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정경빈
  • 조회 수 2040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06년 6월 18일 22시 11분 등록
고병권,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소명출판, 2001, 320


1. '고병권'이라는 헤르메스

+
니체를 나에게 처음 알려주는 사람, 고병권. 나는 니체가 처음이었고 고병권도 처음이었다. (‘대담’에서 만난 것은 그저 이름뿐이었다) 책을 보는 내내 누가 니체이고 누가 고병권인지 가려내기 어려웠지만 사실 그건 의미 없는 일이다. 나는 그저 고병권이 전해준 니체를 만난 것이다. 니체는 정말 후세 사람들을 통해 무한히 자기 증식을 하고 있구나.

++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본인은 달갑지 않을지 모르나, 고병권을 캐보려 하자 고미숙과 이진경이 딸려 나왔다.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나온 것이다. 고미숙에 대한 얘기는 한선생님을 통해 수시로 들어왔지만 이제야 비로소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함께하는 연구 공간과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책들에 대한 호기심이 무한연쇄를 일으키려 했지만 일단 끊었다. 홈페이지에서 찔끔찔끔 알아 볼 일이 아닌 것 같다. 언제 한번 종로에 있는 사무실에 구경을 가봐야겠다. 일단 고미숙과 이진경도 읽어보고 그리고 나서 한선생님을 꼬셔보자.


2. 내 안에서 재창조된 생각들

+
니체를 읽고 나니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하나의 깃발아래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 않아도 되니 그것이 좋고,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의 얼굴을 그대로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좋다. 세상이 순식간에 넓어지고 나라는 존재가 그 가운데에 있어도 될 것 같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변화경영의 시작이다.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내가 남들과 어떻게 다르며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가려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음 단계로 변화할 수 있다.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고 몇 번이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나의 생성과 소멸의 반복, 즉 ‘영원회귀’의 개인버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니체도 되고 고병권도 될 수 있다.

‘영원회귀’는 개인버전으로 그치지 않는다. 남과 다른 나를 보았으니, 나와 다른 남도 보게 된다. ‘그(그녀)는 나와 어떻게 다르며 그 다름으로 인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이것이 궁금해 진다. 똑같은 책을 봐도 누구는 재미있어하고 누구는 미치려고 한다. 왜인가. 같은 자리에 있음에도 누구는 신이 나서 일을 하고 누구는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는 또 왜인가. 나는 또 한번의 생성과 소멸의 실험을 통해 이를 탐구해 보고 싶어 진다.


3. 내가 저자라면

니체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서인지 고병권의 문체는 니체의 그것과 닮아 있다. 니체와 고병권을 구별한 것은 따옴표를 통해서였다. 구별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니체가 한 말인지 고병권이 한 말인지 궁금한 것을 어찌하랴.
니체의 연구분야에 나름의 제목을 붙여 새롭게 포장한 것도 좋아 보였다. 그만큼 니체를 사랑해서였을 것이고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의 모든 저작을 수 차례 연구하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얼마나 재미있었을지 감히 짐작해 본다. 누군가를 깊게 연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다만, 뒷부분 두 편의 논문은 어째 리듬이 맞지 않는다. 니체와 함께 경쾌하게 춤을 추고 있다가 끊긴 기분이다.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 달라고 하기엔 너무 다른 느낌이지 않은가. 적어도 문체라도 닮아 있다면 속아 넘어가기라도 할 텐데 말이다. 2부로 하지 말고 부록으로 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4. 책속의 작은 발견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맹자 같은 재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 비트겐슈타인
- 로렌스 스턴
- 에피쿠로스의 클리나멘 (직선으로 날아가던 원자가 그로부터 일탈해서 편위하는 운동)
- 이제는 진화라는 표현보다 변신이라는 표현이 더 마음에 든다.
- ‘한 무리의 가축 떼로의 직장인’
- 내 직업의 슬로건과 이름을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다.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였는데, 새로운 단어를 찾기 보다 새롭게 재해석한 단어를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 니체는 다양한 필명을 썼다. 옛 선비들도 그러했다. 나도 그리해 볼까?


5. 나에게 들어온 글들

<7>
니체의 말처럼 “불행한 시기에 철학을 시작해서는 안된다. 철학은 오히려 행복할 때, 용감하고 성공적인 장년기의 열렬한 명랑함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먼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된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은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19>
참된 인식이란 사물들을 애무하는 것이다.

<20>
아포리즘들은 모두 화살이다… “급소를 맞춘 화살의 저 떨림을 보라, 저 흔들림을 보라.”

<53>
나는 너무 일찍 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계속 중이며 방황 중이다. 그것은 아직 인간의 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번개와 뇌성도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행위들, 그것이 비록 완성된 것일지라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63>
“일반화 할 수 없는 것 까지 일반화 하기 때문에 도덕은 기괴하고 불합리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 때문에 항상 절대적 태도를 취해서 특수한 형태에 대한 고려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78>
거리에 대한 열정(pathos of distance)이란 다른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 짓는 차이에 대한 열정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인 힘과 위계를 긍정하며, 이것을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반으로 사용한다.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대상이 되며,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차이의 생산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도록 노력하는 것, 이 때문에 거리에 대한 열정에는 자기 극복의 원리도 내재해 있다.

<84>
더 이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더 이상 예외자가 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약자는 승리하고 만다. 명령하고 창조하는 자에 대한 떼거리적 혐오!

