적인 존재의 척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IP *.44.15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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