<90>
신은 아담의 능력에 맞추어, 그 과일은 다른 짐승에게는 좋은 과일일 수 있지만 지금 아담의 몸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말한 셈이다. 그러나 아담은 어린애처럼 이것을 도덕적 금지로 이해했던 것이다.

<103>
다양한 종류의 눈이 있음으로 해서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있고, 따라서 어떠한 진리도 없다

<107>
“너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것은 다양한 시선을 특정 방향에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다. 니체는 이것을 ‘광학의지’라고 부른다.

<108>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능력이다”

<111>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남아 있다면 스승에게 잘못 보답하는 것이다…이제 너희에게 명하노니 네 자신을 찾으라

<112>
니체가 절대주의나 상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창조와 생성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주의가 시선의 훈련을 통해 다른 눈의 생성을 막는다면, 상대주의는 다른 눈을 떠 보았자 별 거 없다고 설득한다.

<120>
우리는 아직 ‘수많은 특이성들을 즐기는 새로운 정치(또는 경영)’을 알지 못한다.

<124>
그리스에서 정치적 영역이 갖추어야 할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다원성이었다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것은 ‘표준화’이다.

<127>
예속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다만 타인들이 평가하는 대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불과하다. 그 안에서 인정되었던 것 또는 그들로 하여금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가치도 찾지 못한다.

<138>
니체는 “서구 전체가 그 제도(민주주의)를 낳고 미래를 낳는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서 존재하는 다양성은 어떤 힘으로도 작동하지 못하고 모래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가축 떼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군주적 본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가치에 적응하려고 하며, 동일한 가치 아래 안주하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는 민주주의를 “능동성이 개념이 박탈되고 적응이라고 하는 것이 전면에 내세워진다. 삶 자체를 외적 환경에 대한 내적 환경의 적응이라고 정의한다”고 비판한다. 서구 민주주의에서 생성의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142>
노동이 칭찬받고 노동의 축복에 관하여 지치는 일도 없이 이야기 되는 경우…나는 저의를 본다. …노동을 바라볼 때, 현재 실제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것, 노동은 각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방해할 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노동을 통해 보다 안전해질 것이다.

<172>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에 대한 두가지 상반된 정의를 구분했는데… 첫번째 정의는 욕망을 ‘획득’과 관련시켜 보는 것이고…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우리는 그 결여되어 있는 것을 획득하려고 노력하는데 이 노력이 욕망이다….또 다른 정의는 욕망을 ‘생산’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때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다. 욕망을 그 자신이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관계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항상 이렇게 물었다. “…여기 만들어져 있는 것은 기아가 원인인가, 과잉이 원인인가?”

<173>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자체는 권력의지다.”

<176>
“나는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도덕을 혐오한다. ‘이것은 하지 마라! 단념해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도덕은 어떤 일이든 행하도록 촉진시키고, 반복해서 행하도록 자극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하도록, 밤은 밤대로 꿈꿀 수 있도록 재촉하며, 이것을 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186>
세계가 무슨 목적이나 도덕적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을 것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놀이일 뿐이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놀이!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놀이를 통해 다양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231>
“모든 완벽해진 것, 무르익은 것들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모든 익지 못한 것들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네 스스로의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자는 여러 번 죽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 한번 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236>
그러나 활동의 순간마다 표현되는 자아를 항상 동일한 이름 아래 가두어 둠으로써 그 변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단일 주체에 대한 환상’처럼, 다양한 여러 작품들을 단일한 저자의 이름 아래 위치시키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이름은 신체의 변신을 이해함에 있어 큰 방해물이다.

<239>
니체가 권하는 독서법이란 걷는 법이나 춤추는 법과 다르지 않다. “책 사이를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자, 문 밖에서 생각하는자”가 독자로 적당하다. 니체의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섬세한 손가락과 용감한 주먹이다. 세세한 차이를 읽어낼 줄 알고 어떤 위험한 주장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44>
“우리는 이미 배를 불태워 버렸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용감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247>
니체의 오랜 좌우명 “ 상처에 의해 정신이 강해지고 힘이 회복된다”

<250>
자신을 찾는 일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253>
“모든 괴이하고 의심스러운 것들, 도덕이 금지해 온 모든 것들을 찾아내며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이고 그것이 철학적 삶이다. 금지의 영역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널려 있다.
IP *.148.19.95

프로필 이미지
귀한자식
2006.06.25 01:14:17 *.145.124.204
은근히..제가 경빈님 팬인거 아세요? ㅎㅎ
같은 생각을 해도
참 맛깔나게, 깔끔하게 표현해 내고야 마는
필력에 매번 감동합니다.

저도 고병권씨 찾다가 보니..한선생님이 말씀하신 것들이 달려나오드라구요. 종로에 있는 연구공간을 한번 찾아가보려고
수첩에 장소를 적어놨어요.
조교님, 같이 가봐요!!!

그리고, 저도 책 뒤에 있는 두편의 글이 왠지 아귀가 안 맞다고 생각했는데...그 글이 저자가 지은 또다른 책? 논문?에서 온 것이드라구요.
거위 부록처럼 들어간 거라고 봐야죠.
니체보다 저자 고병권의 관점에서.
프로필 이미지
경빈
2006.06.25 11:26:26 *.29.236.22
오케이!! 우리 한번 가보자고!^^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